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두 차례 해직에도 꿋꿋했던, 시민군 민원부장 정해직 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3. 26. 08:52

두 차례 해직에도 꿋꿋했던, 시민군 민원부장 정해직 교사

등록 :2020-03-26 05:01수정 :2020-03-26 07:24

 

[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날 그사람들 (6)

진압군 만행에 분노한 새내기 교사
전남도청 마지막 항쟁지도부 참여
희생자 안치하고 생필품 공급하고
“그 혼란 속에서도 사재기 없었어요”

내란주모자로 징역 5년받고 해직
3년만에 학교 돌아갔지만 또 해직
해직 생계난 속 전교조 집회 열성
두번째 특채 뒤 교사책임 더 막중
“80년 광주 넘어 오월정신 이을 것”

 

짧은 머리에 군복을 입어야 했다. 왼쪽 가슴엔 7번 번호표를 달았다. 앳된 얼굴엔 의연함이 서려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운명처럼 80년 계엄군의 군사법정에 끌려갔다. 법정은 삼엄했다. 안팎에는 무장헌병 30여명이 서 있었다. 긴장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희생자를 안치하고 생필품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안경 너머로 재판관을 응시했다. 고개를 들고 최후진술을 기다렸다.

1980년 9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군사법정에서 재판받는 5·18항쟁 지도부. 정상용(왼쪽부터)·윤강옥·김영철·이양현·정해직·김화성. 정해직씨가 7번 번호표를 달고 있다. 민생당 제공

 

5·18민주화운동 때 정해직(70)씨는 전남도청 항쟁지도부의 민원부장이었다. 당시 그는 20대 후반의 새내기 교사였다. 2년째 전남 보성의 노동초등학교 광곡분교에서 근무 중이었다. 계엄령이 확대된 1980년 5월18일 광주에 왔다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하면서 역사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내란중요임무 종사자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주도자로 교단에서 두 차례 쫓겨났다. 해직의 아픔과 생계의 압박을 겪으면서도 사회 민주화와 교육 민주화의 길을 지켰다. 그의 별명이 ‘정해진 해직’이 된 이유였다.“18일 오후 1시 광주 금남로 수창초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을 봤어요. 마치 영화 속에서 인디언을 사냥하는 백인들 같았어요. 젊은이들을 쫓아가 몽둥이로 후려치고 쓰러지면 군홧발로 마구 짓밟고… 피범벅이 된 사람을 질질 끌고 가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긴 뒤 무릎을 꿇리고… 그러다 트럭에 싣고 갔지요.”교육대 출신 예비역 부사관이던 그는 무자비한 진압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월요일인 다음날 보성의 학교에 출근했다. 자꾸만 생각이 나고 뒷일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 초반 광주를 두 차례 더 찾았다.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한 뒤 퇴각해 광주 외곽을 봉쇄했다. 22일 도시가 고립되면서 그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40년 전 교사 정해직은 전남도청 항쟁지도부 민원부장으로 행불자 신고를 받고 사망자를 안치하는 등 대민 업무를 맡았다. 안관옥 기자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그는 시위와 집회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전남도청과 녹두서점을 오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정상용·윤강옥·윤상원·김영철 등을 만났다. 집단발포로 무고한 시민들이 숨졌는데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민궐기대회에서 낭독할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을 쓰고, ‘우리는 왜 총을 들었는가’ 등 문건을 함께 준비했다.25일 시민군 내부에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꾸려지자 민원부장을 맡았다. 그는 도청 1층 지방과에 사무실을 두었다. 권력 공백 상태에서 시민 생활에 불편을 주는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우선 도청 정문 앞에서 행방불명자(행불자)와 사망자 신고를 받았다. 사망자 80여명을 안치하는 데 부족한 관 40개를 수소문했다. 생필품을 공급하고 시가지를 청소하는 일도 급했다. 시장을 열고 시내버스를 운행하라고 당국에 요구했다.“시가지에서 차량이 불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매점매석이나 범죄행위는 없었지요. 부족한 물건들을 서로 나누며 양보했어요. 라면도 한 봉지, 담배도 한 갑 정도만 팔고사고 했고요. 당시 광주는 주먹밥을 나누고, 줄지어 헌혈하는 등 시민공동체였어요.”계엄군이 최후통첩을 하자 그는 민원부 학생들 10여명을 돌려보내고 결전을 준비했다. 이곳에 남으면 죽는다는 걸 직감했다.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며칠 전까지 가르치던 아이 23명의 얼굴도 하나하나 스쳐 갔다.“저 담만 넘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요. 동지들을 남겨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제대로 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교사가….”27일 새벽 그는 카빈 소총 1정과 탄창 2개를 그러쥔 채 도청 2층 창가를 지켰다. 새벽 4시쯤 계엄군은 앞쪽이 아니라 뒤쪽으로 왔다. 건물 안에서 엠(M)16 소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복도에 함께 있던 윤강옥과 황급히 식산국장실로 피했다. 안에서 ‘살 수 있을까’를 되묻는 찰나 계엄군 두세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총을 버리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도리가 없었다. 복도로 나가 바닥에 엎드리자 등 뒤로 포승줄이 사납게 날아왔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집회를 이끄는 해직교사 정해직.

