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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칼럼] 올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1. 13. 19:41

[조은 칼럼] 올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

등록 :2019-01-10 18:28수정 :2019-01-10 22:17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그토록 심한 징벌적 대체복무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양심 없는 병역거부자’의 양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슈퍼바이러스가 활성화되는 데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새해 눈을 떴을 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몇쯤 생각난다면 축복이다. 그건 설렘이다. 그런데 설렘만은 아니다. 무거움도 함께다. 새해 벽두에 쓰는 칼럼이니 뭔가 산뜻한 글로 시작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우선 올해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두 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한 명은 지난해 읽게 된 한 편지의 주인공이고, 또 한 명은 병역거부자로 수형 중에 쓴 <감옥의 몽상>이라는 책의 저자다. 영상인류학을 공부하는 제자가 어느 날 어떤 편지를 내게 보여주기 전까지는 병역거부 앞에 붙은 그 ‘양심’의 무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실은 무지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편지를 보여준 제자는 ‘광주 5·18 가해자들’에 대한 다큐를 베를린자유대학 석사 졸업 작품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다큐를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피해자에 대한 진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무슨 가해자에게까지 관심을 쏟느냐는 질책성 반응이 다수였고, 아주 소수만이 상층 지휘부가 아니라 맨 아래에서 직접 총구를 겨눴던 가해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미지근한 격려를 했다. 다큐 기획 단계에서 힘을 얻은 것은 뜻밖에도 <전쟁 없는 세상>이라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사이트에 올라온 한 소견서를 읽으면서였다. 그 소견서는 계엄군으로 광주에 간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쓰면서 다른 한편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지난한 고민의 과정과 사유로 채워져 있었다. 제자는 그 소견서의 주인공을 찾아 5·18 ‘가해자’에 대한 다큐를 찍고 싶다는 긴 편지를 보냈고 그는 감옥에서 곧 답장을 보내주었다. 약간 길기는 하지만 편지 일부를 원문대로 인용한다.

“편지를 받고 감옥에서의 일상에서 잠시 잊고 있던 광주를 다시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소견서를 쓸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최근 다시 읽어보건대, 아버지와 광주 그리고 지난 과거를 감옥에서의 ‘고난’ 속 성장을 위한 서사로 환원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어떻게든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를,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부여해 불안을 달래고 싶었던 것일 테죠.

가해자/피해자 이분법을 넘어 국가폭력의 구조를 다루겠다는 문제의식엔 저도 공감합니다. (중략) 그들을 단순히 폭력과 탐욕에 굶주린 룸펜이거나, 아이히만 같은 냉혈, 신학적 이분법에 근거한 ‘공수 마귀’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요? 군사독재 시절 보육원을 나와 고아로서 생존해야 했던 아버지의 계급적 조건, 파병 갈 땐 영웅이었으나 전후에 천덕꾸러기가 된 월남전 상이군인들의 존재가 저를 머뭇거리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폭력이 안긴 상처를 이분법을 넘어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저의 문제의식 같기도 합니다.”

그 편지의 앞부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최종 결정하기 전 광주에 내려가 금남로 광장에 걸터앉아 광주 시민들과 함께 ‘그날처럼’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보낸 시간이 ‘쿨하게’ 나온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의 병역거부의 연원을 아버지가 ‘광주 5·18 군인’이라는 데 떠넘기지도 않는다. 특전사 14년 근무를 자랑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맞서며 힘들게 자기 양심에 귀기울이는 힘든 선택의 과정을 내보인다. 가족사와 역사의 아픈 접점을 힘들여 읽어내는 그 편지의 어떤 글귀들은 아프게 나의 ‘지적 양심’을 흔들었다. 그 편지의 잔상이 채 가시지 않은 때 우연히 일면식도 없는 출판사 편집자한테서 <감옥의 몽상>이라는 책을 받았다. 책장을 열자 표지에는 없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감옥 일지라는 설명과 “무엇보다 재미있다”고 또박또박 쓴 손편지가 끼여 있었다. 내가 읽은 편지의 주인공과 저자가 같은 사람인가 싶어 책 표지를 찍어 제자에게 확인했더니 아니라는 답이 왔다. 그 편지에서 ‘지나치게 양심적’인 한 젊은이의 성찰과 국가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감동했는데 그런 젊은이가 한 명이 아니고 또 있다는 사실에 <감옥의 몽상>을 읽는 내내 머리도 마음도 심호흡을 멈출 수 없었다.

