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의 말이 살아날 때 사회도 변화할 수 있어요’
등록 :2020-04-05 09:43수정 :2020-04-05 18:06
[토요판] 은유의 연결
반성폭력 활동가 ‘오매’ 김혜정
피해자와 함께 세상을 바꾸어온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미투운동, 안희정 사건 공대위 등
반성폭력 운동에서 배운 것
지원과 도움은 주고 받는 것
안희정 사건, N번방 공대위 등
피해자의 지혜와 경험
반영한 정의가 중요해
N번방 피의자 신상 공개되던 날
공대위, 피해자 지지글 올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3월17일 오전 한겨레신문사에서 은유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한나 같은 지휘자를 꿈꿨다. 여러 악기를 다루고 싶었다. 중학교 때 리코더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것으로 꿈의 부분을 이뤘다. 끓어오르는 기운을 주체 못해 운동장에서 5회 연속 텀블링을 하거나 먹기 대결을 하는 친구들이 있던 ‘여중’ 시절을 지나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특목고로 진학했다. 남녀공학에서 여자아이는 “성격, 외모, 성적 세 가지가 어떤 조합이어도 이상했다”. 웃어도 욕먹고 안 웃어도 나쁜 여론에 놓였다. 혜정의 자아도 여자로 축소됐다. 학교에선 계속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빈부와 성별 격차가 확연히 드러났고 세상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럴수록 삶이 자아내는 질문은 선명해졌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지?1980년생 김혜정. 사범대에 들어간 ‘그때 그 아이’는 교사가 아닌 활동가가 되어 20년 뒤 여성신문사에서 ‘미래의 지도자상(2019)’을 받는다.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운동,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등 “반성폭력 운동 현장에는 늘 ‘오매’가 있다”는 게 선정 이유다. 오매는 그의 닉네임. 오매불망(寤寐不忘)의 오매다. 자나 깨나 그가 추구해온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여자가 오래 말하면 바위가 부서진다”는 아프가니스탄 속담대로 성폭력 사건이 한국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며 민주주의 의제를 새로이 설정하고 있는 이즈음 16년차 페미니스트 활동가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엔(n)번방 성착취 사건이 대중의 공분으로 점화될 무렵인 지난 3월17일,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이하 상담소) 부소장과 마주했다.―요즘 많이 바쁘시죠? 엔번방 성착취 사건 관련해 단체 성명서가 바로 나오던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와요?“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 회의는 1월부터 했어요. 피해자 상담이랑 모니터링은 지난해 11월부터 했고요. 3월에 변호인단을 구성해 계속 움직였죠.”―갑자기 생긴 사건이 아니라 알려진 게 최근인 거네요.“작년 7월부터 잠입해 신고하고 취재한 여자 대학생들이 있었고, 인터넷 페미니스트들이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며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국회에 입법 청원도 넣고 널리 알렸어요. 근데 소라넷을 폐지하고 웹하드 카르텔 잡고 하니까 범죄 근거지를 계속 옮겨 가고 더 악랄해지잖아요. 엔번방은 여성 청소년들이 올리는 트위터 계정에 접근해서 ‘니네 가족이나 학교에 알릴 거’라고 협박하며 성적인 제안을 온라인에서 하고 그것을 빌미 삼아 범행을 시작하는 방식이거든요.”―여성의 성이 약점이 되는 사회라서 가능한 범죄 같아요.“네. 알려지면 결국은 피해자만 사회적인 자원이 끊기고 매장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용기를 내어 신고하지 못하죠. 온라인 성폭력, 불법촬영, 엔번방…. 디지털 범죄와 안희정 사건도 사실은 성적인 일에 연루된 게 여자에게 위협이 되니까 일어난 일이고 다 연결돼 있어요.”
