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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문학으로] 시인 백기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 26. 09:41

[최재봉의 문학으로] 시인 백기완

등록 :2019-01-24 18:09수정 :2019-01-25 11:35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정오 무렵 찾은 통일문제연구소는 바닥이 냉골인 듯 차가웠다. 오전부터 불을 땠는데도 온기가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백기완 선생은 실내에서도 두툼한 파카 차림이었다. 즐겨 입던 한복 두루마기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큰 수술을 받은 선생은 옥외 집회에 참석할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아무래도 수술 전에 비하면 많이 쇠약해 보였다.

“늘 입에 올리고 싶은 시인이 있어야 해. 들길을 걸으면서도 생각나는 시인이.”

잣을 띄운 생강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이 말했다. 그 말씀이 곧 시 같았다. 사실 오랜만에 선생을 뵌 것은 다음 주말에 선보임 공연(시연)을 하는 노래극 <쪽빛의 노래>에 관한 말씀을 듣고자 해서였다. 그가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쓴 장편 서사시 ‘갯비나리’에 곡을 붙인 공연이 <쪽빛의 노래>다. ‘갯비나리’라고 하니 저 유명한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인 선생의 다른 장시 ‘묏비나리’가 떠오른다. 5월 하순에 초연을 하는 <쪽빛의 노래>의 격정적인 첫 대목은 이렇다.

“말하라 말하라 말을 해 왜 말을 못하는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을진댄/ 말을 하란 말이다 우릴 왜 바다엘 처넣었는가/ 아직 그 마알간 물빛에도 물들질 않았고/ 걸핏하면 얼굴부터 발가스레/ 가노을빛으로 달아오르는 새내기 귀여운 우리를/ 무엇 때문에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다시는/ 돌아오질 못할 지옥으로 강제 침몰시켰는가”

‘재야 투사’ 백기완 선생과 노래극 또는 시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첫 시집 <젊은 날>(1982)을 출간한 이래 시집 여러권과 산문집, 소설, 영화 대본(시나리오) 등을 펴낸 엄연한 문학인이다. 어려서는 축구선수를 꿈꾸었고 청년기에는 영화감독을 선망했다지만, 문학이야말로 그의 평생에 걸친 애정과 헌신의 대상이었다. 미수를 앞둔 선생에게서 나는 영원한 ‘문학소년’을 본다.

가령 그는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담벼락에 시를 써 붙이는 ‘벽시운동’을 오랫동안 펼쳤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나서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두고 2014년에 쓴 시 ‘눈물-이기는 그날까지’는 누군가 붉은 페인트로 덧칠을 했다가는 아예 화학물질로 완전히 지워버리는 테러를 겪기도 했다.

‘시인 백기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그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이다. 그는 평소 말과 글에서 외래어와 한자말을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쓰기로 호가 나 있다. 앞서 인용한 노래극 <쪽빛의 노래>에도 나오는 ‘새내기’를 비롯해 달동네, 동아리, 모꼬지처럼 일상어로 자리잡은 말들을 처음 만들어 쓴 게 선생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덧이름(별명), 땅별(지구), 새뜸(뉴스), 배내기(학생), 한살매(인생) 같은 낱말은 당장 살려 쓰고 싶을 정도로 어여쁘다.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설명하는 근거 중 하나로 그가 새로 만든 영어 단어들을 드는 견해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어 언중은 선생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시집 <젊은 날>의 시들을 선생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몸으로 감옥에 갇힌 채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자 썼다. 부쩍 노쇠해져 보이는 선생을 뒤로하고 나오며 나는 ‘젊은 날’의 마지막 연을 안타까이 되뇌었다.

“그렇다/ 백번을 세월에 깎여도 기완아/ 너는 늙을 수가 없구나/ 분단독재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들/ 나는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구르는 마루 바닥에/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


책지성팀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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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9780.html#csidx4814067ffce4b0892a77367e4dd99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