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고 때 ‘하이와이’ 지도교사 전성균
집에 놀러갔다 ‘누이’ 전성원과 친해져
1959년 이대-서울대 입학해 ‘유학 꿈’
장인 전호열 ‘한국의 슈바이처’ 존경
경북중·고 청소년적십자 단장 맡아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끌려”
간부수련회 때 웅변대회 우승해 ‘두각’
‘청소년’ 부장 서영훈 선생 ‘총애’ 받아
1956년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강습회
한국대표단 ‘남녀 10명’ 뽑혀 일본으로
어머니 상경해 여의도공항까지 배웅
집에 놀러갔다 ‘누이’ 전성원과 친해져
1959년 이대-서울대 입학해 ‘유학 꿈’
장인 전호열 ‘한국의 슈바이처’ 존경
경북중·고 청소년적십자 단장 맡아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끌려”
간부수련회 때 웅변대회 우승해 ‘두각’
‘청소년’ 부장 서영훈 선생 ‘총애’ 받아
1956년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강습회
한국대표단 ‘남녀 10명’ 뽑혀 일본으로
어머니 상경해 여의도공항까지 배웅
길을 찾아서 9회-고교시절 특별한 인연들
박한식은 어릴적 전쟁을 겪으며 생겨난 ‘평화병’ 영향으로 기독교 학생운동과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끌려 대구 경북중·고 시절 ‘청소년적십자’ 단장으로 활약했다. 박한식(뒷줄 맨왼쪽)은 1956년 여름 도쿄에 있던 미국적십자사 극동지구본부가 주최한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쉽 강습회에 한국대표단으로 뽑혀 참가했다.(왼쪽 사진)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나의 고교 시절을 회고할 때 두 분의 소중한 인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나는 내 ‘오디세이’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준 아내를 만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까지나 내 삶의 등불이 되어주신 서영훈 선생님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이다. 나는 서영훈 선생님을 알게 된 덕분에 재일동포가 처한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내 평생 정신적 스승으로 모신 함석헌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1956년 경북고에 입학해 와이엠시에이(YMCA)의 고등부 동아리 ‘하이와이’(HiY)에 적극 참여하면서 전성균을 알게 되었다. 경북대 의대생이던 전성균은 우리 하이와이의 지도교사로 활동했다. 나는 대여섯살 위인 전성균과 친해져 그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그런데 그 집에 한 여학생이 이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성원, 바로 전성균의 누이동생이었다.
재일동포들 궁금 ‘조선대학교’ 문의
“일본정부 해방후 조선인학교 ‘방해’
1955년 김일성 전폭 지원에 ‘친북화’
이승만은 ‘친북’ 이유 적대시·외면”
올초 뉴욕 양대 한인단체 ‘강연’ 초청
‘합동초청이면 승락’ 제안했으나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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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친북’ 이유 적대시·외면”
올초 뉴욕 양대 한인단체 ‘강연’ 초청
‘합동초청이면 승락’ 제안했으나 무산
박한식은 경북고 하이와이 시절 ‘지도교사’였던 전성균(앞줄 오른쪽 세째)과 친밀해진 덕분에 그의 누이동생 전성원을 만나 훗날 결혼을 하게 됐다. 전성균은 의사인 부친(전호열)에 잇고자 경북대 의대를 다니던 1958년 ‘생명경외클럽’ 창립을 주도해 지금껏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2008년 생명경외클럽 50돌 기념 정기총회.
전성균의 아버님이자 나의 장인이 되시는 전호열은 대구에서 광제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다. 부자는 모두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롤모델로 존경했다. 장인께서는 이른바 ‘독일군 오토바이’, 즉 오토바이에 부착된 사이드카에 의약품을 가득 싣고서 무의촌을 누비고 다녔다.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전후 온갖 질병이 창궐하는 ‘집단병동’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게는 그런 장인의 모습이 ‘한국의 슈바이처’로 보였다. 이미 ‘평화병’을 앓고 있었던 까닭에 더더욱 존경스러웠다. 장인 역시 나를 많이 아껴주셨고, 인생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훗날 미국 미네소타대학 의대 교수가 된 전성균 역시 장인과 같은 정신을 간직하고서 같은 길을 걸었다. 전성균은 1958년 슈바이처의 정신을 실천하는 ‘생명경외클럽’ 창립을 주도해 지금껏 평생토록 활동했고, 그런 공로 등으로 2017년 ‘서재필 의학상’을 받기도 했다.
