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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문학으로] 코로나 시대의 문학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3. 28. 08:05

[최재봉의 문학으로] 코로나 시대의 문학

등록 :2020-03-26 18:22수정 :2020-03-27 02:41

 

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코로나19가 일상을 장악하면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판매가 급증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여러 논자들의 칼럼에서도 즐겨 인용되곤 한다. 1947년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 속 상황이 그만큼 이번 사태와 유사하고 그로부터 우리가 얻을 교훈도 여전하다는 뜻이겠다. 문학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페스트>는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페스트(흑사병)가 번지면서 도시가 폐쇄된 가운데 이 질병에 맞서 싸우는 인간 군상의 이모저모를 그린 소설이다. 특히 의사 리외를 비롯한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이 감동적이다. 그런데 리외가 의사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화자라는 사실에는 충분한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는 듯하다.

 

< 페스트>는 1940년대의 어느 해 4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벌어진 상황을 그린다. 소설 도입부는 이 작품을 “연대기”로 표현하며, “연대기의 서술자”가 “어떤 우연으로 인하여 얼마만큼의 진술 내용들을 수집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로서의 과업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 서술자의 정체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감추어져 있다가 말미에 가서야 그것이 의사 리외라는 사실이 공개된다. <페스트>라는 “연대기”를 쓰게 된 과정과 연유가 곧 소설 <페스트>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재귀적 형태를 띤다. 어쨌든 리외가 기록자가 되기로 한 까닭을 설명하는 소설 말미의 문장은 감동적이다.“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김화영 옮김, 1998년 책세상 판)이 문장은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문학은 발언이며 증언이고 추억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페스트> 화자인 리외의 이런 생각은 카뮈 자신의 견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리외를 통해 개진되는 카뮈의 목소리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 ‘역병의 재난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한 문학’으로 이어진다. 옌롄커 자신 이 글에서 <페스트>를 언급하고 있거니와, 이 글은 코로나19와 같은 심각한 사태 앞에서 문학과 문학인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전쟁이나 역병의 재난이 닥쳐왔을 때가 작가들이 기꺼이 ‘전사’가 되거나 ‘기자’가 되어야 할 때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총성보다 더 멀리 울려 퍼질 것”이라고 옌롄커는 쓴다. 그런데 “중국문학의 문제점은 (…) 작가들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그는 일갈한다. “문학이 무능하고 무력한데 작가들은 이런 무능과 무력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펜과 목소리, 권력으로 부조리와 죽음과 통곡의 악보를 만들어 찬미의 시를 노래하고 있다”며, 이것은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하는 일”이어서 “작가들 스스로 문학의 회자수(사형집행자)가 되고 있다”고까지 통매한다. 한국문학이라고 해서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페스트>는 2차 대전과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대한 알레고리로 흔히 해석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전염병 또는 그것이 상징하는 인간의 취약한 실존적 조건을 다룬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이 소설을 다시 찾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페스트와 코로나19 같은 재앙에 맞서 문학과 문학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카뮈와 옌롄커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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