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製 맛-소설, 1970.01소설, 콩트, 에세이, 칼럼
“야 정복했니?” “뭘 말이야?” “가쓰꼬 고년 말이다.” “그건 너무했잖아?” “뭐가 너무해. 갖고 놀 생각 아니면 너는 친일파거나 매국노야.” 사실 김가의 말은 너무 극단적인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말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논에서 김을 매던 우리 조상을 장난삼아 총을 시험해 본다고 표적으로 쏘아 죽인 왜놈의 딸과 왜 하필이면 사귀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쓰고와 육 개월 남짓 사귀고 있었다. 전혀 우연한 인연이 나를 그녀와 가깝게 만든 것이다. 유월 말에 들어 EWC(동서문화센터)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많은 외국 학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호놀룰루의 공군 밴드를 동원해서 신입생 환영회를 하였다. 춤을 추면서 자기소개도 하고 서로 친해지도록 주선한 것인데 동양에서 온 학생들은 댄스를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사회자는 여자를 불러 원형으로 세우고 뒤로 돌아를 시켜 한 사람씩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는 파트너를 끌어오게 하였다. 이 때 나를 붙든 것이 가쓰꼬였다. 그녀는 나보다 일 년 전에 이곳에 와 있던 명랑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그 뒤 내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했는데 그 뒤로 갑자기 친해졌다. 이 때 나는 그녀에 대해 열등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영화를 보던 때였다. 그것은 음악영화기 때문에 나는 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불이 활짝 켜지자 나는 나가자고 했다. 그녀는 짐짓 못 알아들은 체하며 지금은 중간에 쉬는 인터미션이기 때문에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혼자 나갔다 오라고 했다. 자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고 하면서. 한국에서는 영화 중간에 인터미션 같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TV를 밤 내 보면서라도 영어를 빨리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는 터였다. 그녀는 내 감정을 그렇게 배려하는 여학생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한참 서성이다가 돌아갔다. 그녀에게 느끼는 또 하나의 열등감은 나는 승용차가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으로 승용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었다. 국민소득이 겨우 88불이 넘은 나라의 학생이 무슨 승용차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독일제의 폭스바겐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야 했다. 영화 보러 나올 때도 그녀가 운전을 했고 귀가 할 때도 그녀가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운전할 줄 아세요?” “모릅니다.” “배우지 않으시겠어요?” “기회 있으면 배우겠습니다.” 그녀는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해서 눈을 아래로 뜨고 눈치를 살피더니 “원하시면 가르쳐 주고 싶어서요.” 라고 말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치근덕거려 되도록이면 떼어 내려고 하는 판에 왜 나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아주 나를 풋내기 어린애로 알아 귀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싫습니다.” “내 차로 거저 가르쳐 주겠다는 데도요?” 그녀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면 전화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 시간이 나는 오후를 골라 한적한 골목으로 차를 몰고 가 운전 연습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자연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고 가쓰꼬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자 김가는 나에게 친일파, 매국노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명심해 일본 것들은 육체를 농락할 것 밖에 가치가 없는 것들이야. 우리가 놈들 때문에 얼마나 착취를 당하고 살았니. 넌 자존심도 없니? 작년에 굴욕적인 한․일협정 조인 때문에 데모했던 것도 생각 안나? 정 좋으면 빨리 해치우고 끝내.” “우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초등학교 땐 고무가 없어 맨발로 학교를 다니고, 교실 앞 물통에서 발을 씻고 교실에 들어갔잖아? 종도 떼 가버려서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고. 공부는 뭐 했나? 송탄유 따기, 건초 베기, 근로 동원. 