<감옥의 몽상>은 현민이라는 필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쓴 감옥 일지다. 저자는 이 책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책으로 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감옥에 간 사회운동가의 책이라는 전형적인 서사로 단칼에 정리되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감옥에서 경험한 내면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에 관한 책으로 읽혔으면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의 저자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할 만한) “드라마 같은 인생역정이 없고 정치적 대의의 담지자도 아니고 신념을 전달하려고 결연한 눈빛을 보내는 젊은이도 아니며 소심한 젊은이가 웅크리고 앉아 눈치를 보고 있을 따름”임을 줄줄이 나열하면서 자신의 ‘찌질함’조차 자학하지 않고 긍정하는 병역거부운동을 하고 싶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병역 대신 감옥을 택하면서 어머니는 간신히 설득했지만 손자를 당신 살처럼 아끼며 키워주신 할머니한테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면서도 담담하게 “나는 이제 병역거부자라고 불리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이주한다”고 쓰고 감옥으로 간다.

참을 수 없는 경박함과 속 빈 구호로 도배된 사회에서 이토록 내면을 응시하고 양심에 따라 자기 길을 찾으며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은 경이롭다. 대체복무 규정이 없는 병역법에 위헌 결정이 나오면서 정치판에서는 “그럼 군대 가는 게 비양심적이라는 말이냐”는 학력을 의심케 하는 국회의원들의 발언을 보았는데, 이를 추인하듯 정부는 국제적 통용어까지 무시하면서 병역거부 앞에 붙은 ‘양심’이라는 단어를 제거하고 그 본래 의미를 훼절한 법안명을 내놓고 있다. 대체복무를 현역 입대의 2배 그리고 복무지는 교정시설 합숙에 한정한다는 발표를 보고서는 <감옥의 몽상>에 버금가는 교정시설 일지가 쏟아질지도 모르겠다는 썰렁한 유머로 자위했지만, 대체복무안을 마련하려 했던 원래 의도를 이상하게 비틀고 있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최근 일련의 과정을 보며 상욱이라는 편지의 주인공이 자신의 편지와 소견서를 “자유로이” 인용해도 좋다면서 내비친 사회적 소통에 대한 갈증과 아픔이 따갑게 와닿았다. 과하게 손해 보면서도 양심에 따라 번민하는 젊은이들과 과하게 뻔뻔한 무양심 기득권의 무망한 싸움을 보며 뒷맛이 쓰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그토록 심한 징벌적 대체복무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양심 없는 병역거부자’의 양산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슈퍼바이러스가 활성화되는 데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올해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몇은 더 있다. 평화실천가라는 명함을 쓰는 사람도 만나보고 싶다. 지난해 경기 북부지역 소재 한 대학의 ‘탈분단 경계 문화 연구원’이 주관한 국제회의에서 오랜 분단을 종식한 국가들의 경험을 발표한 세션이 있었다. 북아일랜드에서 온 한 발표자의 소개서에는 실천가(practitioner)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직업일까 궁금했는데 발표를 듣고 나서야 그 실천가라는 단어 앞에 평화가 생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엔지오(NGO) 실무자들한테 종종 활동가(activist)라는 명함을 받는데 새해에는 평화실천가라는 명함을 내미는 사람들도 만나고 싶다.



이들보다 더 무겁거나 덜 무겁다고 말할 수 없는 만나보고 싶은 또 한 사람을 덧붙이고 싶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도 올해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많은 시민들과 함께 광장에서 만나보고 싶다. 올해는 마음속 금단을 깨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고심하는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때로 부모와도 맞서고 기득권의 상상력을 넘어 자기 길을 가는 젊은이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7883.html#csidx34cb2599ab4e0fba1d5b1cfe5113e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