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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유곽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9. 4. 17:26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유곽

등록 :2019-09-03 17:49수정 :2019-09-04 09:31

 

전우용
역사학자


19042월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은 한국 전역을 점령하고 실질적인 계엄 통치를 시작했다. 그 덕에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 민간인들도 순식간에 특권 집단이 되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일본인이 한국행 배표를 끊었다.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수는 19033865명이었으나, 7년 뒤인 1910년에는 군인을 제외하고도 47148명에 달했다. 전세계 이민의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바와 같이, 이 무렵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 중에도 남성 단독 이주자가 많았다.

대규모 일본군이 주둔한 데 이어 일본 민간인들까지 몰려 들어오자, 일찌감치 서울에 자리 잡았던 일본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음식점, 숙박업소, 이발소, 목욕탕 등이 연일 손님으로 가득 찼다. 당시 서울의 일본인 상가는 한가지만 빼고 일본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 한가지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만든 이래 일본 대도시 전역으로 확산했고, 19세기 말께에는 구미인들이 일본의 상징으로까지 여겼던 유곽(遊廓)이었다.

1904년 봄, 재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은 남산 아래 쌍림동 땅을 한성부로부터 빼앗다시피 하여 유곽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이를 민단 최초의 공익 사업이라고 자찬했다. 유곽이 완공된 뒤에는 동네 이름을 새마을이라는 뜻의 신마치(신정·新町)로 바꾸었다. 이로써 한반도 최초의 공창(公娼) 지대가 생겼다. 그들은 이곳에 일본인 유녀뿐 아니라 공갈과 인신매매 등의 수법으로 한국인 여성들까지 끌어들였다.

그들이 유곽을 건설한 곳은 대한제국의 국립 추모 시설이던 장충단 바로 옆이었다. 지금의 국립현충원이 6·25전쟁을 회상케 하는 시설인 것처럼, 당시 장충단도 일본 침략의 역사를 회상케 하는 시설이었다. 일본 거류민단은 일부러 장충단 옆에 유곽을 설치함으로써 충신열사의 공간을 퇴폐 향락의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굳이 일본군 성노예 제도의 기원을 따지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에 처음 만든 유곽이 최초이며, 한반도에서는 신마치 유곽이 처음이다. 일본이 패망한 직후 한반도 공창제의 역사도 끝이 났으나, 공창제로 생긴 성문화까지 끝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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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8294.html?_fr=mt0#csidx952dbd6342a6395a836b3593fe8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