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테옹, “위대한 인물들에게 감사” 표하는 프랑스식 방법
등록 :2020-03-21 09:36수정 :2020-03-21 09:45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⑤ 생트 준비에브 언덕의 팡테옹
루이 15세가 중병 나은 뒤
파리 수호성인 생트 준비에브
기리려고 개축한 교회 건물
프랑스 혁명기인 1791년에
‘국가유공자의 묘’로 사용
200년 동안 78명만 안장돼
자격 미달 확인되면 퇴장
파리의 팡테옹은 루이 15세가 파리의 수호성인인 생트 준비에브를 기리기 위해 1764년 머릿돌을 놓았던 교회 건물이었다. 프랑스 혁명기에 완공됐던 ‘생트 준비에브 교회’에 대해 제헌의회는 1791년 ‘팡테옹 프랑세’로 명명하고 국가유공자를 위한 곳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200년 동안 이곳에는 78명이 안장됐다. 게티이미지뱅크
로마인들이 파리에 살기 시작한 뒤 ‘루테티아’(시테섬)와 남쪽 언덕 ‘레우코테티우스’까지 개발했다. 해발 61m라고 해도 센강에서 볼 때 23m의 낮은 언덕이니 도시를 개발하기 적합했다. 그들은 언덕의 북쪽 기슭에 테름궁과 목욕탕, 시민광장(Forum)을, 동쪽 기슭에 원형경기장을 세웠다. 5~6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파리에 정착한 뒤 이 언덕을 생트 준비에브 언덕이라 불렀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팡테옹으로 올라가는 큰길은 1760년께에 두 길을 합친 것이다. 혁명기에 잠시 ‘팡테옹 프랑세 길’로 부르다가 1807년에 ‘수플로 길’로 확정했다. 수플로(1713∼1780)는 18세기의 저명한 건축가였다. 루이 15세는 1744년에 애첩을 데리고 원정을 떠났다가 메스에서 중병에 걸렸다. 세간에서는 그가 귀족 자매를 차례로 애첩으로 거느렸기 때문에 근친상간의 벌을 받았다고 수군댔다. 그는 병을 낫게만 해준다면 생트 준비에브 교회를 화려하게 다시 지어 바치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 1757년에 그는 수플로에게 그 일을 맡기고 1764년에 직접 머릿돌을 놓았다.루이 15세는 1774년에, 수플로는 1780년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게다가 지진, 재정 악화 때문에 공사를 질질 끌다가 혁명기에 겨우 마쳤다. 1791년 4월4일에 제헌의회는 미라보 백작의 장례식을 논의할 때 생트 준비에브 교회를 ‘팡테옹 프랑세’로 부르고, 국가유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쓰기로 의결했다. 팡테옹 정면에 “위대한 인물들에게 조국은 감사한다”라고 새기고, 미라보 백작은 물론 데카르트, 볼테르, 루소의 유해도 거기 안장하기로 했다. 이처럼 혁명의 가장 큰 가시적 성과는 정교분리였다.
