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지역에서] 코로나 시대, 어떤 일상 / 이나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8. 02:14

[지역에서] 코로나 시대, 어떤 일상 / 이나연

등록 :2020-04-06 18:03수정 :2020-04-07 02:40

 

이나연 ㅣ 제주 출판사 ‘켈파트프레스’ 대표·미술평론가

 

하루가 길다. 두세 달에 한 번은 해외로, 일주일에 한 번은 제주에서 서울이나 부산으로 이동하며 일을 해왔다. 매년 3월 중순이면 홍콩의 바젤아트페어에 가곤 했다. 3월이면 대학교도 개강을 하니, 수업을 하는 제주에서 매주 하루 이상 머물렀어야 했다. 일정이 바뀌기 전엔 그래야 했다. 아트페어는 취소되고, 개강은 미뤄지다가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대체됐다. 동영상 강의를 준비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응대하는 데 시간을 쓰긴 하지만 제주로 이동하고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며 하루를 온통 쓰던 것과 비하면 시간이 남는다. 근 두 달 넘는 기간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일정이 대부분 취소 혹은 연기됐다. 출퇴근 없는 프리랜서가 재택근무만 했더니 하루가 정말 터무니없이 길다. 물리적 거리두기를 적극적으로 실천 중이라 불필요한 외출도 외식도 하지 않는다. 모임 약속을 잡지 않고, 식재료는 배달시키고, 도시락을 싸서 집과 작업실을 오간다. 강연이며 세미나 같은 부가 일정도 모두 취소됐다. 수익이 줄어든 만큼 쓰는 돈도 줄어들었다. 움직임을 절약하며 긴 하루로 채워지는 나날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하루가 짧다. 멤버십형 콘텐츠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빠져드는 시리즈물을 만나면 잠을 자길 잊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보고 만다. 집에 머물며 <그리고 베를린에서>라는 독일 미니시리즈와 <구해줘>라는 한국 드라마를 유난히 열심히 봤다. 두툼한 책을 펼치는 마음가짐도 여느 때와 다르다. 다음날 일정이며 컨디션을 신경 쓸 일 없이 실컷 페이지를 넘기다가 내킬 때야 비로소 잠을 청한다. <배움의 발견>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책은 해가 밝은 낮에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덮으니 까만 밤이었다. 하루를 유난히 짧게 만들어준 두 편의 시리즈물과 두 편의 책, 총 네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특수한 공동체에 속했다가 의지를 가지고 그곳에서 탈출하거나 스스로 고립되길 선택한다. 결국엔 자신들의 룰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생존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여성 주인공들이 사회의 억압과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긴 하루를 짧게 만드는 건 결국 이야기였다. 내가 세상에 나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을 때, 다른 이들이 만들어낸 멋진 이야기들을 보거나 읽는 것만으로 삶에 생기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하루가 짧아도 아쉽지 않다.

 

유럽에서 귀국한 친구를 김포공항에서 잠깐 만났다. 노르웨이에선 도무지 마스크를 구할 길이 없는데, 비행기를 타야 하니 궁여지책으로 런던에서 구한 비칠 정도로 얇은 의료용 마스크에 네모로 자른 청소기 필터를 붙이고 등장했다. 노르웨이에서 네덜란드를 경유해 인천에 도착한 다음 경기도 광주에서 머물며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음성이 나왔지만, 이제부턴 2주간 자가격리라 하니 친구를 보자면 이제 2주를 더 기다려야 한다. 전쟁터에서 난민을 구하는 심정으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어설픈 간격 유지 미팅을 하면서 5부제 날짜에 맞춰 구한 내 몫의 공적 마스크만 두 장 건네주고 돌아왔다. 친구가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며 잘 포장된 알코올 솜을 선물해줬다. 본인과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 손을 잘 닦으라는 당부도 더했다. 이 무슨 기묘한 거래인가 싶었다. 평상시라면 초콜릿 같은 달달한 기념품이 손에 들려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더욱 씁쓸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한산했고, 승객들은 모두 안전해 보이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중이었다. 창밖에선 봄바람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마스크 속은 갑갑했다.

 

도무지 미룰 수 없는 전시를 봐야 해서 각오하고 외출했다. 거리는 한산했다. 코로나19 대비 연락처를 확보하는 명부에 개인정보를 작성하고 소독제를 손에 비비며 전시장에 들어갔다. 들르는 전시장마다 아무도 없었다. “새가 노래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예술가는 살아 있는 것 자체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고 한 작가는 말했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건가 싶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다들 잘 지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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