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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칼럼] 영원성과 사라짐의 어떤 결속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20. 03:53

[정홍수 칼럼] 영원성과 사라짐의 어떤 결속

등록 :2019-10-29 18:03수정 :2019-10-30 13:17



 

정홍수

문학평론가

변화가 나날의 감각이 된 지는 오래지만, 이즈음 특별히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 사회 성원들의 소진되지 않는 강렬한 변화의 의지와 열망이 아닌가 한다. 변화된 매체 환경, 공론장의 새로운 작동 방식과 함께 그 의지와 열망은 이제 거의 상시적인 민주주의의 압력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읽은 한 책은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사회적 변화의 동역학과 관련된 생각들을 이어가게 만든다.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는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운 책인데 억압과 저항, 탄압과 자유, 국가와 인민, 공식 경제와 2차 경제, 전체주의 언어와 반(反)언어,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진실과 거짓 등등 소비에트 현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온 기존의 이원론적 모델이 실제 현실과 변화 과정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책은 변화를 향한 인간의 행위 능력만큼이나 각각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그 변화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올 초에 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영화 <레토>(2018)가 생각난다. 1981년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록음악에서 자유를 구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데 요절한 한국계 록 뮤지션 빅토르 최의 무명 시절이 담겼다는 점도 나를 극장으로 이끈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당시 록음악 공연을 비롯한 서구 최신 음악의 향유가 당의 통제 안에서일망정 젊음의 분출구로 꽤 열려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쨌든 억압적 전체주의 시스템 아래서 서구 문화에 대한 상상적 동경과 함께 자라난 일탈적 반문화의 형태로 나는 그 젊은이들의 뜨거운 몸짓을 이해했지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탈이(때로는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허위와 억압으로부터 이후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소비에트 체제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대개는 일반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유르착은 십대 때부터 록음악에 빠졌던 한 젊은이의 예를 들면서 그가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성실하게 활동하는 한편 그 콤소몰의 대학생 행사에서 아마추어 록밴드들의 공연 기획에도 열성적이었다고 알려준다. “분명히 안드레이에게 레닌과 레드 제플린 양쪽에 열광하는 일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후기 사회주의’(스탈린 사후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시기에 시스템의 권위적 담론의 불변적 형식들이 초규범적으로 경직된 채 재생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권위적 담론의 진술적 의미(진위 여부)는 점점 더 축소되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조직 활동이나 집회에 참석해 의례적인 연설을 듣는 일을 공식적 의미와 거리를 둔 채 ‘수행’하면서 권위적 담론의 진술적 의미를 비결정적으로, 혹은 부적절하게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저자가 ‘수행적 전환’이라고 부른 이 과정이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열어준 의미 있는 사회적 개인적 공간들을 흥미롭게 만나게 되는데 단지 반문화의 범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록음악의 다양한 향수 방식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적 실존을 뜻하는 외재성으로서의 ‘브녜’의 개념 등등 전체적으로 간단치 않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저자의 입장은 명확하다.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는 “권위적 담론이 제공하는 대본에 따라 살아가는 시스템의 주인공이었지만, 동시에 권위적 대본 형식의 수행적 복제가 제공하는 매개변수들 내부에서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해석을 창조해내는 시스템의 저자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는 변화의 주체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시스템이 재생산될수록 내적 전치(轉置) 혹은 내파(內破)의 가능성이 생겨났다는 소비에트 후기 사회주의의 역설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구성적인 관계인데, 이때의 수행적 참여를 변화의 ‘주체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소비에트라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이긴 해도, 변화가 반드시 적극적인 저항적 주체성과 거기에 맞서는 지배적 힘의 대립이라는 일반적인 모델 안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인 듯하다. 가령 변화를 가능케 하는 중간 지대의 가능성 같은 것. 1962~1990.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빅토르 최의 시간이 <레토>의 마지막 화면에 자막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소비에트연방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게 199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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