겨울엔 눈사람 만들어 놓고 루스벨트, 처칠이라고 이름 붙이고 죽창으로 찌르는 훈련……. 지긋지긋 하쟎았어?” “과거를 잘 알지. 하지만 조상 정치가들의 죄를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이 져야 한다는 이유가 뭐야?” “암 져야지. 아담의 죄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듯 회개하지 않고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 그런데 뭐야. 그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뻔뻔스럽기가 한이 없단 말이야. 배 안에서 그 왜놈 새끼 봤어? 히노마루(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있던 새끼 말이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던 학생들은 비행기 대신 배편으로 미국으로 왔었다. 배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겸했던 것이다. 그 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아-태 지역의 왕자처럼 당당히 다니던 일본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옷을 벗어놓고 어딜 나갔다 왔는데 와보니 그 윗옷이 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만 미워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대만, 필리핀, 월남, 태국 등 미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어. 너도 조심해 고년과 함께 다니면 너도 미움을 받게 될 걸.” 정말 이웃에 있는 일본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할까? 지금까지 보아온 가쓰꼬는 그렇게 원수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들의 조상이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것은 국사책 맨 뒤에 두 장쯤 씌어 있는데 무슨 말이 씌어 있었는지 기억에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운전 연습이 끝나면 차를 한적한 곳에 세워놓고 한국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화장품 냄새로 나는 정신이 몽롱할 때가 있었지만 김가가 말한 것처럼 지금이 기회가 아닐까하고 그녀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은 솟지 않았다. 나는 교회에서 훈련 받은 순한 양이었다. 나는 호기심 많은 여동생을 만난 것처럼 쓰디쓴 한국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나라는 개화가 늦어 은지(隱者)의 나라로 알려져 순진하게 살고 있던 민족이었다. 한일 합방 후 일본에서는 일거리가 없어 놀고 있던 일본 사무라이(무사)들을 한국에 이주시켰는데 그들은 공연히 소총을 시험해 보느라고 어린애를 업고 가는 한국 부인을 쏘아 죽인 일도 있었다. 여인은 즉사하고 등에 업힌 어린 것은 총을 맞아 손가락이 다 없어졌는데 같이 가던 남편이 통곡하니까 일본 군인이 한두 푼을 주고 가려고 했는데 남편이 거절하자 그들을 발길로 걷어차 쫓아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미안해요.’ ‘몰랐어요,’, ‘저라도 사죄하고 싶어요.’를 연발하면서 “당신은 나를 용서할 거지요?” 하고 팔을 붙들고 머리를 어깨에 기대었다. 가쓰꼬는 나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렇게 후미진 곳에서 마구 나에게 파고 들어도 되는가? 내가 언제 늑대로 변할지 아는 것일까?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깊은 함정이라고 성경의 잠언에는 말했는데 정말 나는 함정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가쓰꼬는 분명 음녀가 아니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가쓰꼬, 당신은 나를 싫어해야 해요. 한국 사람이 얼마나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지 압니까?”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싫어 할만한 이야기만 계속했다. 명치 41년(1908년)부터 일본은 한국에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땅을 헐값으로 사들이고 특히 매년 일본의 떠돌이 사무라이(浪人. ろうにん) 삼만 명씩을 일본에서는 말썽만 부리므로 한국으로 이민을 시켰는데 그 때 조선 총독까지 일본의 떠돌이 사무라이가 이민으로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려고 했다. 이 때 일본의 역사가 아오야기 스나다로는 총독에게 이에 대해 진정서를 냈는데 진정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니 굴욕적인 글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왜 일본의 가난한 백성이 조선에 들어와 돈을 버는 것을 반대하는가? 일본에서 한 마지기를 팔아 조선에서 열 마지기를 사면 일본 사람에게 좋고, 또 땅을 다 판 조선 사람들은 안착할 곳이 없어 북간도로 떠나 나라가 시끄러워진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고향 근처에 머물러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농토를 장만해 준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왜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여 이민정책을 실천 못하게 하는가?’ 