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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 묻는 권혁란 “흔들흔들 살았죠, 대신 자유롭게” / [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23. 04:45

존엄한 죽음 묻는 권혁란 “흔들흔들 살았죠, 대신 자유롭게”

등록 :2020-02-22 10:56수정 :2020-02-23 00:26

 

[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책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작가
간병과 연명치료·존엄사 화두 던져
“좋은 죽음과 노년 가이드 됐으면”

8년간 딸 둘 낳아 키우던 주부에서
여성주의 잡지 <이프> 편집장 역임
“트랜스젠더 배제 숙대 일 속상해”


“저 자신도 위로받고 동병상련을 겪는 이들도 위로받게 하자, 노년과 죽음의 가이드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권혁란 작가는 지난 13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펴낸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한겨레출판)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저 자신도 위로받고 동병상련을 겪는 이들도 위로받게 하자, 노년과 죽음의 가이드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권혁란 작가는 지난 13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펴낸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한겨레출판)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목차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엄마의 죽음에 관한 책이지만 어미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으로 흐르지 않았다. ‘존엄하고 아름다운 이별에 관해 묻는 애도 일기’라는 부제에서는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는 이성의 힘이 느껴졌다. 발인식만 마치고 예정돼 있던 방송 촬영 여행을 떠났다는 대목도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래, 엄마의 부재를 헤어날 수 없는 슬픔으로만 묘사하고, 좋았던 추억만 꺼내는 것은 정직하지도 실재적이지도 않지. 엄마의 죽음이라는 주관적인 경험을 간병과 요양, 존엄한 죽음이라는 사회적 질문으로 내놓은 게 멋지잖아.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생의 마지막 모습을 주변에서 숱하게 보고 들은 터여서 책(<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을 다 읽기도 전에 공감이 먼저 왔다.

엄마의 죽음 앞에 담담해 보이는 작가는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엄마 팬티를 입고 양말을 신고 다닌다. 상실의 슬픔과 그리움을 몸으로 매일 감각하면서도 묵직한 문제를 던진 권혁란(56) 작가를 지난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를 알아갈수록 한두 가지 특성으로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랄함과 환한 웃음 속에는 고독과 우울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의 인생 행로도 남다르다. 딸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로 8년을 살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인 <이프>(if)의 편집장을 맡았다. <이프>를 관둔 뒤에는 여행기획자라는 낯선 길을 걸었으며, 근래 2년간은 가족을 떠나 스리랑카에서 한국어교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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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죽어도 요절 아닌 자연사잖아요”​

―책 나온 뒤 반응은 어때요?

“40~50대 여성들이 책을 많이 사는 것 같아요. 독후감이나 북 리뷰 쓴 사람들을 보니까 50~60대 남성도 꽤 많고요. 위로를 받았다거나 울었다, 내 얘기 같아서 공감이 깊었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어요.”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삼았어요.

“2년 동안 엄마를 보러 요양병원에 다니면서 가족과 부모, 자식, 간병, 죽음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됐죠.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씩 겪는 일이잖아요. 나이든 부모의 노후, 아픈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작별, 좋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어요. 저 자신도 위로받고 동병상련을 겪는 이들도 위로받게 하자, 노년과 죽음의 가이드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의 어머니는 2017년 1월 충북 음성의 큰아들 집에서 쓰러져 심장 혈관 스텐트 시술을 받은 뒤부터 지난해 초 숨질 때까지 마지막 2년간 요양원과 요양병원, 종합병원 중환자실을 오갔다. 요양원에서 한밤중에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은 뒤 마지막 두 달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아흔살의 어머니는 섬망 증상과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 등으로 고통받다가 막판에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산소호흡기와 혈관을 통한 영양제로 겨우 가쁜 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제발 편하게 돌아가시게 호흡기를 빼달라고 가족들이 의료진에게 호소했다가 ‘그러려면 집으로 모셔가라’는 야단만 맞았다고요?

