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그때 1년 동안 어렵게 사는 누나집에 얹혀살면서 공부를 했다. 내가 아침에 누나집을 나서는 시간은 아침 5시 30분이었다. 시내버스 첫차를 타기 위해서는 그 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다.
남산 도서관이 끝나는 시간은 밤 10시였다.
그러면 서울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누나집에 도착하면 밤 11시였다. 그 생활을 1년 동안 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였다. 막차를 타고 갈 때면 버스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콩나물시루였다.
사람이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을 것 같은데도 안내양이 '푸시맨'처럼 승객의 등을 우겨넣으면 신기하게도 사람이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그것이 참 신기했다. 그러면 안내양은 문도 닫지 않고 버스 옆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서 “오라이~”를 외쳤다.
그 연약한 아가씨의 어디에서 그러한 괴력이 나왔는지 지금도 나는 신기하기만 하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거나 여상을 졸업한 뒤에 서울로 올라온 아가씨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내버스 안내양이나 봉제공장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중노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대부분이 동생들의 학비를 대거나 고향의 부모님께 꼬박꼬박 생활비를 부쳐 주는 효녀들이었다. 그렇게 누나들이 보내준 돈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동생들이 전국에 수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내양 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시내버스 회사들이 일시에 안내양 자리를 없앴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그 아가씨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뻔했다. 대부분이 안 좋은 곳이거나 불량한 곳이었다.
어제 여수에서 횟집을 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장사는 잘 되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했다. 작년까지 종업원을 11명이나 데리고 일을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밤에는 아르바이트까지 고용했던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직원 5명을 데리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그 5명의 월급 주기도 빠듯하다고 했다. 요즘 식당들 장사가 그런 것 같다.
어제 서울에 있는 어느 식당엘 갔는데 그 큰 식당의 홀에 종업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손님이 무인 주문기에서 메뉴를 직접 주문하고 커피숍같이 알람이 울리면 손님이 직접 식판을 가져오고, 먹고 나면 가져다주는 시스템이었다.
과거에는 대여섯 명의 직원이 서빙을 하던 식당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주방에 직원 서너 명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홀에는 직원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도 이 무인 시스템에 무덤덤하게 적응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그만큼 빨리 변해 가는 것이다.
내년에는 전체 종업원의 50%가 대체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도 나왔다. 그것을 보면서 옛날의 안내양들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