가쓰꼬는 일본의 막부 말기부터 명치유신에 걸쳐 직업을 잃은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얼마나 칼부림을 하며 나라를 어지럽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에 가서까지 그런 짓을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싫어하지 않지요?” 그녀는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었다. 나는 그녀가 싫지 않았고 그녀를 떠날 수가 없었다. 내가 결국 운전 면허시험에 합격하고 면허증을 갖게 되자 나는 그녀를 옆에 태우고 그녀 차를 몰고 다녔다. 한국에서도 해보지 못했던 운전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었다. 한국 학생들은 다 나를 싫어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본 학생들도 가쓰꼬를 싫어하였다. 그것이 우리를 고립시키고 더욱 가깝게 하였다.
“한국 학생들이 절 싫어하지요?” 우리는 하룻밤 맥주홀에 앉아 있었다. “당신을 싫어하지 않고 날 싫어하지요.” “일본 애들도 날 싫어해요.” “어떡할까? 이제부터 우리 만나지 말까?” “남의 이목을 그렇게 의식하세요? 우리가 뭐 나쁜 짓 하나요?” “난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같이 있는 것이 기뻐요. 그런데 누군가가 너는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쁩니다. 일본을 용서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때 일본 학생들 한패가 들어오더니 우릴 보고 일부러 옆 테이블에 와 앉았다. 장내는 땅콩 껍질이 수북하고 소란했기 때문에 물론 우리말이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안 체를 했으나 그들은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자기들끼리 지껄였다. “어떻게 할까, 나갈까?” “싫어요.” 퍽 어색하였다. 그녀는 이 국면을 어떻게 넘길까 생각하며 땅콩 껍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결심 했다는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나 가까이 갈 테니 좀 안아주세요.” 그녀는 내 옆 의자로 앉으며 내 가슴에 안겼다. 나는 그녀를 오른 팔로 껴안으며 왼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 대해 이상한 색 안경을 쓰고 있어요. 약간 경멸하고 사기꾼이나 노름꾼이 많은 나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녀는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왜 서로 사귀어보지도 않고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만나기만 하면 한 편은 잡아먹거나 잡아먹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입견 대문에 우린 더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옆 테이블에 앉았던 일본 학생 하나가 벌떡 일어서자 모두 덩달아 일어서더니 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있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크리스천은 고상한 사랑만 하지 않아요?” “왜 내가 이리가 되기를 원해요?” 그녀는 높이, 빨리 뛰는 나의 심장의 고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 내 가슴에서 빠져 나가 앉으며 말했다. “참 사랑은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고 정복당하고 싶은 욕망이래요.” 나는 가쓰꼬가 좋았다. 그녀를 결코 정복하여 상처를 주고 후회하지는 않으리라. 이때 그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참, 제 차 안사시겠어요?” 그러면서 설명했다. 그녀는 내년에 귀국하는데 그 때 팔면 제 값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내놓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지금 내놓을까 하는데 정든 물건이 되어서 너무 아까와요. 당신이 산다면 싸게 드릴 게요.” “싸게라면 공으로?” “삼백 육십 불정도. 원래 육백 불에 산거거든요. 일 년도 못 굴렸어요.” “그렇게는 돈이 없는데.” “그러니까 지금 팔월 아녜요? 구월부터 내년 이월까지 매년 육십 불씩만.” “뭐야, 벌서 다 계산해 둔 거야?” “어머 그럼 싫어요. 우리 추억도 있고 해서 꼭 당신을 드리고 싶은데 얼마 정도 저축할 수 있을까 생가해서 값을 정한 거예요. 굴리고 나서도 그 값에 도로 팔 수 있을 거예요. 삼백육십 불 저축해서 한국에 가지고 가세요.” GNP가 90불도 안되는데 그렇게 저축할 수 있다면 큰돈이 될 것이다. 어떤 학생은 거의 돈을 쓰지 않고 이년에 1000불을 저축해서 귀국한 사람도 있었다. 나에겐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사기로 하였다. 무이자 육 개월 할부였다.