“네. 의사 개인들로서는 산소호흡기를 떼거나 약을 처방하지 않는, 그런 죽음으로 가는 행위를 왜 내가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죠. 그럴 거면 그냥 병원에서 나가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의사가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존엄사나 안락사를 원하면 조력자살이나 조력살인 등 죽음의 행위를 해주는 의사들이 있는 스위스에 가든가, 아니면 자연사할 수 있는 집으로 가라고 하게 되는 거죠.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 내 죽음의 방식과 죽을 시기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죠. 존엄사나 안락사에 대해 우리 사회도 논의를 시작할 때라고 봐요.”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곧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아가서 ‘위급시에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등록증을 받았다. 삶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고픈 마음에서다. 그는 등록증을 넣은 작은 카드 주머니를 늘 목에 걸고 다닌다. 딸들에게는 혹시 내가 쓰러지더라도 병원에 데려가지 말라고 말해뒀다고 했다. “머지않아 제가 죽는다고 해도 요절이 아니라 자연사일 수가 있잖아요.”

―책은 장례문화에 대해서도 생각거리를 던져줬어요. 어머니 장례를 치른 뒤에 맞은 시어머니 상 때는 “음이 소거된 다큐영화”처럼 가족장으로 치렀다면서요?

“엄마 때는 통상적인 장례식이었어요. 친척, 고향 어른들이 다 오시고 제례 과정을 다 했죠. 가족이 워낙 번성해서 새 생명들이 북적북적하니까 분위기가 좀 밝고 따스했어요. 이에 비해 시어머니 장례식은 너무나 간소해서 저도 놀랐어요. 평소 매사에 깔끔했던 시어머니는 절대 사람들을 부르지 마라, 빈소를 차리지 마라, 바로 화장해라, 그런 얘기들을 유언으로 하고, 아들들이 그대로 따랐죠. 직계가족만 모여서 장례를 치렀어요. 너무나 담담하고 고요했던 죽음과 장례의 과정을 보면서 아름다운 작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그렇게 해달라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권혁란 작가는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최근 트랜스젠더 합격자에 대한 숙명여대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의 반대에 대해 “페미니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권혁란 작가는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최근 트랜스젠더 합격자에 대한 숙명여대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의 반대에 대해 “페미니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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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본 페미니스트​

대학(세종대 국문학과·1983년 입학) 때 학생운동에도 나름 열심이었던 권혁란은 졸업 후 복학한 선배와 결혼식을 올렸다. 중등교원 임용시험에서 떨어져 국어교사의 꿈이 좌절된 뒤였다. 당시 남학생 65명에 비해 여학생은 3명만 교사로 뽑히는 것을 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꺾여서였다. 마음속에 분노와 억울함이 남았고, 딸아이 둘을 낳아 기르는 주부로 8년을 살면서 우울이 더 쌓여갔다. 그때 권혁란의 삶을 바꿔놓을 잡지가 등장했다. 1997년 창간된 여성주의 잡지 <이프>다.

―<이프>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됐어요?

“저는 창간 멤버가 아니에요. ‘I am feminist’(나는 페미니스트), ‘infinite feminism’(무한한 페미니즘)의 약자에서 따왔다는 <이프>의 창간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를 읽던 순간의 놀라움이 아직도 생각나요.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이 멋있고 지혜롭고 훌륭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그즈음 공지영의 소설 <착한 여자>에 대한 독후감 공모가 있었는데, 애 보면서 써서 보낸 글이 당선작에 뽑혔어요. 출판사 초청으로 다른 당선자 20명과 사이판으로 2박3일 여행을 가서 초대 <이프> 편집장(박미라)을 만났어요. 그 인연으로 2호부터 글을 쓰고 객원기자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육아에 살림하면서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계속했나 봐요.

“애를 안고 미친 듯이 책을 읽었어요. 그게 유일한 낙이었거든요. 글쓰기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교 대표로 전국대회에 나가기도 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요.”

―어떻게 보면 굴러온 돌이나 마찬가지인데 얼마 안 돼 편집장이 됐는데요.

“<이프> 안에서 여성학을 전공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자생적, 내추럴본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어요. 이론적 기반이 없어서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없진 않았지만, 페미니즘과 관련한 삶의 모든 과정, 즉 결혼과 연애, 출산, 육아, 시댁, 명절, 제사 등을 온몸으로 하나하나 다 겪어왔잖아요. 그러면서 바뀌고 배우고 실천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페미니스트지 하는 마음으로 <이프>에서 지냈어요. 어떻게 보면 뻔뻔했어요.(웃음) <이프>는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내라는 모토로, 어떻게 보면 선정적이고 센 편이었어요. 많은 것을 대중들에게 도발적으로 질러댔잖아요.”