____________닮고 배우고 싶은 사람 있어 선택―
처음에 여성운동에 어떻게 관심을 가졌어요?“대학에서 남자 선배들이 여자 동기들의 외모, 성격, 몸매에 대해 순위를 매긴 게 과방에서 발견됐어요.”―요즘으로 치면 단톡방이군요.“그게 쪽지로 있었죠. 그 사건은 공론화 못 됐지만, 비슷한 사건들이 각 동아리, 과에서 대자보로 붙는 거예요. 여러 입장을 살피며 내 의견을 형성할 수 있었죠. 학내에서 가장 여성주의적이었던 언니들의 의견, 말투, 태도, 눈빛이나 일하는 방식이 제일 멋있었어요. 기운차고 씩씩하고 서로 협력하고 함께 용기를 내는 느낌. 저 사람들 옆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대학교에 들어간 1999년 무렵엔 반성폭력 학칙 제정이 화두였다. 그는 여성주의자 선배들이 하는 서명운동, 토론회에 참여하고 학내 반성폭력 운동을 지원하는 외부 단체 특강을 들었다. 그때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의 강의를 통해 직업으로서 활동가의 존재를 접했다. 2003년 상담소에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인연의 첫발을 디뎠다.―상담소에 자원봉사를 나간 계기가 있어요?“이 일이 이미 너무 끌려서요. 일주일에 한번씩 4시간 동안 자원활동을 했어요. 친구들은 임용고시 공부를 시작하는데 저는 그게 전혀 흥미가 없었고요.”―교사보다 활동가가 훨씬 박봉인데 돈은 안 중요했어요?“진짜 안 중요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 돈이 없어서 애들이랑 같이 롯데리아에 가도 나는 마음대로 못 먹는 순간이 많았고요. 고등학교 끝나자마자 알바해서 번 돈으로 먼저 배낭을 사서 여행을 갔어요. 적은 돈으로 제일 하고 싶은 걸 했죠.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사는 데 돈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주의예요?“돈이 적은 것이 더 좋다는 게 아니라, 돈을 위해서 내가 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진 않는다는 거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1번이에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오른쪽 둘째)이 3월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텔레그램 성폭력 해결 요구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____________반성폭력 운동, 내 몸이 바뀌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1년 설립된 단체로 성폭력 피해 생존자 상담뿐 아니라 의료·법률 지원을 하고 자조모임과 보호시설을 운영한다. 29년 동안 약 8만5천건의 성폭력 상담이 이뤄졌다. 2003년부터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들어라 세상아 나는 말한다’를 해마다 개최해 미투운동의 오랜 토양을 다졌다.―여성운동 단체 중에서도 성폭력 대응으로 특화된 곳으로 갔어요.“포인트가 두가지예요. 반성폭력은 일상의 권력을 감지하고 다른 약속과 대체 행동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법으로 소수의 가해자를 처단하면 되는 게 아니라, 성폭력에 대해 굉장히 무심하고 이것을 허용해온 일상을 바꿔내는 운동이죠. 또 하나는 여자는 몸도 목소리도 작아야 하고 힘도 덜 써야 한다는 ‘여성다움’이란 성역할이 성폭력에 더 취약한 몸을 선망하게 했어요. 그것을 바꾸는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때 그 팀에 제가 자원활동가로 들어갔죠.”―요즘 논의되는 내용들인데 ‘신문물’을 일찍 접하셨네요.“그렇죠. 반성폭력 운동을 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체험을 했고요. 전 너무 좋았어요.”―가령 뭐가 바뀌었나요?“내 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누군가를 대할 때 내 눈빛, 표정, 말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됐고 내가 맞서고 싶은 것에 대항해 버티는 힘이 생기면서 자유로워지고 행동반경이 넓어졌어요. 사람들이 성폭력상담소에 있으면 되게 힘들고 피폐하고 괴롭지 않냐고 물어봐요. 무겁고 어둡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거기에 압도되고 짓눌리는 게 아니라 사건을 대응해보고 시간을 버텨보며 깊이가 생기죠. 상담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배우지 못했을 것 같아요.”