내가 차 등록을 하고 차를 사게 되자 김가는 아주 나에게 명령을 했다. “넌 말이야, 일주일에 세 번씩 우릴 교회에 데려다 줘야 해.” “왜?” “우린 일 주일에 세 번씩 밤에 한국인 삼세에게 교회에서 우리말을 가르쳐 주고 있거든. 이 갸륵한 일에 차가 없다면 말이 돼?” “글쎄, 내가 왜 태워 줘야 하는데.” “그 차가 고 계집애 것이니까 부려먹자는 것이지.” “내가 샀다지 않아.” “이 맹추가 사긴. 그냥 가져야지. 글쎄 얼마나 약탈을 당했는데. 까짓 거 떼먹어도 죄 될 게 없어.” “하지만 과거를 그렇게 이어 맞추는 것은 이성적도 합리적도 아니야.” “이성 좋아하네. 잘해봐.” 그러더니 김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삼세 학생들 말이야. 이렇게 모국을 잊고 살아도 되는 거야. 우리는 귀한 시간 빼서 가르치러 가는 것인데 우리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야.” “왜?” “곧 잊어버릴 테고. 또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는 거지.” “그럼 벽을 상대로 가르치나?” “꼬마 애들이 할머니들의 등살에 배우러 나오는 거지. 그냥 동요를 가르치는 거야. 찌르릉 찌르릉, 송아지 송아지, 학교 종이 땡땡땡, 뭐 이런 거.” 김가는 그런 동요를 가르치고 있으면 한국인 삼세의 어린이들이 모국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것 같아. 초원에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개울가에 학교가 있는데 종을 땡땡 치면 공부를 시작하고, 또 좁은 길로 자전거가 찌르릉 찌르릉 하고 지나가면 학생들은 놀라 길을 비켜서고…….” “얼마나 목가적이니” “하지만 그러니까 한국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느냐, TV가 있느냐 하고 묻는 게 아닐까? 이놈들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천구백년 초에 이곳 농장의 노동자로 팔려 와서 조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자녀들에게 전해 주지 못한 거야. 그래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 그들은 여기서 떳떳한 미국 시민으로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 말이야.”
십이월부터 나는 일본 KZ방송국에서 매주 토요일 한 시부터 삼십분 간 한국의 풍속, 가요, 전설 등을 소개하는 프로를 맡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가쓰꼬가 소개한 것이고 나는 일어가 서툴기 때문에 삼십분 원고를 써서 가쓰꼬가 일어로 써주면 나는 읽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가의 험구는 더 심해졌다. “너는 좀 주체의식을 가지고 살아 봐라. 이젠 왜놈 밑에서 하이, 하이 해가면서 주구 노릇까지 하니?” “왜 그래. 우리나라 가요를 잘 편집해서 들려주고, 전설 들을 잘 엮어 소개함으로 소박하고 티 없는 한국의 전통적 삶을 소개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야. 적어도 나는 훌륭한 민간 외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런 활동이 EWC의 정신에도 맞는 것 아니야?” “정말 그렇게 고상한 목적을 위해 나가는 거야? 가쓰꼬 만날 생각이 아니고?” “둘 다 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일본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 과거의 악감정에 사로잡혀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른 채 가장 가까운 나라와 미래의 협력관계를 망쳐버릴 수는 없잖아? 모르긴 해도 몇 년 지나면 서로 돕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걸.” “아무튼 순진하긴. 지금도 고년에게 꼬박꼬박 월부금 내고 있니? 고게 마지막 할부금 다 받으면 너를 차버릴 거야. 아무튼 너는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딴은 가쓰꼬가 나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려면 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수월스레 차를 팔았다. 그러면서 지금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 어디고 가고 싶은 곳을 갔다. 휘발유 값을 나에게 부담하게 하는 여우같은 것이라고 악담을 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는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많았다. 운전을 가르쳤고, 싼 차를 사개 했고, 또 방송국을 소개하여 약간의 용돈도 벌게 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나를 더없이 아껴 주었다. 나는 몇 번이나 망설였던 말을 김가에게 했다. 아무리 악담을 해도 나를 잘 이해해 줄 사람은 김가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나 좀 도와주라.” “뭔데?” 김가가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너도 내 사정 알잖아. 내가 무슨 돈이 있어 월부금 내고 이 차 몰고 다니겠어. 이번까지는 잘 해왔는데 1,2월 두 달분은 해낼 수가 없다. 네가 120불만 빌려주지 않겠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몇 번 말했니. 떼먹어. 왜 고것이 달라고 졸라?” “그런 일은 없어. 하지만 국제적 체면이 있는데 약속을 어길 수 있니? 내년에 저축하는 대로 꼭 갚을 게.” “고게 일본 놈들의 상술이야. 화장품, 가전제품, 양산, 인형 등 얼마나 깜찍하게 만들어서 유혹하니? 아무리 불매운동을 해도 뒤에 가서는 그 달큼한 유혹을 못 이기고 사고 만단 말이야. 일제 맛을 보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어. 마치 네가 가쓰꼬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렇다 하자. 그래도 돈은 비려 줄 거지?”