‘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를 내건 <이프>는 오르가슴 등 성적인 얘기뿐 아니라 여아 낙태, 폭력적인 포르노, 군 가산점, 여성의 군 입대, 간통제 폐지, 문단 내 성폭력 등 사회적 문제를 성역 없이 제기했다.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1999년)은 성상품화 비판을 받아온 미스코리아대회 지상파 텔레비전 중계 폐지를 이끌어냈다.

―페미니즘이 확산되고 성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선 초기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인데요. 얼마 전 성전환 수술을 한 변희수 하사가 군에서 강제전역당하고, 숙명여대에서는 트랜스젠더 합격자가 교내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반대로 입학을 포기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왜 저런 혐오의 말로 페미니즘을 말하는 걸까, 왜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지 안타깝죠. 하지만 몇마디 말로 트랜스젠더를 배제한 두 문제에 대해 말하긴 조심스러워요.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을 반대한 저 사람들은 혐오세력이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라고 마구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 약간은 저로선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리기는 하거든요. 그리고 그 래디컬 페미니스트(TERF) 모임이 거부, 반대의 의견을 내기 전에 환영의 메시지를 낸 숙대 총학생회와 수많은 숙대 동문들의 올바른 의견이 있었어요. 그것이 지워지고 저 배제와 혐오의 단체만 남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혐오하게 된 것이 속상합니다.”

―페미니즘에 사람들이 공감했던 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약자였으며 차별을 당해왔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잖아요. 페미니즘이 다양하게 분화됐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더 약자인 성소수자나 트랜스젠더를 품어주지 못하는 것은 납득이 잘 안돼요.

“같은 생각이에요. 원래 래디컬 페미니즘은 이렇게 트랜스젠더를 못 받아들이거나 배제하고 거부하거나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거든요. 본래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여성주의 혁명의 최종 목표는 단지 남성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적 구분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것이 돼야 한다. 인간들 간 생식기의 차이는 문화적으로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가부장제 철폐를 외치고 투표권에 대해 투쟁하고, 아무튼 뭔가 더 과격하고 혁명적이고 급진적이고 멋졌어요. 그런데 지금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고 있어요. 말도 거칠고 옳지도 않은 것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걸 보면 슬프기까지 해요. 여성인권과 에코페미니즘, 동물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권리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이 페미니스트거든요.”

딸들 고교생 때 훌쩍 혼자 여행
2년간은 스리랑카에서 봉사활동도
“내 안의 고통과 멀어지고 싶었다
내 생각만 해 미안하나 ‘나’ 찾아”


권혁란 작가는 전업주부에서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편집장을 거쳐 여행기획자, 스리랑카 한국어교사 등 진폭이 넓은 삶을 살아왔다. 그는 지난 1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언제나 아마추어이자 도전자로 내내 흔들흔들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권혁란 작가는 전업주부에서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편집장을 거쳐 여행기획자, 스리랑카 한국어교사 등 진폭이 넓은 삶을 살아왔다. 그는 지난 1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언제나 아마추어이자 도전자로 내내 흔들흔들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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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면서 스스로에게 감동”​​

권혁란은 2006년 <이프>를 관둔 뒤 제주도에 가서 혼자 살기도 하고, 훌쩍 집을 떠나 여러 곳에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여행기획자로서 치유를 위한 여행을 사람들과 함께 꾸리기도 했다. 첫 단독 저서인 <트래블 테라피>(2011년)는 그 결과물이다. 2015년에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에서 파견하는 한국어교사로 스리랑카에 가서 2년 동안 혼자 생활했다. 쉰이 넘었을 때의 도전이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대학 때도 학교 도서관에 가방을 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그랬던데요.

“그랬죠. 기질적으로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강의 듣다가 휴강 사이에 잠시 앉아 있다가 그냥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도 했어요. 스스로도 좀 민망한 게 제가 뭐를 해도 진득하게 오래 깊이 파고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사람이 한 우물을 파야 깊이와 넓이를 갖게 된다는데 저는 한 우물 판 경험이 거의 없어요. 여기저기 좌충우돌로 왔다갔다만 한 것 같아서 어디에 내로라할 만한 게 없어요.(웃음) 여행 책도 그즈음의 여행자들에 비하면 여행을 많이 한 것이 아니어서 부끄러움이 있기도 해요. 평생을 다 초보로, 아마추어로,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사람으로만 살아온 것 같아요. 거의 언제나 아마추어이자 도전자로 내내 흔들흔들 살아왔어요. 뭐를 한 뒤에 뭐가 되는 그런 순탄한 길을 가지는 않았지요.”