체포된 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505보안대로 옮겨져 끔찍한 구타와 수사를 견뎠다. 2m 넘는 몽둥이로 하도 많이 두들겨 맞아 온몸이 군용 수통처럼 부풀어올랐다. 위인백은 맞다가 발목이 부러지고 위성삼은 거꾸로 매달려 몽둥이질을 당했다. 체념했으나 목숨은 참 질겼다. 죄목은 애초 소요죄에서 나중에 내란죄로 바뀌었다. 내란중요임무 종사죄로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0개월 옥살이를 한 뒤 이듬해 4월 감옥에서 풀려났다. 들어갈 무렵 보았던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과일 장사로 생계를 꾸렸다. 제주행 화물선에 화물차를 싣고 가서 밀감을 사다 팔며 억척을 부렸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자립의 자세였다. 고향 보성을 떠나 친척 집에서 순천중·고를 다닌 그는 대학도 학비가 싼 광주교대를 택했다. 졸업 후 발령이 늦어지자 우유 배달을 하고, 흥민신협을 조직하는 등 쉼없이 살았다.83년 4월 해직된 지 3년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원직복직이 아니라 특별채용이었다. 과격하다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원래 조용한 성정이기도 했지만 말수가 더 줄었다. 더는 참지 못할 때 입을 열었다. 광산 무학초등에서 합창부를 지도했다. 아이들과 대회에 나가기 위해 출장 신청을 했다. 교장이 아이들 짜장면값에도 못 미치는 출장비를 내밀었다. 교장 면전에 출장명령서를 집어던졌다. 주변에서 뜯어말렸다. 이내 출장비는 제대로 지급됐다. 그런 시절이었다.“대학 시절 <25시> 작가 게오르기우데지의 강연을 들었어요. 이전에 잠수함을 타는 수병들은 토끼를 데리고 탄다고 했어요. 산소 부족을 견디지 못하는 토끼를 보면서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거예요. 시인·교사 등 지식인이 토끼겠구나 싶었어요.”

87년 9월 광주와이엠시에이에서 열린 교육 민주화 실천을 위한 전남민주교육추진교사협의회 창립대회.