십이월 그믐이 되었다. 모두들 밖으로 나가는데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 때 잔화 벨리 울렸다. 가쓰꼬의 전화였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연말인데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그녀의 전화를 기대하고 일찍부터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샤워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데 룸메이트 모어하우스가 들어왔다. “너 이 파이어 크래커(폭죽) 좀 줄까?” 하고 폭죽 한 상자를 던졌다. “어디다 쓰는데?” “여기서는 말이야 오늘 밤 이걸 터뜨리는 거야. 중국에서 온 습관인데 그렇게 해야 잡귀가 물러나고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는대.” “잘 됐군. 내 마음 속에도 잡귀들이 우글거리거든.” “무슨 잡귀? 너 오늘 밤 가쓰꼬와 나갈 생각 아니었어?” 나는 잡귀 이야기를 한 것이 쑥스러워졌다. 미국 애도 내가 가쓰꼬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김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석의 노크는 급하고 거찰어서 곧 알 수가 있었다. 김가는 문을 열고 들어와 코를 벌름거리며 무슨 향수 냄새냐고 나를 한번 쳐다보고 방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모어하우스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큰 소리를 쳤다. “야 너 오늘 밤 일감 생겼다.” “뭔데?” “우릴 태우고 저녁에 김치 할머니 집에 가자.” 김치 할머니는 릴리하 한안교회를 지켜온 부잣집 마님인데 늘 주일마다 학생들이 오면 김치를 한 병씩 안겨서 돌려보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 오늘 약속 있는데” “무슨 약속? 다 취소해 오늘 그 할머니 집에서 한국 학생들 다 초대 했다.” “그래도 먼저 약속한 곳이 있는걸.” “누구야. 전화로 취소해 줄께.” “이 자식은 안하무인이야.” “그럼 망년회로 한국 학생끼리 모여 김치 먹고, 윷놀이하고 노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 있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봐.” “너 많이 변한 것 같아. 한국 학생이 모이는 데는 늘 빠지니 말이야. 알겠어. 또 가쓰꼬하구 나가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지 못하면 늘 죄의식과 소외감이 따랐다. “늘 꿩 새끼처럼 그렇게 도망쳐 다니지 말고 단번에 결말을 내고 그 소굴에서 빠져 나와라. 네가 일본 계집을 정복하고 돌아오면 그래도 명분이 있잖아? 우리가 박수 쳐줄 게.” 그는 걸어 나갔다. 나는 좀 울적한 기분으로 집을 나왔다. 가쓰꼬를 만나자 ‘박 하우스’에서 저녁은 한국음식으로 하였다. 그녀는 일본 학생들이 망년회로 모이는데 자기는 연말을 나와 함께 보내고 싶어 나왔다고 명랑하게 종알거렸다. “어디든 싫건 쏘다녀요.” 나도 동감이었다. 처음엔 볼링을 하러 갔다. 한 두 시간 했는데 그래도 아홉시가 미처 안 되었다. 스트립 쇼하는 데를 가자고 했다. 그녀도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밴드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온갖 상징적인 몸짓으로 옷을 벗어가며 눕고, 앉고 몸을 비비꼬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입술이 타면 캔 맥주를 마셨다. 살결이 황동색인 폴리네시아의 젊은 사내가 등, 배, 팔, 다리를 손뼉으로 재빠르게 두들겨 가는 모기 잡이 춤과 칼춤을 추었다. 꽉 찬 담배 연기 속에서 머리가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심호흡을 했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여기저기서 콩 튀듯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차고에서 길까지 차를 몰고 나오자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폭죽 상자를 주었다. “어머 있었군요. 몇 개 던져요?” 나는 준비해온 라이터를 켜서 심지에 붙이고 그녀는 그것이 타들어가기 전에 창문 밖으로 던졌다. 이렇게 몇 번을 한 뒤 나는 열개가 줄렁줄렁 매달린 폭죽을 그녀에게 건넜다. 그것을 던진 뒤 그녀는 귀를 막고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콩 튀듯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지나가던 한 쌍이 우리를 보고 웃었다. “하올리 마까히끼오.” 하고 하와이 말로 새해 인사를 했다. 우리는 다시 명랑해 져서 일리카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로 갔다. 유리로 된 승강기로 23층을 오를 때 와이키키 해변 가의 야자수 넘어 감청색 바다에서 춤추는 색 전등의 반사가 환상적이었다. 가쓰꼬는 다시는 이런 황홀한 밤은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라운지에서도 계속 추자고 말했다. “피곤하지 않아요?” “오늘은 피곤해지고 싶어요. 