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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세상] 다음 단계 / 손아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17. 04:19

[공감세상] 다음 단계 / 손아람

등록 :2020-04-15 17:16수정 :2020-04-16 09:22

 

손아람 ㅣ 작가

 

감염병 사망자인 아내가 옮긴 바이러스로 남편은 아들마저 잃었다. 그는 절박하게 알고 싶어 한다. 집에 돌아오기 전, 아내가 시카고의 호텔방에서 누구와 머물렀는지. 아들이 죽은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역학조사관은 실의에 빠진 남편 앞에서 끝까지 입을 다물기로 한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든, 아내의 프라이버시라 믿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전세계 800만명의 추정 감염자 가운데 최초의 감염원을 찾아내는 역학조사는 오히려 수월해 보인다. 0번 환자의 동선상에 놓인 마카오의 카지노 호텔 구석구석을 보안 카메라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덕분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을 예언한 영화 <컨테이전>은 시카고의 호텔 장면에서 시작해 마카오의 호텔 장면에서 끝난다. 전자는 암전 속의 기침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공간이고, 후자는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 공간이다. 전염병의 진원이 된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공간에서 프라이버시와 공공적 가치는 우열이 뒤바뀐다. 그 차이는 전염의 규모를 결정할 만큼 커다란 것이 될 수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했던 우한시의 감시 체계는 마카오 카지노의 감시망보다 더 촘촘했다. 봉쇄령이 떨어진 뒤 하늘 위로 감시 드론이 끊임없이 날아다녔다. 주민들은 통행권 없이 시내를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도시 경계에 들어선 바리케이드 뒤를 무장 경찰이 지켜 섰고, 이웃 지역의 주민들은 민병대처럼 전쟁 채비를 갖췄다. 통신사들은 주민 수백만명의 휴대전화 위치정보를 정부에 넘겨 지역 이탈자의 추적에 협조했다. 국경봉쇄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했던 세계보건기구는 중국 정부의 선제적인 대응만은 “전세계가 빚을 졌다”며 추켜세웠다. 누구도 중국 같은 일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바로 그런 나라로 남아 전염병의 방파제가 되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인구 대비 발병률로 바이러스 확산을 틀어막았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치 시험대에 오른 체제의 우월성이 입증된 것처럼 지금 중국 사회는 방역 승리에 심취해 있다. 치러야 했던 가혹한 희생은 더 이상 누구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충분히 돌아보고 있는 걸까?

 

한국은 비교적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위기에 대처해왔다. 정치적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초기부터 적극적인 검진을 시행했던 정부의 결단에는 아낌없이 칭찬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취할 수 있었던 파격적인 조처들이 꼭 독보적인 디지털 기술과 창의성, 혹은 우월한 시민의식에만 힘입어 가능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중국만큼 노골적인 전체주의는 아니더라도, 공공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데 비교적 관대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야말로 방역의 효율성에 크게 일조했다. 한국은 범죄자도 아닌 감염병 확진자, 심지어 의심자의 위치정보까지 정부가 임의로 추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막강한 감염병예방법을 이미 가지고 있던 나라다. 확진자 동선 공개와 종교집단 전수조사 역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공격적인 시도였지만 사회는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자가격리 권고 위반자를 신체부착형 위치 추적 장치로 관리하자는 방안이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논쟁적인 건 문제가 아니다. 논쟁이 아예 성립하지 않을 때부터가 문제다.

 

효과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새로 검증된 사회적 위험 관리 방식은 앞으로도 계속 효과적일 게 틀림없다. 신종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에이즈 감염 의심자, 정신질환자, 반체제 인사,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를 무슬림, 간첩활동이 의심스러운 탈북민을 관리하는 데는 더 큰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마련한 도구로 인간을 겨눌 만큼 우리 사회가 허술하지는 않다고 믿지만, 불과 10년 전 우리가 살인범에게 전자발찌를 채워도 되는지를 두고 논쟁하던 사회에 살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나 한가? 그땐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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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37154.html#csidx5455a097fae858c815b767eee61ee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