―보통사람들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삶이에요. 2년 동안의 스리랑카 한국어교사 생활도 그렇고요. 자유에는 결단이 필요하잖아요.

“혼자 있고 싶고 여러 문제가 있을 때 거기서 나를 떼어놓고 자유롭게 살았죠.(웃음) 아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아서 미안한 감이 있어요. 아이가 고3 때 따로 살고, 대학교 다닐 때 제주도에 가 있고, 취준생일 때 스리랑카에 가 있는 엄마가 참 밉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떠돌면서도 믿는 구석은 있었어요. 애들 아빠가 저와는 여러 문제가 있더라도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저보다도 더 잘했거든요. 또 아이들은 제가 있거나 없거나 잘 지낼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고요.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 시절에는 참 어둡기도 했어요.”

―<트래블 테라피>에 보면 이혼 얘기가 있던데 그 시절이었군요. 지금은 재결합한 건가요?

“재결합이라는 말은 피하고 싶어요. ‘재’도 별로고, ‘결합’도 별로예요. 같이 살고 같이 먹는 동거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 저희 관계가 차라리 이상적이에요. 이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는데 나빴던 예전보다 더 좋아졌어요. 애들 아빠로서, 같이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또 남자인 사람으로 참 좋게 변모해서 지금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없는 동안 남편이 요리부터 청소, 아이 보살피기까지 홀로서기가 정말 잘되어 있고요. 아이들에 대해서도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저에게도 자신이 변할 수 있는 시기를 줘서 고맙다고 말했으니까요.”

―한국 남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 같네요.(웃음) 스리랑카 생활은 어땠어요?

“하루하루가 감동이었고, 스스로에게도 감동이었어요. 제주에서는 느끼지도 못했던 혼자 살 수 있는 삶을 살았고, 자식들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거리감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질 수 있었고요. 또 내가 이렇게 성실하고, 밝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2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도 너무 착했어요. 귀한 2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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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강박을 벗어나다​​​

권혁란은 1964년 경기도와 도 경계에 있는 충북 음성 시골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2남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는 셋째 언니를 따라 경기도 안양으로 유학 갔다. 그러나 셋째 언니는 얼마 안 돼 말 그대로 집을 나가 몇년간 행방불명됐다. 인생에서 가장 밝게 빛날 여고 3년이 “어두운 그늘과 설명 못할 외로움으로 가득 찼다.” 대신 언니가 두고 간 <테스> <적과 흑> <문학사상> 등 몇권의 책들은 권혁란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테스>를 하도 읽어 나중에 영화가 나왔을 때, 나스타샤 킨스키 표정에서 나오는 대사까지 읊을” 정도였다. 국문학과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대학에서부터 소설을 쓰고, 친구들과 함께 시집도 만들었다.

―작가로서 앞으로 계획은요?

“예전에는 정말 소설을 써서 등단하고 싶었어요. 문단에는 신기한 게 있어요. 아무리 여러 권 책을 내고 글을 써도 소설가나 시인이 아니면 문학의 정수에 다다른 사람으로 여겨주지 않거든요. 종종 치사해서 나도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건 없어요. 글이 좋다고 하니 소설을 쓸까 하는 생각은 있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는 생각과는 달라요. 또 소설을 쓰든 책을 만들든 더 늦기 전에 한두번은 남미든 아프리카든 동남아시아든 한국어교사로 봉사를 더 다녀오고 싶어요. 아마 이렇게 있다가도 훌쩍 떠날 수도 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읽은 책의 문장들이 좋았다. “가루가 된 몸을 나무 아래 뿌리고, (영 묻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바로 그 나무 옆 땅에서, 다시는 농사 안 지을 텃밭에서 봄 냉이를 캤다.” “너희들은 이 엄마를 아무한테도 부탁하지 마. 엄마라는 건 부탁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알았지?” 따뜻함 속에 웅숭깊은 사유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렸다. 자유로운 영혼과 3시간 넘게 대화하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평범한 듯 예사롭지 않고 경쾌한 듯 고뇌가 깊은 새내기 작가 권혁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됐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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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현재는 토요판팀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국가나 사회, 민족 등 추상적인 단어보다 그 실질을 이루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김종철의 여기’는 4주에 한 번 연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