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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원본 없는 요약본 / 우석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 29. 03:01

[세상읽기] 원본 없는 요약본 / 우석진

등록 :2020-01-28 18:12수정 :2020-01-29 02:37



 

우석진 ㅣ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관저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대통령이 보고 서류를 보느라 정신없다고 했을 때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공무원이 대통령 보고용으로 작성한 서류는 개조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개조식 보고서는 혼자 읽으라고 작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개조식을 “글을 쓸 때에, 앞에 번호를 붙여 가며 중요한 요점이나 단어를 짧게 나열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번호나 글머리를 만들며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단어를 짧게 나열할 때 발생하게 된다.

필자는 초등학교부터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적어도 학교에서는 개조식 문장을 쓰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국책연구원에 취직을 했더니 발주처에서 보고서를 개조식으로 작성하라고 요청을 했다. 선배들이 개조식 쓰는 법에 관해서 설명해주기도 했다. 아직까지 개조식은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지 공식 교육과정에 도입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개조식이 언제부터 공문서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조약과 공문서에서 개조식과 비슷한 양식의 문장들은 자주 발견된다. 1905년 을사늑약에서 개조식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고, 1919년 4월1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도 “함”으로 끝나는 문장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개조식을 쓰는 양식은 정부부처, 공공기관마다 다르다. 개조식에 사용되는 도형과 폰트를 보면 어느 부처에서 작성했는지 얼추 알 수 있다. 대개의 정부부처는 전통적 방식의 개조식을 사용하고 있다. 국방부 보도자료의 개조식은 도형은 사용하되 설명형 문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법원행정처 방식은 그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지난 사법농단 사건을 통해 공개된 개조식 보고서를 보니, 도형들이 현란하고 다양한 색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보통 개조식은 한줄 아니면 두줄 정도 길이의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법원행정처의 문장은 다른 부처들의 문장보다도 만연체에 가까운 개조식이었다. 아마 만연체의 판결문을 작성하던 판사들이 개조식을 작성해서 그런 것 같다.

개조식의 장점은 ‘축약’에 있다. 불필요한 명사들과 접속사들이 생략되면서 한두쪽에도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개조식의 다른 장점은 글이 ‘위계’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네모와 작은 동그라미로 구성된 개조식 문서의 경우 네모로 표시된 부분만 읽어도 보고서의 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만약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작은 동그라미를 읽으면 된다. 시간에 쫓기는 의사결정자는 네모만 읽어도 충분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개조식의 취약점 또한 극도의 축약 때문에 발생한다. 문장을 줄이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가 없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주어가 자주 생략된다는 점이다. 주어가 없기 때문에 의사 판단과 행위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파악하기 힘들다. 기획재정부 보도자료를 보면 “○○년 경제성장률은 △△%로 전망”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문제점은 주어가 없기 때문에 누가 경제성장률을 전망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전망하였다는 것인지, 외부 경제연구소들이 그렇게 전망한 것을 인용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문장의 주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보고서 작성자의 책무성이 낮아지게 된다.

개조식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에는 요약에 요약을 거쳐 축약본만 남는다는 점이다. 원래 요약은 보고서 원본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원본에는 자세한 내용이 있고 요약에는 요점만 담긴다. 원본이 없으면 요약본은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축약의 축약을 거친 요약본이 만들어져 그 자체로 내용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설명을 들을 수 없거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고서를 보았을 때는 보고서의 의미가 불분명해진다. 개조식 보고서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모호함을 낳고 있는 것이다.

개조식 요약 보고서를 선호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위층 공무원의 독서 능력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본다. 다양한 정보를 읽고 종합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보고는 간략하게 할 수 있지만, 개조식 보고서는 서술식으로 개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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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5948.html#csidxdf7f705d57d9a17b8314c79e4b03f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