외동아들로 성장한 장인께서는 무려 13남매의 자녀를 두었다. 종합병원 개원을 꿈꾸며 자녀들 대부분에게 의학 공부를 권장했다. 전성원이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 1959년 이화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런 영향 때문이었다. 나도 같은 해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전성원보다 한살 많았지만, 9살 때 남산초등학교에 재입학하는 바람에 전성원과 같은 학번이 되었다.
전성원은 나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전거도 아주 잘 탔다. 나 역시 대구 수창동 집에서 남산동 초등학교까지 먼 거리를 자전거 타고 통학하면서 나름 축적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전성원에게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대학 시절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자주 했다. 전성원은 신촌에서, 나는 동숭동에서 출발해서 종로에서 만났다. 저 멀리서 해맑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전성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곧장 태릉으로 향했다. 책을 좋아했던 전성원과 책보다는 생각을 좋아했던 나는 철학·종교·예술·인생·사랑 등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 얘기 속에는 미국 유학의 꿈도 들어 있었다. 우리는 1964년 약혼반지에 ‘1+1=1’이라는 초수학적 수식을 새겼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인생의 오디세이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박한식(오른쪽)은 경북고 시절부터 사귄 전성원(왼쪽)과 1959년 서울대와 이대에 각각 입학한 뒤 함께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 사진은 유학을 앞둔 1964년 대구에서 올린 약혼식 모습.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는 경북중과 경북고 시절 청소년적십자(JRC·현 RCY)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전쟁터에서 차별 없이 부상자를 구호한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 정신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그때 한국적십자 대표 이범석이었고, 청소년적십자 부장은 서영훈이었다. 청소년적십자는 여름이면 한강변에서 하령회(하기 간부수련회)를 열었다. 하령회의 ‘단골 프로그램’ 중 하나는 웅변대회였다. 어느 해 나는 ‘일심폭탄’ 제목의 웅변으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박한식은 경북중고 청소년적십자 단장으로 참가한 하기 간부수련회의 웅변대회에서도 웅변 실력 덕분에 서영훈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 사진은 1955년 8월 서울 잠실 한강변에서 열린 ‘제3회 간부수련회’ 모습이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그 우승 덕분에 서영훈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서 선생님은 종교·신앙·철학 등의 분야에서 조예가 깊었다. 나는 훗날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지만, 종교학·철학 등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전공을 종교철학으로 바꾸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질문을 드리는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서 선생님도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나는 서 선생님을 평생 따르면서 좋은 말벗이 되고자 했다.
박한식은 경북고 시절 청소년적십자 부장이던 서영훈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953년 한국적십자 초기부터 활동한 서영훈 선생은 2000~03년 총재를 지냈다. 1964년 서영훈 선생이 청소년적십자 간부 하계강습회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어느 날 서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청소년적십자회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어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중·고교 시절 영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나는 시험에 무난히 통과해서 선발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학생 5명과 여학생 5명을 한국 대표단으로 뽑았는데, 서울 출신 8명에 인천과 대구에서 1명씩이었다.
우리는 서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일본으로 향했다. 1956년 경북고 1학년 때였다. 내 생애 최초로 국제회의에 참가할 생각에 설레고 기뻤다. 난생처음 비행기도 타게 되었다. 나는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빡빡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서 제법 폼도 잡아봤다. 어머님(이동수)께서는 대구에서 그 먼 거리를 와서 배웅해 주셨다.
1956년 박한식(오른쪽)이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십 강습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할 때 어머니(이동수·왼쪽)는 대구에서 서울 여의도공항까지 같이 와 고교생 아들의 첫 외국여행을 배웅해줬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56년 도쿄 서쪽 다치가와 미공군기지에서 열린 국제청소년적십자 리더십 강습회 때 박한식(왼쪽)은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미국 대표(오른쪽)와 일대일 토론을 벌였다. 사진 청소년적십자 제공
그러나 일본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그저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만주 시절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만주라는 이국땅에서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 등이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그곳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 역시 대부분 가슴 아린 기억으로 채워졌다. 이내 질문이 떠올랐다. 일본에는 우리 동포가 얼마나 살고 있을까?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도쿄에서 국제청소년적십자회의를 마친 뒤 재일 조선대학교에 연락을 했다. 재일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의 나이 지긋한 어른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그분은 매우 친절했다. 맛있는 밥도 사주고, 기념으로 도장도 파주었다. 또한 일본 조선대학교와 재일동포의 현황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재일동포 삶의 여건을 알면 알수록 중국 조선족의 현실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은 조선족의 자율성을 상당 수준 이상 허용한다. 조선족의 자녀에게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중국의 ‘중점대학’으로 분류되는 명문대에 진학해서 중국 사회의 엘리트로 진출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연변대학에 진학해서 엘리트 조선족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재일동포는 조선족만큼의 자율성을 일본 사회에서 누리지 못했다. 일본은 재일동포를 사실상 하층민으로 취급했다.
