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 책과 생각; 건강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았어! [정혜윤·정여울·박상영·한미화의 ‘나를 키운 책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2. 06:20

네가 있어 외롭지 않았어!

등록 :2020-05-01 06:01수정 :2020-05-01 09:41

 

이 시대 글쟁이들은 어떤 글을 먹고 자랐을까요
정혜윤·정여울·박상영·한미화의 ‘나를 키운 책들’

 

일러스트 백승영

 

 

가슴을 찌릿하게 한 로보의 울부짖음

 

언제나 우리 엄마의 롤모델은 신사임당이었다. 듣자 하니 신사임당의 아들은 이율곡이란 유명한 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이율곡 정도는 책을 읽어야 효도하는 줄로 알고 살았다. 나는 효도하고 싶었고 책을 읽었고 그때마다 편애와 간식을 듬뿍 받았고 그것을 즐겼다. 그런 영악한 나조차도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완벽하게 빠져든 책들이 있었다. 그때는 저녁밥도 잠도 싫고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귀찮았다. 호기심에 불타올라 간식과 놀자는 유혹에 눈길도 주지 않던 날들은 어른이 된 후 떠올려봐도 광채 속에 반짝거린다.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잃어버린 세계> <올리버 트위스트> <시튼 동물기>를 좋아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 던졌던 질문들은 지금도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사악한 하이드는 더 자유와 힘을 느끼면서도 왜 한사코 사악하지 않은 지킬로 돌아가려고 했는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잃어버린 세계) 올리버 트위스트가 없어도 어린아이들에게 천국이 있을 수 있을까? (올리버 트위스트) 이 중 요새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시튼 동물기>의 전설적인 늑대왕 로보다. 로보는 새하얀 털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암늑대 블랑카가 붙잡힌 뒤 덫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다. 내가 어렸을 때 로보가 울부짖는 장면을 시튼이 몇 번 썼는지 세어 본 적이 있다. 한 번씩 셀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죽어가는 늑대의 울부짖음에서 나는 인간의 말과는 다른 말을 분명히 들었다. 이 사실은 내 몸이 기억한다. 로보를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 좋은 책은 절대 머리만 쓰게 하지 않는다. 몸의 한 부분을, 가슴 안쪽 어딘가를 찌릿찌릿하거나 짜릿짜릿하게 만든다.정혜윤 시비에스(CBS) 라디오 피디

정혜윤 피디

 

 

 

백번을 읽었던 처절한 고아의 서사

 

어린 시절 나는 종이로 된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종이책, 종이접기, 신문지, 잡지, 피아노 악보, 전단지, 심지어 기차표나 버스표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한 건 단연 종이책이었다. 나는 각종 문고판 동화책들과 어른들의 잡지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아이들은 보면 안된다’고 경고를 받은 어른들의 잡지도 그냥 봤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었는데,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이해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100번쯤 읽은 동화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 고아 소년이 보육원을 탈출하여 더 깊이, 더 처절하게 고아가 되어보는 내용이었는데, 그 이야기가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라스무스는 삶의 안식처를 발견하지만, 그 방랑의 여정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쫄깃한 모험의 시간들이 더욱 아름다웠다. 그 책을 통해 나는 독립의 꿈과 방황할 권리, 역마살의 아름다움까지 몸소 체득한 것 같다. 지금도 내 마음의 세포 어딘가에는 고아 소년 라스무스의 뼈저린 외로움과 대책없는 방랑자 오스카를 향한 설렘이 남아 있다. 그 책은 여전히 내 귓가에 속삭인다. 마음 놓고 방황해도 괜찮다고. 목적없이 모험을 떠나도 괜찮다고. 사랑과 희망이 남아 있는 모든 곳은, 아무리 초라한 곳이라도 나의 든든한 집이 될 수 있다고. 내 어린 시절 풍요로운 감수성의 보물창고가 되어준 <작은 아씨들>, 온 마음을 다하여 편지쓰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키다리 아저씨>도 기억에 남는다.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내 인생 첫 독서목록, 케이 누나의 책장

 

