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언론인 출신 작가 송경자씨
여고 동창인 고 박기순의 불꽃같았던 짧은 생애를 꼼꼼하게 취재해 <스물 두 살 박기순>을 펴낸 송경자씨. 사진 송경자씨 제공
‘스물 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1978년 12월 26일 새벽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남대병원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통곡했다. 저녁이 되면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김민기는 영안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상록수>를 불렀다. 들불야학 학생은 “우리의 마음 속에 길이 새겨 둘 슬픈 이름 기순 언니”라는 조시를 낭독했다. “내가 너를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끄나!” 막내 딸의 주검 앞에서 어머니는 하늘을 보며 울었다.’
언론인 출신의 송경자(62) 작가는 고 박기순(1957~78)의 평전 <스물두살 박기순>(심미안 펴냄)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고인의 짧은 생을 꼼꼼하게 세밀화로 기록했다.
40주기 ‘스물 두살 박기순’ 평전 펴내
‘들불야학’ 만들고 스스로 노동자로
‘5·18’ 관련 들불 7열사 중 유일한 여성
‘들불야학’ 만들고 스스로 노동자로
‘5·18’ 관련 들불 7열사 중 유일한 여성
전남여고 동창·전남대 동아리 동지
5년간 80여명 직접 또는 서면 인터뷰
“기순은 헌신적이며 독립적인 운동가”
5년간 80여명 직접 또는 서면 인터뷰
“기순은 헌신적이며 독립적인 운동가”
송 작가는 박기순을 생각할 때마다 “붉은 볼에 걸걸한 목소리, 물들인 군복바지 차림”이 떠오른다. 두 사람은 전남여고를 함께 다녔지만 서로 몰랐다가 대학에 와서 루사라는 써클(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사이다. 1976년 전남대 사범대(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뒤 78년 3학년 때 노동현장에 들어가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취업해 스스로 노동자가 됐던 기순은 송 작가에게 “친구지만 외경의 대상”이었다. 송 작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박기순에 대한 자료가 유실되고, 사람들의 기억 또한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송 작가는 2013년 박기순 추모제 때 ‘들불야학 7열사’ 가운데 박기순만 기록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평전 집필을 결심했다. 그는 그때부터 80여 명을 대면 또는 이메일·전화 등으로 인터뷰해 지난해말 40주기에 평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1978년 7월 광주시 서구 광천동 광천성당 안 교리실에 문을 연 들불야학 1기 강학들. 왼쪽 첫번째가 박기순. 사진 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송 작가는 “결혼식 때나 바퀴 달린 삼륜차가 들어올 정도의 벽촌에서 성장한 친구가 어떻게 그런 사회의식을 갖게 됐는 지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박기순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노동면 용화리 죽현마을은 오지였다. 기순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전남대 운동권이었던 작은오빠 박형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기순을 매우 아꼈던 ‘혁명시인’ 고 김남주는 기순에게 “노동이 최고다”라며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박기순은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폈지만, 거침없고 헌신적이며 독립적인 운동가”였다. 송 작가는 “기순이는 그런 기질과 성품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농사짓던 그의 아버지는 강한 정신력과 결기가 있었고, 어머니는 맑고 순수하고 “봄날 햇볕처럼 따스한 분”이었다. 영특했던 기순은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광이었다. 보성여중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은 3년 내리 특이하게도 철학자였다. 여고에 진학해서도 도서관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대학에서도 끊임없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 표지. 심미안 제공
박기순은 1977년 3월 대학 동문 4명과 함께 산수동 노인회관에 열었다. 근로 청소년 30여명의 검정고시를 돕기 위해 만든 이 야학은 8개월만에 문을 닫았다. 송 작가는 “기순이 검정고시 야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순은 1978년 1월 여고 친구 전혜경의 소개로 그의 오빠가 참여하는 서울 신림동 노동야학인 겨레터 야학을 방문한다. 그리고 겨레터 야학 참여자들의 도움을 받아 광천성당 안 교리실에 들불야학 문을 연다. 기순은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과 들불이라는 말이 나오는 <미국의 노동운동 비사>를 들어 학당 이름을 들불로 제안했다. 1978년 7월23일 열린 1기 입학식엔 학강(배우면서 가르치는 학생) 35명과 강학(가르치면서 배우는 교사) 7명이 참석했다. 서울을 제외하곤 지역에선 처음 창립된 노동자 야학이다.
하지만 들불야학 개교 후 기순은 한달여동안 도피해야 했다. 1978년 6월 우리교육지표 사건 이후 벌어진 시위의 배후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송 작가는 “기순이 학습팀 조직, 종합시험 거부 투쟁 등을 통해 전남대 여학생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활동가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전남 해남으로 찾아왔던 박기순을 만났던 황석영 소설가의 부인 홍희윤(소설가)은 송 작가에게 “기순이와 이야기하면서 머리를 탁 때린 것처럼 충격을 받았어요. 변혁운동에 대해 자신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랍고 감동스러웠어요”라고 이야기했다.
박기순은 노동야학을 하며 스스로 노동자가 됐다. 동신강건사에 일당 800원을 받는 견습 조립공으로 취업했다. 송 작가는 “기순은 위장취업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로 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생애 마지막 날이 된 78년 성탄절에도 들불야학 땔감용 나무를 하러 갔던 박기순은 밤 12시가 다 돼 집에 들어갔다가 연탄가스에 변을 당했다.
19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들불야학 동지’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열렸다.
들불야학은 5·18 이후 풍비박산이 났다. ‘민주시민 투쟁위원회’ 대변인을 맡았던 들불야학 강학 윤상원(1950~80)은 5월27일 새벽 총을 맞고 숨졌다. 들불야학 출신 5명은 그 날 새벽 도청 인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배치돼 박용준이 계엄군 총탄에 스러졌다. 주민운동가로 들불야학에 특별강학으로 참여했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기획실장 김영철도 체포돼 영창에서 자살을 기도해 16년동안 정신병원을 오가다가 숨졌다. 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 등 들불야학 출신 7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6월27일 들불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들불야학은 1981년 7월폐교됐다. 송 작가는 “5·18 때 커다란 역할과 엄청난 희생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한 부분이 됐다”고 말했다.
박기순의 큰 오빠인 해직언론인 박화강이 지난 2010년말 전남 보성 득량에 한옥으로 지은 ‘불이학당’의 상량 때 적은 글.
박기순은 1982년 2월20일 노동야학 동지였던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날 밤 작은 올케 윤경자의 꿈에 기순이 보였다. “기순은 너른 들판에 보라색 자잘한 꽃이 만발해 있는 들판을 막 뛰어갔다. 올케가 부르자 ‘언니~’하면서 꽃길을 따라서 손을 흔들고 갔다.” 그 해 4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소설가 황석영이 살던 광주 운암동 집에서 몰래 만든 노래극 7편의 창작곡 중 1곡이 ‘임을위한 행진곡’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들불야학의 정신은 ‘불이학당’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지고 있다. 기순의 큰 오빠로 5·18 해직언론인 박화강(전 <한겨레> 기자)은 지난 2010년 전남 보성에 ‘불이학당’을 짓고 3년 째 인문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송 작가는 “기순의 들불야학과 큰 오빠 화강의 불이학당은 불이(不二)라는 말처럼 다르면서도 같다”고 평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