파리 팡테옹의 볼테르 묘와 대리석 인물상. 위키피디아
기독교로 개종한 게르만족 왕 클로비스
팡테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길과 건물에서 1500년 전 프랑스 왕국의 초기 역사가 숨쉬고 있다. 클로비스 길과 클로틸드 길이 만나는(갈라지는)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굳이 만남과 이별을 강조한 이유는 클로비스와 클로틸드가 부부였고, 그들이 처음으로 왕립교회를 지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프랑크족의 살리계에 속한 클로비스 1세(465∼511)는 프랑스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인 실데리크는 유부녀의 명예를 더럽히는 방탕한 생활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웃 부족의 왕이 그를 거둬주는 동안 왕비 바진과 정분이 났다. 얼마 뒤 그는 돌아와달라는 간청을 받고 튀링겐의 궁으로 돌아갔다. 바진이 그를 찾아와 결혼했고, 클로비스를 낳았다. 클로비스는 481년에 실데리크의 뒤를 이어 왕으로 뽑혔다. 그는 벨기에 지방의 투르네에서 남쪽을 정벌하다가 486년에 수아송의 지배자이며 로마인의 왕인 시아그리우스에게 승리하고 거기 정착했다. 492년에 그는 부르군트족과 전쟁을 끝내고 이듬해에 족장의 조카 클로틸드와 결혼했다.496년에 그는 알라만족의 공격을 받는 프랑크족 레난계 부족을 도우러 쾰른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오히려 그는 알라만족의 역공을 받았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는 위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가톨릭교도인 클로틸드의 신에게 빌고, 가피(신의 힘)를 받아 11월10일에 톨비아크(쥘피히)에서 알라만 족장의 머리를 쌍날도끼(francisque)로 찍었다. ‘톨비아크 다리’와 ‘톨비아크 길’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의 다른 이름은 톨비아크 도서관(BNF Tolbiac)이다.이 승리에 얽힌 이야기는 312년 10월에 콘스탄티누스가 하늘의 십자가를 보고 이겼다는 전설과 유사하다. 하느님은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만들어 313년에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하고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교리를 확정하게 했듯이, 클로비스에게는 프랑스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만드는 임무를 준 듯하다.클로비스는 클로틸드, 생르미 주교, 준비에브의 영향을 받아 부하들과 함께 다신교를 버리고 세례를 받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부하 3천명과 함께 498년(506년 설도 있음) 12월25일에 생르미 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보다 먼저 개종한 게르만족(프랑크족도 게르만의 일족) 지도자가 있었지만, 부족 전체가 개종한 경우는 클로비스의 부족이 처음이었다. 500년에 클로비스는 손위 처남들의 싸움에 개입했다. 그는 부르고뉴 지배자인 공드보의 동생 공데지질과 결탁하여 공드보를 쫓아냈고, 론강·손강·마르세유 지방에서 삼위이체설을 버리고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발판을 놓았다. 그는 갈로 로마(로마제국에 복속된 갈리아 지역, 즉 옛 프랑스 땅)의 지배층인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틸라 침략과 생트 준비에브의 기도
<프랑크족의 역사>를 쓴 그레구아르 드투르는 생르미 주교가 아주 학식이 높고 언변이 좋았으며, 죽은 이도 살려놓았다고 썼다. 클로비스가 개종하기 전부터 생르미를 특별히 대우했다는 일화가 있다. 랭스에서 교회 물건을 약탈당한 생르미가 제기(祭器)를 하나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수아송에서 돌려주겠다고 말했다.수아송에 도착한 뒤 클로비스는 주교에게 제기를 돌려주어도 좋겠냐고 전사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통상 추첨으로 전리품을 나누었다. 단 한 사람이 왜 관행을 지키지 않느냐고 반발하면서 제기를 도끼로 찍었다. 클로비스는 화를 꾹 참고 생르미에게 약속을 지켰다. 훗날 그는 검열 중에 그 전사의 병기를 낚아채서 땅에 내동댕이치며 더럽다고 트집을 잡았다. 전사가 황급히 병기를 주우려고 몸을 굽히자 ‘제기를 이렇게 만든 벌’이라고 말하면서 머리를 찍었다.클로비스는 파리의 테름궁에 정착하고, 생르미 주교에게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기리는 수도원과 교회를 언덕에 봉헌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첫번째 왕립교회는 파리의 수호성인 생트 준비에브와 관련이 있으며, 혁명기에 팡테옹이 되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7세기 화가가 그린 생트 준비에브. 위키피디아
