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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도올의 예수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3. 14. 03:58

“사랑하라,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도올의 예수전’

등록 :2020-03-13 05:00수정 :2020-03-13 11:25

 

신학 논쟁 벌여온 도올 김용옥이 마가복음 중심으로 쓴 1인칭 ‘예수전’
종교 권위와 세속적 욕망 속 ‘고독한 예수’ 드러내고 민중 속 얼굴 복원

 

 

<나는 예수입니다>에서 도올은 첫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전개를 따르면서도 당시의 욕망을 걸러내고 사람 예수의 얼굴을 드러낸다. 사진은 지난해 8월2일 서울 종로구 통나무출판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도올 김용옥.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의 예수전김용옥 지음/통나무·1만6000원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예수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인칭 시점의 이 문장은 책의 제목이자 고갱이다. 김용옥은 변방 갈릴리의 작은 읍촌 나사렛 출신 청년을 복원한다. 첫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전개를 따르면서도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체 삼아 마가복음이 쓰인 당시의 욕망을 걸러내고 사람 예수의 얼굴을 드러낸다. 예수가 들려주는 자신은 민중을 옥죄는 종교의 권위를 전복한 사람, 민중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던진 사람, 섬김을 받는 게 아니라 섬기러 온 사람이다.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곳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에게 평범한 이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보통의 여자였다. 그는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길 원했던 건 그가 숨지고 40년 뒤 로마의 공격으로 폐허 위에 선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에겐 ‘메시아’가 필요했고 야훼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는 유대민족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다윗의 혈통을 이어야만 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다. 마가복음은 이런 예수의 ‘그리스도’상과 민중 속으로 들어간 예수의 구체적 삶을 융합해 전하는 ‘좋은 소식(굿 뉴스)’ 유앙겔리온이다.

 

예수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사람이다. 유대인 정체성은 거의 없었다. 변방의 갈릴리는 유대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이 뿌리내리지 않은 곳이다. 갈릴리는 비옥해서 착취당하는 땅이었다. 예루살렘성전과 율법의 권위는 이 땅의 사람들을 쥐어짜 유지됐다. 농사지어 얻은 소득의 3분의 2는 상류층 주머니로 들어갔다. 흉작이 들면 노예 또는 불가촉천민이 됐다. “나는 이 불가촉천민들의 친구입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의 신은 ‘야훼’가 아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야훼’는 본래 광야의 신이었으나 유대인이 가나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죽고 죽이는 적대적 악순환에 빠져들자 성전에 갇혔다. 신의 이름은 성전의 위계를 지배하는 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오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야훼’는 배타적인 질투의 신이지만 예수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민중의 고통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하나님이다. 민중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다.

 

“예수는 교주가 아니며 천당을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천국운동가’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나라’는 새 왕국의 통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민중을 고통에서 해방하는, 땅에서 실현될 새 질서다. 환자를 죄인 취급하며 격리하는 율법, 배고픈 사람보다 손 씻기 따위 절차를 앞세우는 율법, 죗값을 빌미 삼아 헌금을 뜯는 율법을 뒤집는 새 질서다. ‘회개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메타노이아’, 새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는 어떤 모습인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모인 장정 5천명, 당시엔 수를 세지도 않은 여성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2만여 군중을 다섯 덩이 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 ‘기적’을 4복음서는 모두 기록하고 있다. 핵심은 많은 사람이 적은 음식을 나누어 함께 먹었다는 데 있다. 평화롭게 앉아 함께 먹는 그 풍경이 천국의 본질이다. 예수의 ‘기적’은 민중의 신념, 믿음을 통해서만 발현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권능은 ‘뒤나미스’라는 낱말로 표현되는데 이는 모든 인간에게 잠재된 역량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의 계명은 단 한 가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 이 둘은 사실 하나다. 자기 몸이 아프면 바로 행동하게 된다. 이웃은 전 인류다. 인류의 아픔을 제 것같이 느끼고 바로 행동하려면 자아의 집착을 버려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능하다. “모두 들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다른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그 관계 속에 있다.

 

건축에 86년이 걸린, 권위의 상징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며 뒤집은 삼십대 청년 예수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십자가에 못 박히며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고독 속에서 숨졌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그에게 세속적 욕망을 투영해 그를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해했다. 2천년이 지난 지금, 모퉁이마다 십자가가 선 이 땅에서도 예수는 세속적 욕망의 투영 속에서 고독하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고 그 곁에 선 흰옷 입은 존재가 말했다. “예수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다.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는 성전이 아니라 변방의 땅 갈릴리 민중 속에서 부활했다. 김용옥이 평생에 걸친 신학연구로 길어 올린 예수의 목소리는 강력한 흡입력으로 말한다. ‘사랑하라.’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