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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정홍수 칼럼] 제목으로 돌아와 끝나는 이야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20. 04:05

[정홍수 칼럼] 제목으로 돌아와 끝나는 이야기

등록 :2020-01-21 18:09수정 :2020-01-22 02:38



 

정홍수 ㅣ 문학평론가

해외에서 연일 수상 소식을 전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국내 개봉 전부터 제목과 함께 비밀을 품은 듯한 묘한 구도의 포스터로도 화제가 되었던 것 같다. 이즈음은 해외 개봉 포스터가 종종 소개되곤 하는데 하나같이 흥미롭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물에 잠긴 반지하의 집을 맨 아래에 두고 차곡차곡 탑처럼 집을 쌓아 맨 위에 화려한 저택을 올려놓은 일러스트다. 영화가 겨냥하는 계급 격차의 세계를 간명하게 보여주면서도 금방이라도 허물어지는 게 이상하지 않은 그 구조의 기이함에 대해서도 비판적 응시를 가능하게 한다(영화는 박 사장의 정원에서 일어나는 난장의 파국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삼키고 지속되는 ‘공중정원-바벨탑’의 완강함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엇갈리는 계단을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하강하는 사람들을 나란히 배치해둔 일러스트인데, 이 역시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지 싶다. 물론 두 일러스트 포스터는 메시지 이전에 한눈에 보아도 재미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그려져 있어, <기생충>의 영화적 실질과도 얼마큼 부합한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결정이 그리 쉬웠을 것 같지는 않다(편집자로 일하는 내게 제목은 언제나 탄생과 운명을 예측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의 사물이다). 영화의 성공이 인증해주는 권위를 감안하더라도 제목 ‘기생충’은 슬그머니 일어나는 또 다른 의미의 층위가 있다는 점에서 썩 괜찮은 명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 사장의 집을 숙주로 기생하는 두 가족의 존재는 영화의 표면적 서사에서 ‘기생충’의 의미를 확인시켜주지만, 해외 포스터가 알레고리 방식으로 표현한 ‘공중정원’의 구조가 알려주는 것처럼 숙주와 기생의 관계는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규정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관계들은 더 근원적인 착취와 기생의 이야기를 은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기생’의 의미가 생각만큼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곱씹게 된다.

수사학에서 모호성 혹은 중의성이라고 불리는 이 지점을 가장 잘 활용해온 영역은 문학이며, 그중에서도 시일 테다. 그러면서 시는 제목을 자신의 텍스트에 포함하는 기술에서도 가장 앞선 장르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끝나는 시가 많다. 시에서 제목은 단순한 명찰이 아니라 종종 시의 중요한 육체다. 켄 로치 감독의 최근작 <미안해요 리키>(2019)도 제목까지 포함해야 완성되는 영화다. 원제 ‘Sorry we missed you’(죄송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는 수취인 부재 시 택배 회사에서 남기는 쪽지에 인쇄되어 있는 글이다. 중년의 주인공 리키는 주 엿새 하루 14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택배 노동자다.(겉으로 리키는 택배 회사와 계약한 자영업자처럼 되어 있지만, 그 ‘자영’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배송 업무를 정확히 완수하며 무사고, 무벌점의 ‘기적’을 바라야 한다는 점에서 택배 회사의 가혹한 노동 착취, 이윤 착취를 가리는 허울일 뿐이다.) 아내 애비는 파트타임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데, 일의 힘겨움(어머니를 생각하며 병약한 노인들의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받아낸다는 애비의 말은 영화에 묘사된 대로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안에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에서 종종걸음 치는 시간도 들어 있다. 그녀의 발이 되어준 중고차는 남편의 밴을 구입하는 계약금을 위해 처분해야 했다. 저녁이나 주말 시간도 불시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 때문에 두 아이를 보살피는 데 제대로 쓰지 못한다. 큰아이인 세브는 길거리 그라피티에 빠져 학교는 뒷전인 채 가족들의 우려를 외면하고, 아버지에게 거세게 반항한다. 세브가 보기에 세상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으며,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를 보며 여러번 깊은숨을 내쉬어야 했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난 늘 악몽을 꿔.” 그나마 찾아든 작은 휴식의 잠자리를 앞두고 애비가 오래 견뎌온 말을 토할 때는 쓰라림에 몸을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힘듦에는 바닥이 없는가. 켄 로치의 리얼리즘은 희망의 구조나 윤리를 쉽게 설계하지 않는 가운데(막내딸 라이자를 중심으로 가족 안에 깃드는 작은 행복의 시간, 의지가 반드시 무력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이들 가족이 감내하고 대면해야 하는 좁고 숨 막히는 시간 안으로 끝내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이들 가족을 놓친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영화의 제목은 다시 우리를 심문한다. 그 질문이 너무 크고 버겁기에 나는 우선 한국어 제목에 머문다. “미안해요 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