부르심에 합당한 삶 미6:6-8, 엡4:1-6
헬라어로 '부름'(Calling)은 '클레이시스' 로 소명을 의미합니다. '일'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갇혀 있었는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마태나 삭게오와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갇혀 있었는데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수가성의 여인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단에게 사로잡혀 살다가 주님을 만난 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성녀가 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와 권세, 자기 지식에 갇혀 있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이제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이 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정채봉(丁埰琫)씨의 동화 '참 맑고 좋은 생각'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자라난 송아지들에게 고삐를 매기 위해 코뚜레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 송아지가 농부에게 사정합니다. "제발 저에게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세요."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그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곱절이나 일을 잘 할 테니까요." 그래서 농부는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 송아지는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를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지쳐 쉴 때도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꾀가 나기 시작한 맏 송아지는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맏 송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기에 코뚜레 없이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삽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1.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구약 본문 미6:8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과 내 방법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을 내고 바쁘게 산다 해도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불행한 자가 되고 맙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죄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형통할 때에도, 어렵고 힘들 때에도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신약 본문 엡4:2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했습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미혹을 받거나 피조물임을 망각할 때 겸손하지 못합니다. 마귀가 에덴동산에 와서 인간에게 속삭였던 최초의 메시지는 바로 “너희가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마귀의 최초의 음성입니다. 교만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찾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가 부족하고 무가치한 사람인 것을 알아 한 없이 낮아지는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모범 자가 되셨습니다. 빌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는 원래 “굉장한 힘이 어떤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조절되어 나타날 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게 있는 힘과 재능을 잘 길들여진 말처럼 조절하여 선하고 바른 방향으로 쓰여 지게 하는 것이 온유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높여주십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젊은 시절에 청운의 꿈을 안고 자기가 살고 있던 시골을 떠나 큰 도회지로 나가려고 할 때 자기가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면서 마지막 충고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눈만 꿈뻑이시면서 ‘플랭클린’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인사하고 방을 나오다가 자기도 모르게 쾅하고 문지방을 들이받았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은 ‘플랭크린’에게 "여보게 자네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게,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인상 쓰지 말고 환하고 밝은 표정을 잃지 말게나, 그러면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수 있을 걸세"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플랭크린’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겸손한 자세를 취하자, 아무리 내가 언짢은 일을 당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지라도 기쁜 표정, 밝고 환한 표정을 잃지 말자" 이것이 평생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역사상 위대한 사람 중 한사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온유, 겸손한 마음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되시길 소망합니다.
2.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미6:8에 ‘인자를 사랑하며’했습니다. 여기 ‘인자’(仁慈)는 어질게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봉사, 구제, 찬양, 충성, 선한 일을 하면서도 마음의 동기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하는데 산을 옮기는 믿음도 있고, 천사의 말을 하고, 몸을 불사를 정도로 구제를 한다고 하여도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랑 없이 하는 것은 어떤 의미나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시간은 허무하고 낭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하며’의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언약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구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신약 본문 엡4:2에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했습니다. 부름 받은 자들이 행할 대인관계의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용납' 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포용하는 관용을 의미합니다. 비록 내 의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넓은 마음을 가지고 감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마음에 안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용납하면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은 상대를 이해하며 사랑으로 받아줌에 달려 있습니다. 이기선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 꼴 보고 나를 사랑하시나, 내 꼴은 그 꼴 보다 더 못하다." 라고하며 모든 사람을 용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용납은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임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방적 용납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서로 받아주는 관계가 될 때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는 목사님이 주일 아침에 설교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목사 사택의 문을 두드립니다. 열어 보니 남루한 차림의 아이 셋이 문 밖에 서있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파괴된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왔다며 교회를 구경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목사는 바쁜 시간이었으나 교회의 이곳, 저곳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참 구경한 후 큰 아이는 예배가 언제 시작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양말짝이 달라도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나요?" 예배당이 마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는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묻습니다. "만약 양말을 신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목사는 여전히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제 양말은 짝이 틀리고, 동생은 아예 양말이 없거든요". 잠시 후 강단에 올라선 목사의 양말짝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스꽝스러운 목사의 모습을 본 교인들이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잠시 후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의 양말짝이 서로 다른 것을 본 교인들은 조용히 서로 양말을 한 짝씩 바꿔 신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루한 모습을 가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용납하기 위한 교인들의 배려였습니다. 따뜻한 사랑을 체험한 아이들은 교인들의 도움으로 훗날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정의를 행하며 공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미6:8에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했습니다.
‘정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인 종교 절기를 준수했고 이마에 경문을 붙이는 등 외형적인 종교생활에는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종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생활을 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재물을 약탈하고, 권력자는 백성들의 것을 토색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빴습니다. 특히 본서의 저자인 미가 선지자가 활약한 당시 유다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말하는바 ‘정의’는 매매 행위나 재판 등 구체적인 생활에서의 공평무사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의로운 삶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불의와 악에 묻혀 하나님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앙생활에서의 거룩 성이 생활에 연장되지 못하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한 예로 ‘인권’이란 명분을 내세워 ‘소수 차별 금지법’을 입법화 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건 공의가 아닙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도 동성애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현재 40만 명가량이 된 다고합니다. 게이 레즈비언 들이 동성애 퀴어 축제를 하고 벌건 대낮에 수만 명이 모여 옷을 벗고 축제를 하며 합법화시켜달라고 합니다. AIDS는 동성애자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AIDS는 다른 사람에게 감염을 시켜 파멸로 몰아갑니다. 오늘날 AIDS 신규감염환자의 94% 이상이 남성동성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AIDS 환자는 국가로부터 모든 의료비를 지원 받습니다. 환자를 1인실에 입원시켜주고 간병인까지 붙여줍니다. 그들에게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 약값만 350만원-500만원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동성애를 통해 10대, 20대 AIDS 환자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전부 다 AIDS 환자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인데 유독 우리나라는 AIDS 환자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는 자살률이 높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동성애는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질서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동성애는 주님의 뜻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증한 것이요 저주의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등 등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는 변하고 없어져도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공의로운 삶인 것을 믿고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정의를 행하며 공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아멘.
<2018. 11. 8. 성산교회 원로 목사.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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