가만있으면 오히려 불안해요.” 나는 가쓰꼬도 나처럼 자기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이야기 했다. “일본 애들이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아세요? 색마라고 생각해요. 아주 기술이 좋을 거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헤어나지 못한대요. 그들은 우리가 결백하고 순결하다고 말해도 믿어주질 않아요. 우리는 미워할 이유가 없고 서로 친구로 의지하고 지낼 수 있다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아요. 처음에 저는 그들에게 우리의 순수함을 설득시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기권했어요,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당신은 색마요 나는 암내 난 당나귀에요.” 그녀는 스텝을 밟을 때 술 취한 사람처럼 내 목을 안고 온 체중을 나에게 실어 왔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저를 아내로 맞으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그녀는 춤을 추다 말고 제 자리에 서서 몸을 떨었다. 그래 같이 살자. 나도 너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순간적인 감정인 것을 곧 알고 당황했다. 나에게 일본 여인을 데리고 돌아갈 용기가 정말 있는가? 그동안 나는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일이 없었다. 매일 붙어 다니면서 또 그녀를 원하면서 왜 결혼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은 김가가 말했던 것처럼 한순간의 쾌락이 아니었을까?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이 귀엽고 나약한 여인을 어떻게 정복해? 사랑은 정복을 당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는데 정말 나는 그녀가 나를 정복하고 그래서 그녀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나는 한 발 뒤로 그녀를 끌었다가 다시 밀며 춤을 계속했다. “찬바람을 쏘이러 밖으로 나갈까요?” “어머 제가 열이 오른 줄 아세요?” “아니요 제가 상기되어 어떤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콧노래를 불렀다. “무슨 곡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당신의 눈에 연기(smoke in your eye)’라는 노래 말이에요.” “무슨 뜻이지요?” “앞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이지요.” 하며 가쓰꼬는 킥킥 웃었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정말 앞이 안 보였다.
밖으로 나오자 우리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옛 화산으로 이루러진 다이아몬드헤드로 갔다. 이곳은 기관총과 대포를 쏘는 곳 같았다. 곳곳의 후미진 곳에는 젊은 남녀가 차를 처박아 놓고 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크게 터지는 폭죽은 사람을 흥분하게 했다. 우리도 차를 길가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불꽃 구경을 했다. 하늘 높이 불꽃이 올라가서는 별들이 폭포를 이루며 쏟아지는 듯이 흘러내리는 불꽃놀이는 화산의 분화구에서 용암이 흘러내리는 그런 광경 같았다. 그런 장면이 누적될수록 감정은 어떤 고지를 향해 격앙되어 갔다. “잠수함 경기(submarine race)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아이 많이 봤잖아요. 오면서” “어디서.” “후미진 차 속에서 서로 뒹굴고 있는 거.” 우리는 한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덥석 껴안았다. 그녀의 코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당황했으나 이내 나는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잠수함 경기처럼 엎치락뒤치락 오래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한참 후 몽유병자처럼 허우적거리던 우리는 제 정신이 돌아오자 가쓰꼬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의자에 앉아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떻게 옮겼는지 우리는 차 뒷자리에 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얼마동안 누워 있었다. 갑자기 폭죽 소리가 없어지고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웬일이지. 갑자기.” 그녀는 야광 시계를 봤다. “아마 열두시를 기다리나 봐요. 한 거번에 폭죽을 쏘아 올리려고.” 정말이었다. 열두시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듯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일 년 동안 참아온 감정이 다음 한해까지 기다랄 수 없다고 폭발해 버리는 요란한 소리 같았다. 그러면서 불꽃들은 서서히 살아져 갔다. 나는 여운을 즐기듯 그녀의 목을 끌어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이제 더 숨기고 참을 일이 없었다. 