토끼 같은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20~30년 뒤에 만날 세상을 제대로 준비하도록 이끌고 싶었다. 그의 관심은 교육 민주화로 기울었다. 1986~89년은 교육개혁의 목소리가 커지던 시기였다. 1986년 5월10일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교육 현실을 바꾸자며 교육민주화선언을 했다. 이어 호남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국장과 전남교사협의회 부회장, 전국교사협의회 초등위원장 등으로 참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3년 만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하자 초등위원장과 중앙집행위원으로 탄압에 맞섰다. 다시 해직과 투옥을 각오했다. “교육이 민주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입니다. 입시경쟁에 찌든 우리 교육을 민중을 위한 교육으로 뜯어고쳐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예상은 했지만 시련은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 1989년 7월 두번째 해직이 찾아왔다. 그는 여전히 의연했다. 이번에는 금남상가에 컴퓨터점을 열었다. 마침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여서 그런대로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광주 도심에 도서문화연구소 ‘무등서고’를 열어 사랑방으로 활용했다. 그는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집회와 단식에 빠지지 않았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교조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지방자치가 도입되자 광주시의원에 도전했다 고배를 들기도 했다.1994년 다시 특별채용됐다. 학교로 돌아가며 전교조 집회에서 만났던 미술교사 나미경씨와 결혼했다. 페미니즘으로 말문이 터진 뒤 자주 대화를 나누던 터였다. 가정을 꾸리고 1남 2녀를 낳았다. 자녀의 성장을 지켜보던 그 때가 가장 행복하고 평온한 시절이었다. 그는 자녀를 키우면서 교사의 책임을 더 자주 생각했다.

큰딸 민수(왼쪽)와 둘째 딸 윤오와 함께 걸은 한반도 평화 만들기 은빛순례.

“학교가 운동회는 열심히 준비하면서 자치회는 관심이 없더라고요. 학급에서 반장을 뽑을 때 청문회를 도입해봤죠. 절차를 거치니 아이들이 잘 따랐어요. 반장의 어머니는 학부모회 임원을 맡지 않도록 규정을 만들기도 했죠. 학부모가 봉투나 선물을 보내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돌려보냈습니다.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한결같이 하니까 다들 받아들였어요.” 그는 유별난 선생이었다.두 차례 특별채용으로 그는 경력과 봉급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후배인 관리자들과 잘 지내기 어려웠다. 8년 후배보다 봉급이 적었다. 세상이 달라졌으면 잘못을 고쳐야 했다. 그는 2005년 억울함을 풀어줄 완전한 복직을 꿈꾸며 학교를 떠났다. 2000년 5·18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만큼 징계절차조차 없었던 강제퇴직은 당연히 무효라고 여겼다. 하지만 재심 이후 소송 시효 3년이 넘었다는 이유로 인사행정의 부당함을 바로잡지 못했다.그는 이제 사회 민주화에 매진하고 있다. 오월항쟁동지회를 이끌며 시민법정을 꾸리고 시민축구대회도 열었다. 5·18기념재단의 후원회장 때는 구자범·김상봉·안병욱 등 명사들을 초청해 오월이야기마당을 기획했다. 오월 당사자들이 시민에게 한발 다가서려는 시도였다. 또 재야 민주인사 모임인 ‘이심전심’에서 5년 동안 총무를 맡아 광주와 오월의 진로를 토론했다. 지난해에는 ‘아이들에게 평화의 한반도를 물려주자’는 뜻으로 도법스님이 꾸린 은빛순례단에 참가해 국토를 누비기도 했다.5·18항쟁 40돌을 맞은 오늘, 그는 오월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오월은 ‘80년 광주’를 넘어 6월항쟁과 촛불항쟁으로 이어졌어요. 이처럼 오월은 끝없이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키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오월정신을 창의적으로 계승할 일꾼들을 길러내 위기마다 고비마다 공동체의 가치를 오롯이 지켜야 합니다.”글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사진 정해직씨 제공

순천중 3학년 재학 시절.

전교조 탄압 저지와 합법성 쟁취를 위한 결사단식투쟁에 참여한 전교조 광주지부 조합원들.

온 가족이 함께 올라간 무등산 중머리재.

해마다 5월이면 5·18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오월의 계승을 다짐한다.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제출된 공소장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에 제출한 항소이유서

교사 정해직이 40년 전 수감생활을 했던 상무대 영창 앞에서 내란사건 조작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안관옥 기자

 

연재[5·18민주화운동 40돌 기획] 오월, 그날 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