어릴 적, 나에게 처음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 책은 동화가 아닌 추리소설들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 아버지의 오랜 친구가 살고 계셨다.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던 그 집의 막내딸, 케이(K)누나는 대단한 독서가여서 방안 벽면 하나를 차지할 만큼 큰 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꽂힌 책들이 내 인생 첫 번째 독서 목록이 되어주었다. 때문에 나는 또래들보다 다소 조숙한 취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책이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었다. 빨간색 장정에 손바닥만 하던 그 책의 물성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80권이 넘는 시리즈들 중 나는 <비뚤어진 집>이라는 책을 가장 좋아했었다. 내 또래의 어린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뒤이어 빠져들었던 책은 청소년용으로 나온 ‘세계 문학 전집’이었는데. 역시나 K누나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100권 가까이 되는 작품들 중 나는 <작은 아씨들><키다리 아저씨>, <몬테크리스토 백작><수레바퀴 아래서> 등을 여러 번 읽었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록을 보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의 계통 없음(?)이 조금은 설명되는 것 같다. 박상영 소설가

박상영 소설가

 

 

비밀이 생길 무렵 책이 내게로 왔다

 

어릴 때 전집으로 된 위인전기를 주로 읽고 자랐다. 한데 그 책보다 우연히 만난 책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때 교실 뒤편 학급문고를 어슬렁거리다 책을 한 권 만났다. 앞장이 너덜너덜한 낡은 책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정신없이 읽었다. 모든 걸 잊고 몰입할 만큼 ‘책이 재미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셜록 홈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스커빌가의 개>라는 탐정소설이었다. 그 책이 계림문고 중 한 권이었다는 것도 얼마 전 알았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글에 일론 비클란드가 그림을 그린 <로타와 자전거>라는 컬러 그림책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있다. 비클란드의 북유럽풍 그림은 지방 소도시에 살던 어린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이국의 풍경이었다. 지금 이곳이 아닌 낯선 곳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고 이 책을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 읽은 <데미안>도 생각난다. 읽기는 했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깊이 이 책을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책을 읽는 아이라는 걸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먼 곳에 대한 동경이 생길 무렵 이 책들이 내게로 왔다. 책을 통해 머나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거나 위안을 받고 혹은 잘난 척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눈치챘던 것 같다.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작가들을 키운 책들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고아 소년 라스무스가 보육원에서 쫓겨나면서 펼쳐지는 방랑기. <작은 아씨들>(루이자 메이 올컷) 성격도 생김새도 다른 네 자녀의 성장기. <키다리 아저씨>(진 웹스터) 보육원에서 자라던 주디가 매달 한번 익명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비뚤어진 집>(애거사 크리스티) 살해된 영국 부호, 범인은 가족 중에 있다! 유일하게 범인을 아는 아이마저 위험에 빠지고 마는데….<몬테크리스토 백작>(알렉상드르 뒤마) 결혼을 앞두고 누명을 쓴 채 감옥에 수감된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극.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감수성 예민한 소년 한스가 억압적 교육 제도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는 모습을 그려낸 헤세의 자전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선량한 의사 지킬은 무미건조한 학문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약물을 발명, 하이드로 변해 악행을 저지르는데….<잃어버린 세계>(아서 코난 도일) 기자 말론이 ‘아마존에 선사 시대 생물이 산다’고 주장하는 교수 챌린저를 만나 탐사를 떠난 뒤 벌어지는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대, 학대를 견디다 못한 올리버는 구빈원을 탈출해 살벌한 세상을 마주한다. <시튼 동물기>(어니스트 톰슨 시튼) 생의 절반을 로키 산맥 천막에서 보내며 야생동물을 관찰했던 작가가 쓴 동물문학. <배스커빌가의 개>(아서 코난 도일) 부호 찰스 배스커빌이 갑작스레 죽고, 그의 시신 근처에는 커다란 개 발자국이 발견되는데….<난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언니, 오빠가 하는 일은 뭐든 따라하는 막내 로타, 세발자전거가 아닌 진짜 자전거가 갖고 싶다! <데미안>(헤르만 헤세)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 ‘선의 세계’만 알던 열 살 싱클레어, 우연히 어두운 세계를 알게 되고 괴로워하다 데미안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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