준비에브는 420년께에 낭테르의 부유한 가정의 외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성인과 순교자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고, 일곱살에 벌써 신앙생활에 충실하겠다고 결심했다. 오세르(파리 동남쪽 170㎞) 주교 제르맹과 트루아 주교 루가 브르타뉴 지방의 이교도를 진압하고 돌아가는 길에 낭테르에 들렸을 때 어린이의 신심을 확인하고 부모에게 장차 큰 인물이 될 테니 의지를 꺾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부모는 딸의 고집을 꺾기 위해 기도하고 매질도 했다. 준비에브는 자기 방에서 조용히 명상하거나 오직 빈자와 환자만 만났다. 그는 열일곱살에 샤르트르 주교 벨리쿠스를 만나 수녀의 머릿수건을 받았다.얼마 뒤 부모를 여읜 그는 파리의 대모 집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콩·보리빵·물로 소박하게 살면서 영혼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그는 기도와 명상 중에 법열 상태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주위 사람들은 죽은 듯 누워 있는 그를 보고 관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시기·질투하고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늘었다. 그의 명성은 기독교 세계에 널리 퍼져, 시리아 사막의 기둥성자(기둥 위에서 고행과 기도를 한 데서 유래) 시메온도 여행자가 찾아오면 준비에브의 소식을 물었다고 한다.아시아의 훈족이 유럽으로 들어오고, 그들에게 쫓기는 게르만 민족이 서로마제국의 존립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451년에 파리의 상인들은 악명 높은 훈족의 아틸라가 파리를 향해 돌진한다는 소식에 벌벌 떨면서 짐을 쌌다. 고행과 금식으로 야윈 몸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준비에브는 그들을 설득했다. 도망쳐봤자 훈족의 기마병들에게 잡혀 죽을 것이 뻔하니 차라리 시테섬에 들어가 하느님만 믿고 기도하자고. 주민들은 그를 위선자·사기꾼으로 매도했다. 금은보화를 배에 싣고 서둘러 떠나려는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혼란을 빚었다.준비에브는 아낙들을 모아놓고 성경의 유디트와 에스더처럼 나라를 구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아낙들을 인도해서 시테섬의 생테티엔 교회(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자리)로 갔다. 아낙들이 세례당을 잠그고 예수 초상화 앞에서 기도하는 동안 밖에서는 남자들이 준비에브를 돌로 때려 죽이거나 강에 던지자고 외쳤다. 마침 오세르 주교 제르맹의 친구인 제네시우스가 나타나 준비에브의 편을 들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남자들도 본받아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통했는지 아틸라는 오를레앙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저항을 받고 동쪽으로 물러났다.준비에브는 클로비스·클로틸드와 친하게 지내다가 502년께에 죽어, 준비에브 언덕에 생르미 주교가 봉헌한 ‘사도들의 수도원 교회’에 묻혔다. 나중에 클로비스와 클로틸드는 차례로 그의 곁에 묻혔다. 루이 7세(1137∼1180) 치세인 1148년에 ‘사도들의 수도원’을 생트 준비에브 수도원으로 불렀고, 공사를 1175년에 완전히 끝냈다. 생트 준비에브는 파리의 9대 주교인 생마르셀(마르셀 성인, 360∼436)과 함께 파리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생마르셀의 성유물은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생트 준비에브의 성유물은 팡테옹 곁의 생테티엔뒤몽 교회에 보관했다. 재난이 닥치면, 종교인·관리·부르주아들은 두곳의 유물을 들고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파리 팡테옹의 내부 모습. 위키피디아
지구 자전을 푸코가 처음 증명한 곳
1791년 4월 초 미라보 백작의 장례식을 계기로 생트 준비에브 교회를 ‘팡테옹 프랑세’로 바꾼 뒤 7월11일에 볼테르, 1793년 1월24일에 르펠티에 드생파르조, 1794년 9월21일에 ‘인민의 친구’ 마라, 10월11일에 장자크 루소를 안장했다. 이들은 볼테르와 루소만 빼고 나중에 자격 미달로 쫓겨났다. 예를 들어, 미라보 백작은 루이 16세 부부와 은밀히 결탁했음이 드러났다. 내가 팡테옹을 찾았을 때 200여위를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지금까지 200년 동안 모두 78명(여성 5명 포함)을 모셨으니 자격심사를 얼마나 철저히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국립현충원에서 일본 군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만이라도 이장하는 날을 볼 수 있을까?1851년 2월3일에 레옹 푸코는 팡테옹에 모인 과학자들 앞에서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팡테옹의 돔에서 67m의 줄을 내리고 그 끝에 28㎏의 황동추를 매달아 흔들었다. 추는 멋대로 움직이다가 점차 규칙적으로 움직이면서 지구의 자전 방향과 반대 궤적을 그렸다. 이로써 푸코는 15세기 이래 과학자들이 별을 관측하면서 설명하던 지구의 자전운동을 땅에서 처음 증명했다. 실험이 끝난 뒤에 진자를 프랑스공예원(CNAM)의 옛 생마르탱데샹 교회에 보관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푸코의 진자>의 무대가 팡테옹이 아니었던 이유다. 팡테옹은 1995년부터 복제품을 전시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복제품을 전시해서 과학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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