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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이제는 책임 회피를 멈출 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4. 25. 04:42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이제는 책임 회피를 멈출 때

등록 :2020-04-23 18:18수정 :2020-04-24 02:37

 

김혜진 ㅣ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질병관리본부 1339콜센터 업무도 분담한다. 좁은 공간에서 쉬지 않고 전화를 받아야 하니 이들도 감염병이 두렵다. 격일 출근으로 물리적 거리두기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면 통화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가입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테니 꿈도 꾸기 어렵다.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기를 소망한다. 아프면 쉴 수 있기를, 일하는 공간이 조금 더 넓어지기를, 한 사람이 빠지면 다른 동료가 숨 돌릴 틈 없이 전화를 받아야 하기에 연차도 쓰기 어려웠던 현실이 조금은 바뀌기를 바란다.

 

이 작은 변화를 위해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협의를 요청했다. 이들은 정규직이 아니라 위탁업체 소속이다. 그렇지만 노동조건 개선의 권한은 원청인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있다.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서도 원청이 하청노동자의 안전에 책임이 있다고 명시한다. 정부가 내놓은 ‘민간위탁 가이드라인’도 원청과 위탁업체가 노동자의 의견을 수렴하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위탁업체, 그리고 고객센터 노조가 3자 협의회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공단은 이 제안에 대해 ‘협력사와 사전 협의 없이 공단으로의 직접 요구는 지양하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 답변을 보며 ‘공공기관의 책임’에 대해 생각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헌장’에는 “우리는 국민 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을 위하여 고객중심 경영을 실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객헌장 밑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하면 “함께하는 건강보험 상담사 아무개입니다”라는 인사말이 먼저 들려온다. 가입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전화를 해서 상담을 받았는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상담사에 대해 고용계약상 책임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객중심 경영을 실천하는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얼마 전 만난 상담사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건강보험은 강제보험이기에 체납을 하면 압류에 들어간다. 보험료가 체납된 가입자가 전화를 하면, 사정을 살피고 방안을 찾아야 하니 통화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콜수가 줄어들고 무능한 상담사가 되어 다음달 월급이 깎인다. 그러니 긴 상담을 필요로 하는 가입자를 만날 때마다 ‘월급’과 ‘공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한다. 제대로 성실하게 상담을 하면 무능한 상담사가 되는 이 우스운 구조, 하루 평균 160콜, 한 회 통화시간 2분30초라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의 시스템을 바꾸어야 노동자도 건강하게 일하고 고객중심성도 실현할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런 변화를 만드는 데 책임이 없는가.

 

콜센터를 위탁한 업체들은 전문업체라고 한다. 그런데 콜센터 위탁업체의 전문성이란 콜 시간을 더 ‘타이트’하게 만들고, 화장실 가는 것을 통제하고 성과급제로 경쟁 시스템을 만드는 전문성이다. 건강보험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가입자가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성은 위탁업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있다. 그러니 위탁업체는 계속 바뀌어도 노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다. 위탁업체는 인원을 늘리거나 공간을 넓힐 권한도 없고, 코로나19 예방책도 독립적으로 세우지 못한다. 이 위탁업체와 무엇을 논의해서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국민건강보험공단만의 문제는 아니다. 원청기업의 공동사용자 책임을 명시한 문재인 정부의 공약은 사라졌다. 원청기업이 하청노조와 교섭하도록 하는 노조법 2조 개정안도 국회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하청노동자들은 대책을 요구할 권리조차 갖지 못했다.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으니 고용계약의 형식을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그만두면 좋겠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고객센터 노동자들과의 교섭에 나서달라. 국회는 노조법 2조 개정을 서둘러달라. 코로나19의 위기를 겪으며 일터가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바라는 하청노동자들의 소망에 정부와 국회가 책임감 있게 답하기를 바란다.

 

연재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1775.html#csidx7b21276859528d4a1e7f6fb65869a0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