화산은 터졌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엔 제가 운전할 게요. 오랜만에 운전해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앞자리 운전석으로 옮겼다. 나는 그녀 옆 자리로 옮겨 앉으며 한 순간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이 난무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걸. 나는 무엇을 자제해 왔는가? 왜 나는 김가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나는 그녀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정복 당해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 사실 나는 그렇게 되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하세요. 왜 절 한국에 데려갈 것이 걱정되세요?” “아니.” 나는 급히 부정했다. “그럼 데려 가시겠어요?” 나는 허점을 찔린 것처럼 당황했다. “전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요. 무슨 부담감 같은 걸 느낄 필요는 없어요. 전 어떤 행동에 꼬리를 붙여 놓는 걸 싫어하거든요. 후회는 없어요. 나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시내를 향해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흥분도 가시기 전인데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가? 우리의 관계를 다 정리하고 난 사람 같았다. “나, 정말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뭔데요.”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실 난 처음부터 가쓰꼬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복스럽고 예쁘고 명랑해서 욕심을 냈던 거지.” “그런데요.” 그녀는 별로 화를 낸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정복할 기회를 노려왔는데 오늘 갑자기 그런 기회가 온 거야. 너무 예상외라 당황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 왜 웃지?” “나는 당신의 호기가 마음에 들어요. 당신은 길들여진 양 같아요. 결코 이리가 될 수 없다구요. 그래서 내가 안심하고 기대는 거 아니에요?” “내가 이리가 될 수 없다구? 아니야 난 진즉부터 목적만 달성하면 당신을 차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되었어요?” “이제 됐잖아요. 내일부터는 당신과 끝장이요.” “그래 보세요. 내가 믿나.” “그뿐 아니라 내일부터 난 한국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쓰꼬를 정복 했소 하고 광고를 할 셈이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니 차가 급진하기 시작했다. “왜 이래. 미쳤어?” “그래요. 미쳤어요. 나는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나를 그래도 사랑하는 줄 알았지요. 사랑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 아니에요? 결혼 할 수 없다는 것, 이해해요. 하지만 제 감정을 걸레로 만들어놓고 이렇게 내팽개칠 수 있어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차하게 말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그녀는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 속도를 줄이지 않고 여자 기숙사 앞까지 오자 급정거를 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상당히 긴 시간의 침묵이었다. “미안해요. 내일 아침 다시 전화할 게요.” 나는 애원하다시피 말했으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종종걸음으로 가 버렸다. 남자 기숙사는 그믐이 되어선지 여기저기 방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김가가 파티에서 돌아왔는지 내 침대 위에 앉아 내 룸메이트 모어하우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나를 돌아보며 한국말로 큰 소리를 쳤다. “정복했어?” “뭘?” 나는 정복이라는 말이 역겨웠다. “일본 고년. 정복했느냐 말이야.” “정복하지 않고 당했다. 어쩔래?”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 누우며 내뱉었다. “뭐? 병신. 당했어? 잘한다. 잘해.” 그러다가 갑자기 말했다. “야 오히려 잘 됐다. 네깐 놈에게 어떻게 적극적 행동을 바라겠냐. 결국 당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든 일단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니야.” 그는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진즉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이제 거기서 손 씻고 나와라. 너는 한국 학생이야. 그 쪽발이의 품에서 빠져나와야 해. 그렇게 유혹을 못 이기더니 잘 되었다.” “난 유혹 같은 것은 아예 받아본 적이 없어. 일본 사람과 섞여 지낸다고 과거의 치욕을 잊은 적도 없고.” “유혹은 굶주린 사지처럼 무서운 거야. 