박한식은 1956년 일본 방문길에 도쿄 조선대학교를 통해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 당국의 부당한 대우를 알게 됐다. 사진은 해방 직후부터 세운 국어강습소를 비롯한 조선인 학교에 대해 1948년 일본 당국이 폐쇄령을 내리자 재일동포들이 반발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다. 사진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공
재일동포는 해방이 되자 자녀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역사 등을 가르칠 필요성을 느꼈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조선인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의 비협조 내지 방해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김일성이 1955년부터 재일동포의 교육 프로그램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조선인학교 건물을 지어주고, 일체의 학용품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그런 까닭에 재일동포는 지금도 김일성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조선인학교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북한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그런 연유다. 또한 재일동포는 일본의 ‘파친코’와 불고기 식당을 석권해서 벌어들인 현금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송금한다. 물론 북한 역시 재일동포의 ‘결초보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김일성의 지원을 받는 재일동포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일본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동포를 전혀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김일성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적대시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피해자의 유가족까지 ‘빨갱이’로 낙인찍어 철저하게 배척했던 ‘희생자 비난하기’(빅팀 블레이밍)를 재일동포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요컨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던 재일동포는 또다시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남북한 ‘정통성 전쟁’, 즉 남한과 북한 각자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강변하는 체제경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박한식이 1956년 여름 문의를 했던 도쿄 조선대학교는 55년부터 조총련을 통해 이뤄진 북한의 재일동포 교육 지원에 따라 2년제로 개교한 직후였다. 사진은 56년 4월부터 59년 6월까지 도쿄도 키타구에 있었던 조선대학교의 임시 교사. 사진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제공
현재 일본에는 남북한 정통성 전쟁에 저항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조선적’으로 분류되는 약 3만명의 동포가 그들이다. ‘조선적’이란 1947년 주일 미군정이 재일동포에게 임시로 부여한 국적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조국의 분단을 인정하게 된다는 이유로 조선적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조선적이야말로 조국의 통일을 가장 극적으로 열망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조국의 통일을 이루어 조선적의 고단한 영혼을 껴안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동포사회로 시선을 돌리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올해 초 뉴욕에 본부를 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재미동연)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민주평통뉴욕)에서 거의 동시에 내게 강연 요청을 해왔다. 주지하듯 재미동연은 북한과 가깝게 지내는 단체이고, 민주평통뉴욕은 한국에서 설립한 단체다. 나는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연달아 개최되는 화해 분위기가 민간 차원에서도 조성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또한 재미동연과 민주평통뉴욕은 모두 뉴욕에 본부를 두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두 단체가 서로 협의해서 강연을 공동으로 주최하면 내가 나가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두 단체 대표자는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오질 않았다. 결국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남북한 정통성 전쟁과 한국 남남갈등의 양상이 2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의 동포사회에서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평통 뉴욕협의회(회장 양호)의 지난 2월 ‘2019 평화통일의 밤’
재미동포전국연합회(회장 윤길상·왼쪽) 2019년 2월 정기회.
민주평통은 1981년 전두환 정부가 북한 조선노동당의 대항 조직으로 창설했다. 그러나 민주평통과 조선노동당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조선노동당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조직이고, 민주평통은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평통을 창설한 것은 조선노동당의 성격을 너무도 모른 채 벌인 일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민주평통은 국제사회에서 남북한 정통성 전쟁을 주도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정착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정통성 전쟁이란 개념 그 자체를 이론적으로 해체하고, 그 개념이 강제하는 남북한 체제경쟁의 관행을 혁파해야만 한다.
나는 서영훈 선생님을 통해서 함석헌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함 선생님의 강연에 참석하고, 또 함 선생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천안 농장도 방문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함석헌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평화에 미치다’ 다음 회에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