____________위험 키워온 이들이 나눠야 할 책임
“작년 이날 밤 활동가가 건넨 따뜻한 한마디. ‘잘하셨어요.’ 칭찬이 섞인 위로는 처음이었다.”(215쪽) “피해자 혼자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은 활동가가 도와주었다.”(323쪽) 얼마 전 발간된 <김지은입니다>에는 ‘활동가’ 얘기가 군데군데 나온다.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 방송을 마친 뒤 김지은씨의 안전한 거처를 마련해준 이도, 김지은씨에게 처음으로 괜찮다고 말해준 활동가도 그다. 그날 밤 상담소를 포함한 3개 여성단체와 변호사 4명으로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꾸려졌고 김혜정 부소장도 참여했다.―이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는데, 부소장님은 어땠어요?“상담소에 있다 보면 유명인이 가해자인 사건도 많아요. 어떤 사건이든 사건에 맞춰 대응이 필요한데, 성폭력이 일어난 업계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스포츠 국가대표팀에서나 군대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감춰지는지, 은폐되는 구조를 알아야 하거든요. 안희정 사건은 정치권 중에서도 지방자치단체라는 공공기관에서 발생한 일이고, 유력 대권 후보였던 정치인이 저지른 일이고요. 수행비서 업무의 특수성, 이런 것들을 파악하면서 그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 알아가야 했죠. 동시에 가해자의 위세가 2차 피해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대응해야 했고요.”―554일(2018년 3월5일부터 2019년 9월9일까지). 싸움이 꽤 길었어요. 가장 힘든 점은 뭐였나요?“피해자에 대한 인상, 평판, 기준들이 있어요. ‘문제 없는 여성’의 기준이 좁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해요. 대부분 가해자들이 쓰는 전략이죠. 성폭력은 문제지만 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고 이 사건은 다르다 주장하면서 그걸 찾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죠.”―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인데요.“그렇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기존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피해자 책임론,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의 2차 피해를 만들어서 최대한, 유례없이, 최고조로 활용했어요. 통계를 보면 미투에서 불륜으로 키워드가 넘어가는 지점이 있어요.”―언론이 가세해서 여론을 몰아갔죠.“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무죄를 주장하는 데에는 그 사람이 평상시 힘을 발휘했던 조직, 구조 자체가 다 움직인다고 보면 돼요. 사람들은 먹고사는 게 그렇지 뭐, 라며 ‘네가 고발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밥줄이 끊겼다’는 식으로 말해요. 미투에서 피해자들이 항상 듣는 말이죠. 네가 그 코치를 고발해서, 너로 인해 우리 팀 전체가, 네가 우리 감독을 고발해서 우리 연극 팀 전체가, 이런 식으로요.”―너 때문에 밥줄 끊겼다는 말에 뭐라고 반론해야 할까요?“생각을 좀 해볼게요. (잠시 침묵) 저는, 더 큰 위험을 막은 거다. 또 이제까지 이 위험에 대한 신호들이 있었을 텐데 그걸 그냥 키워온 사람들이 나눠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해요.”―사실 폭력과 착취를 묵인하고 유지되는 직장이 더 문제잖아요.“그렇죠. 구글 같은 회사에서도 ‘나를 가해에 가담시키지 말라’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만약에 우리 회사 임직원들이 내가 모르게 성폭력을 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면 조직에 소속된 나도 가해에 가담시키는 것이라고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피해자들이 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겪은 일을 겪었다고 끝까지 말하도록 주변에서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____________“겪은 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장 상처 입기 쉬운 상태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일은 또한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을 부여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시인 오드리 로드는 말했다. “상처와 힘은 같은 원천”임을 시인 에이드리엔 리치도 노래했다. 흔히 성폭력 피해를 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 운운하며 피해자를 무력화하지만, 그 상처는 때로 한 개인을 세상에 눈뜨게 하고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드러내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 맥락에서 안희정 사건은 페미니즘이 어떻게 사회 정의와 연결되는지 증명했다.―안희정 사건 1심의 무죄 판결을 유죄로 바꿔낸 힘이 뭐였을까요?“이 사건을 응원해준 사람들이 진짜 많아요. 공판 때 여성 기자들 중 눈물을 훔치면서 타이핑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자신이 누구의 경험과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거죠. 상사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은 직무인데, 직무라는 이유로 상사가 어떤 요청을 하고, 비밀 유지를 하게 하고 그걸 빌미 삼아 어떤 제안을 했을 때, 그걸 끊고 내 직업을 포기하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다, 이걸 경험한 사람이 많은 거죠. 결정적으로는 검찰의 수사 과정이나 세번의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구체적인 경험들이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에 유죄 판결이 났고요.”―공대위 활동가로서는 재판에 이기기 위해 무엇에 가장 주력했나요?“자기가 겪은 일은 정말 겪은 거잖아요. 오랫동안 성폭력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회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여요. 별일 아냐, 그런 일은 없었어, 힘들어 하지 마. 그러다가 이 일은 부당하고 처벌해야 하는 거구나 판단하죠. 수없이 진술하고 공격에 맞서서 끝까지 말하는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죠.”―그걸 말하도록 돕는 거네요?“중간에 좌절하지 않고 겪은 일을 겪었다고 끝까지 말하도록 주변에서 진짜 많은 이들이 도와야 해요.”
