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ㅣ 작가
콩고 신화에 등장하는 ‘은잠비’는 세계를 창조한 태초신의 이름이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에 깃든 은잠비는 육신이 사멸하면 영혼을 다른 세계로 인도하고, 그곳에서 적당한 새 몸을 만난 영혼은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모든 생명은 은잠비에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티섬으로 납치당한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영생이 더 이상 거룩한 약속만은 아니었다. 죽음으로 끝나야 할 고된 노예 생활을 영원히 연장시킬지도 모를 끔찍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죽은 자들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할 영혼마저 누군가 납치해버리진 않을까? 노예 생활에 지친 이주민들은 죽음보다 제때 죽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육신의 죽음으로 무사히 일단락되지 않는 영생이란 영원한 고통을 뜻할 뿐이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고 노예로 남은 인간을 상상하며 ‘좀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좀비 신화의 사회적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다. 영화는 좀비를 주술이 아닌 전염병 피해자로 묘사하면서 생존자들의 다툼에 시선을 돌렸다. 초자연적인 존재에서 전염병 희생자로 강등된 좀비는 재래식 화기로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이제 진짜 위협은 좀비가 아니라 ‘잠복기 보균자’였다. 좀비는 금방 식별할 수 있지만 보균자는 눈으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염이 의심되는 타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 생존자들의 안전을 지키는 유력한 수단으로 떠올랐다. 영화는 이 무차별적인 폭력이 여성이나 흑인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향해 ‘차별적’으로 가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살아남기 위해 좀비가 아닌 다른 생존자들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주인공의 냉소적인 대사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우리나 그들이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좀비 서사의 갈등 축은 생존자들 사이로 완전히 옮겨왔다. 현대적인 좀비물에서 인간은 더 이상 좀비와 싸우지 않는다. 인간과 싸운다. 생존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감염이 의심되는 타인을 거리낌 없이 위험으로 내몰면서도, 자신과 가족이 감염자로 의심받을 때는 똑같이 행동하는 다른 생존자들을 막아내야 한다. 영화 <부산행> 역시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애인을, 딸을, 아내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결과로 타인과 타인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다. <부산행>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영화 중간에 스쳐 지나간다. “양보할 필요 없어. 이럴 땐 자기 자신이 우선이야.”
선량한 가족주의로부터 이기적인 민족주의나 차별까지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가상의 세계를 다루는 창작자들조차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실수를 쉽게 저지른다. <월드워 제트(Z)>의 좀비 바이러스는 북한에 인접한 군사지역에서 발생한 뒤 예루살렘만이 안전 도시로 남을 때까지 전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좀비의 침투를 막기 위해 생존자들이 필사적으로 쌓아 올린 높은 담벼락은 정확히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을 연상시킨다. 전설적인 좀비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는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를 모두 여성으로 설정했던 탓에 개발 초기부터 여성 프로그래머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대대적으로 수정하기 전의 스토리는 세상 모든 여성이 좀비가 될 때까지 자기 딸만은 안전하게 지켜낸 아버지의 사투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바이러스는 국적도, 성별도, 가족도, 편견도 갖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가상의 세계 속에서 선택을 내릴 때조차.
“나는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영화나 게임이 아니다. 현실에 등장한 구호다. 100% 치사율의 좀비 바이러스가 아니라, 3%도 못 되는 치사율의 바이러스 때문에 겁에 질린 세계의 장면이다.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든 중국인 청년은 너는 바이러스야, 라고 몰아붙이는 편견과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그의 절박한 호소를 위태롭게 만드는 문장은 훨씬 더 교묘하게 쓰이고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