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의 문학으로] 문학과 정치
등록 :2020-02-27 18:14수정 :2020-02-28 14:07
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남편이 조용히 젊은 날을 보내고 귀밑머리가 희어지는 노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다. 그는 항상 자기가 질 수 있는 만큼의 화약을 지게 되면 짊어지고 뛰어들겠노라고 말했었다. (…) 세영은 그런 어리석은 꿈을 꾸고 있는 남자가 소설책 말고 바로 옆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난달 출간된 고경숙 소설집 <별들의 감옥>에 실린 자전적 단편 ‘푸른 배낭을 멘 남자’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 세영의 남편 현우는 결국 1970년대 중반과 말 두 차례 조직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소설은 70년대 말의 사건 당시를 배경으로 삼아, 그로부터 5년 전의 간첩단 사건은 물론 6·25 전쟁 때 월북한 현우의 형 이야기로까지 거슬러 오르며 현대사의 상흔과 한 가족이 겪은 시련을 그린다.
소설 주인공 현우의 실제 모델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그러니까 고경숙 작가는 임 소장의 부인이다. 소설 속 현우는 수사관들이 집에 들이닥칠 기미가 보이면 배낭을 메고 피신한다. 배낭 안에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루카치, 김일성 저작 등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책”들이 들어 있었다. 남편이 도망치고 나면 아내는 남은 책들 가운데서 또 위험한 것들을 골라 역시 배낭에 넣어서는 지하실 연탄 더미 안에 감춘다.“그는 왜 그것을 목숨을 걸고 읽는가. 그것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또 그것들 속에 자기가 찾는 옳음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임헌영 소장은 2018년 6월 문인 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 발생 44년 만이었다. <별들의 감옥> 서문에서 고경숙 작가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집안 전체가,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반세기 가까운 오랜 세월을 유죄의 그늘에서 살아왔”다며 “어쨌든 고꾸라지지 않고 쉬임없이 읽고 쓰면서 팔순을 바라보는 지점에 그와 나란히 도착한 것이 기쁠 뿐”이라고 술회했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임 소장이 새로 낸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를 부인 고경숙 작가의 소설집과 ‘나란히’ 읽는 느낌이 각별하다. 소설 속 표현대로 “귀밑머리가 희어지는 노년”이 된 임 소장이 젊은 날 품었던 의기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은 문학의 정치성 회복이다. ‘통매’란 “몹시 꾸짖다”는 뜻이거니와, 정치 현실과 정치인을 호되게 꾸짖는 작가와 작품들에 그는 주목한다. 최인훈 이병주 남정현 조정래 등이 거론된다. 이들 소설의 정치성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거대담론’을 포기하고 ‘미세담론’과 미학에만 열중하는 문학인들에게 경종을 울리자는 취지다.
“(역사는) 식민지 군대의 하급장교를 대통령으로 점지한 생활을 선고한 것이었다. 역사는 한국 사람들의 귀싸대기를 보기 좋게 갈겨 준 것이었다.”“1980년대는, 미국 군함이 서해바다에서 뒷짐을 지고 망을 보는 가운데, 광주 한 고을을 겹겹이 둘러싸고 본때를 보이는 피잔치를 벌인 끝에 얻어낸 공포의 우산 밑에서 출발하였다.”
최인훈의 후년 대작 <화두>에서 인용한 이런 대목들은 그의 날카로운 현실 비판 정신을 보여준다.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데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강자의 지배 아래에 포섭된 조국의 현실을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이병주는 박정희, 전두환 등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과 친했던 ‘어용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 같은 소설에서 박정희에 대한 비판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 임 소장은 주목한다. 가령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 암살단 조직 혐의로 체포된 한 인물이 열거한 박정희의 죄목(민족의 적, 민주주의의 적, 윤리의 적, 국민의 적)은 “그 어떤 논문이나 연구서보다 정확하다”고 그는 평한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제 침탈기를 다룬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이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론적·실증적 반박”이라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책을 내고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난 임 소장은 거듭 강조했다. “거대담론과 문학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담론을 본격적으로, 제대로 다루는 게 바로 문학이에요. 문학이 그런 임무를 방기하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가 그 일을 대신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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