____________우리 힘으로 만들어내는 건강함
서른 즈음, 그는 상담소를 떠났다. 20대부터 “너무 달려서” 소진된 탓이다. 주변에서는 다른 직업을 권했다. 성장기부터 그에게 지적, 정서적 양분을 공급해준 두살 터울 언니는 의견이 달랐다. 활동가 한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어가는데 지금 멈추는 것은 손실이므로 계속해보라고 독려했다. 그는 지역 풀뿌리운동을 배우고자 2011년부터 ‘살림 의료생활협동조합’과 ‘은평구 청소년 문화의집’에서 일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료들이 얼마나 많은 실무를 하는지 아니까 괴로워서” 상담소로 돌아왔다. 직함도 마음가짐도 이전과 달라졌다. 이젠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어느 시인의 마음처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고,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며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김수영 ‘봄밤’)을 지나는 중이다.―부소장님이 이번 인터뷰에 응하면서 ‘생존자와 활동가가 같이 일궈온 반성폭력 운동’이 개인의 공로가 될까 봐 우려했어요. 피해자는 운동 주체라기보다 무력한 존재라는 인식이 일반적인데요.“그렇죠. 피해자가 신고할 때는 힘이 생겼을 때예요. 성폭력 생존자들이 이 사회를 바꿔온 힘이 있는데 그걸 우리가 무시하거나 없던 걸로 만들어요. 한 개인이 자기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건 사회운동이고, 활동가는 그 길에 전문적인 정보를 주는 조력자예요. 상담가, 치료자가 아니라 기존의 법과 제도를 바꾸고 예산을 확보하고 인식을 바꾸고, 그런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활동가라고 불러요.”―활동가가 왜 좋은 직업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우리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게 주는 엄청난 건강함이 있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돼요.”―지난 16년을 돌이켜보면 오매는 어떻게 변했나요?“제가 어릴 때부터 잘 안 아팠어요. 체력이라는 기본 요소가 있어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상담소에 있지 않았다면, ‘능력 담론’ 있잖아요, 뭐든지 사회구조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거 아니야?’란 생각을 믿으며 살았을 것 같아요. 내 개인이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남들한테 배우는 게 좋아요. 단체에서 만든 티셔츠를 싫어했는데 이젠 좋아지더라고요.(웃음) 새록새록 그들이 보냈던 시간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요.”나 중심에서 관계 속의 나로 달라진 일상. 그건 내 삶에 존재하는 타인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구분하고 조화로운 화음으로 연주하는 자기 삶의 지휘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코로나19로 불발됐지만 그는 5월 초 동료들과 지리산에 오를 예정이었다. 지금껏 총 여섯번을 오른 산. 등반의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는 안 가리 다짐하지만 또 가보고 싶어지는 곳.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별빛, 운해, 일출, 일몰…. 가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경관을 젊은 여성주의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그가 수많은 ‘김지은들’과 축적한 활동가의 시간도 지리산의 여정과 같을 것이다. 그 만만찮은 과정에서 삶이 내어주는 놀랄 만한 장면들을 그는 더 많은 이들과 경험하기를 원한다. 엔번방 사건 피의자 신상이 공개된 날, 오매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공대위 안내 글을 올렸다.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발생했더라도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상담소와 활동가들은 언제든 당신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녹취 홍혜원____________‘오매’ 김혜정을 만든 시간들
‘1980년 엄마와 함께’ 3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와 남동생보다 더 엄마랑 친해지고 싶었다.
‘1994년 여중생 시절’ 여중에는 에너지, 식욕, 흥, 비밀 고민, 사랑과 우정, 사건이 넘쳤다.
‘2004년 자기방어훈련’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아닌 여성단체 활동가로 10대 여성들과 만났다.
‘2006년 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들과’ 물 새던 방에서도 모임은 신났다. 10년 뒤 후원을 받아 방수되는 공간을 지었다.
‘2011년 은평 마을활동’ 여성주의자들과 지역주민이 만든 살림의료협동조합. 은평은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 고향이다.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펴냈다. 2005년부터 여러 매체에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성폭력 피해 여성,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산재 노동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고 기록했다.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모으고 나누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은유의 연결’은 4주에 1번 연재.
- ‘피해자의 말이 살아날 때 사회도 변화할 수 있어요’
- 법조인 꿈꾸던 용현, ‘요한’으로 싸우고 ‘씨돌’로 꽃피다
- 스무살에 아빠의 보호자 됐지만, 나는 효자가 아닌 시민이다
- “묻지마 범죄 표현부터 잘못” 국립 정신건강센터장의 정곡
- “‘내가 0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해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35638.html#csidx0d45ef91176e883a27aba4b1211e4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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