유혹이라는 사자는 철조망 밖에서 쳐다봐야지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사자의 먹이가 돼. 그래서 너는 먹힌 거야.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것과 손을 끊고 남은 할부금을 떼먹는 일이야. 왜 돈을 주냐?” 나는 그녀와의 황홀한 순간 뒤에 바로 냉랭하게 돌변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막막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김가는 내가 들어오기 전 모어하우스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1905년 ‘을사협약’을 조인하는데 일본 헌병이 이중 삼중으로 조정을 포위하고 조선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헌병 사령관 입석 하에 주간 각의를 계속하되 밤 열두시 종이 울려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특파전권대사 이등박문은 그 찬부를 각 대신을 별실에 구금하고 개별적으로 심문하니 각원 여덟 명 중 이완용 등 다섯 명이 강압과 번쩍이는 총검 하에서 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정신 못 차린 매국노들 때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두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게 되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으나 약속한 대로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순하고 상냥하던 가쓰꼬가 그렇게 쌀쌀하게 변해버린 모습이 눈에 선했고 다시는 나와 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좋았던 관계를 마지막에 망쳐버린 것 같아 께름칙하였다. 어떻게든지 이 관계는 회복하고 끝나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그녀도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일본 방송국 때문에 전화를 했으나 계속 자리에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래서 한국 가요와 동요들만 몇 차례 내보내다가 사표를 냈다. 김가는 내가 가쓰꼬를 만나지 않을 것을 알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는 모양이다. 더 진행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여기서 막아 주신 거야. 이제 옛 생활은 다 정리하고 회개하고 기도할 일만 남았다.” “무엇을 회개하지?” “자기 죄도 모른 사람은 구원 받은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 목사님이 말 했잖아? 너는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음행을 한 자야.” “언제는 정복하라고 교사해 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나는 괴로웠다. 성경에 의하면 내가 빗나간 생활을 했으니 탕자처럼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가쓰꼬와의 생활을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힌 삶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회개하면 내 과거는 다 씻어지는 것일까? 내 죄가 있다면 하나님은 다 잊어버리시고, 나도 잊고, 가쓰꼬도 나와의 관계를 깨끗이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가쓰꼬는 고의로 나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이용하고 차버렸다는 말에 크게 상처를 받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야 한다. 그 말도 해명하고 마지막 두 달분 할부금도 주어야 한다. 이렇게 헤어지면 서로 너무 큰 상처를 안고 헤어지게 된다. 나는 일월 한 달 내내 그녀의 메일박스 근처를 서성거렸다. 김가는 내가 그녀를 만나면 다시 불이 붙고 중독환자처럼 옛 생활로 돌아선다고 말했다. 할부금 핑계로도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일월 말 주말에 나는 그녀를 제퍼슨 홀에서 만났다. 나는 반가와 그녀에게 달려갔다. “가쓰꼬” 그녀도 놀란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옛날의 신선하고 명랑한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눈을 내려 깔았다. “다 끝났잖아요? 저 다음 달에 일본으로 돌아가요.” “옛날처럼 좀 웃어주면 안 돼?” 그러면서 호주머니에서 꾸겨진 봉투를 내밀었다. “뭐예요?” “마지막 차 값. 너무 오래 넣고 다녀서 이렇게 꾸겨졌어.”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다 잊으세요. 저도 잊을 게요.” 그러면서 입술에 두 손가락을 댔다가 네 입술 위에 대 주었다. 그리고 급하게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내 입술을 만졌다. 손가락의 감촉이 아니고 그녀의 보드라운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것이 잊지 못할 일제 맛이라는 것일까? (1970년 1월 월간문학 15호)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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