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속의 인생-소설,1974년
은혜 추천 0 조회 84 20.01.09 11: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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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의 인생 오승재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테니스장에는 두 쌍의 남녀 학생이 난타(랠리)를 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체육 시간이었다. 이 작은 대학에서는 체육 시간에는 한 학년 학생들 천체가 같은 시간에 체육 교사의 지시에 따라 체육을 했고 이날에는 테니스, 배구, 농구 등 흩어져서 연습하고 있었다.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간 나는 허공에 대고 발리, 스매시, 포워드, 레프트워드 스윙 등으로 얼마 동안 몸풀기를 한 뒤 학우들이 흩어져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철우가 상대하고 있는 여학생은 별로 보지 못했던 작고 귀엽고 깜찍한 애였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여학생이 몇이나 있었던가?) 삼 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알 수 있는 얼굴들은 흔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공은 높은 타점에서 치고 있어서 깡똥한 원피스를 입고, 마치 스케이팅 왈츠라도 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끔 엉뚱한 곳에 공을 쳐 던지고 괴성을 올리며 라켓을 가슴 앞으로 몰아 쥐며 동동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녀는 테니스 연습생으로서의 매력보다는 상대방 남자에게 여자가 얼마나 가냘프며 도와주고 싶은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매력이 강했다. 그러나 철우는 공 심부름하는데 퍽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나와 한 반인 철우 옆으로 다가갔다. “교대 좀 할까?” 그는 잘 되었다는 듯이 선선히 물러섰다. 그녀는 공을 치려다가 상대방이 바뀐 것을 보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씽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했다. 마치 이 정도의 예의는 알고 있다는 듯이. “전 잘 못 쳐요.” “네 일고 있습니다.” 나는 준비 태세를 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급작스럽게 공이 날아왔다. 백스윙으로 좀 높이 띄워주어야 할 것인데 워낙 급작스러운 공이었기 때문에 깊게 깎인 공이 되어 공은 땅에 닿자마자 수직으로 낮게 뜨고 그녀는 허공을 치고 앞으로 뒤뚱거렸다. “잘 좀 쳐요. 엉터리 코친가 봐요.” 네트 앞까지 헐레벌떡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 “미안합니다.” 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초년생이기 때문에 치기 쉬운 공을 띄워주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제멋대로 치기 때문에 난타로 연속해서 그녀를 기쁘게 하려면 나는 온 테니스장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지치는 줄을 별로 몰랐다. 나는 그녀가 지쳐서 네트에 공을 처박고 포만 상태의 만족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런 표정을 보였던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짜증이 나서 물러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기 싫어하는 아가씨였다. 그런데 그녀는 드디어 양팔을 쭉 늘어뜨리고 허덕거렸다. “피곤해요. 그만 쳐요.” 나는 흩어진 그녀의 공을 주워 모아 곁으로 갔다. 아무래도 하드는 여자에게 힘에 겨운 운동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대학은 외국인이 경영하는 곳이어서 일찍부터 하드 테니스가 유행했다. 나란히 소프트인 정구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양다리를 쭉 뻗고 벌겋게 닳아 오른 얼굴로 펜스에 기대어 풀밭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선 것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나는 거기까지 가는 동안도 그녀가 너무 힘들게 공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립을 잡는 자세, 포워드 스윙의 자세, 그리고 라켓이 공에 닿는 타격중심점 등을 잘 지적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뻐근히 지쳐 있는 그녀를 보자 곧 이 생각을 버렸다. 오히려 측은하다는 착잡한 감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다시 쌩긋 웃었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햇빛에 섬광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일어서 치마를 잡아당겨 무릎을 가리더니 “고마워요. 잘 쳤어요.”라고 재빠르게 지껄였다. 나는 공을 담아 그녀에게 건네며 “개인지도비 안 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허리춤을 두들겨 보이며 “십 원짜리가 없네요.”라고 애교 있게 말했다. “커피 한 잔이면 되는데요. 여섯 시에 금문교에서.” 나도 재빠르게 말했다. 그녀는 들을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펜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 철우와 지칠 때까지 난타를 했다. 이날은 참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다.
정각 여섯 시에 다방 ‘금문교’로 나갔다. 그녀가 꼭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시내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일찍 들렸을 뿐이었다. 엽차로 마른 입을 축이고 의자의 등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아홉 시까지 아르바이트, 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 학교 공부를 하고 나면 다음 날 일과가 바쁜 고된 고학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된 일과를 나는 좋아하였다.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사랑에 굶주려 있어서 이 갈증을 자제할 외적인 제제가 내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눈을 뜨자 그녀가 어느새 저쪽 구석 빈 탁자 앞에 와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초록색 방울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부드러운 긴 머리칼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미소하며 벌떡 일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하고 있었다.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누굴 기다리시나요?” 나는 짓궂게 물었다. “그래요.” “그분이 오시기까지 잠깐 앉아도 됩니까?” “좋도록 하세요.”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러나 그분이 아니에요. 얌체 남학생이니까 그놈이지요.” 나는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 오후에 같이 공을 치던 놈 말이죠? 그놈도 금문교에서 새침데기 여학생을 만나야 한다고 분주하게 하교하던데요.” 내가 그녀의 표정을 살파며 말하자 그녀는 씩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치열이 더욱 고왔다. “그놈, 잘 아세요?” 장난기 있는 물음이었다. “그럼요. 생사를 같이하는 놈입니다.” “좀 잘난 체하는 데가 있죠? 관상은 궁상인데.” 그녀는 재빠르게 내 표정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는 따끔했으나 곧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소리 없이 말처럼 웃었다.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허세일 테지요. 난 그 녀석이 우리 학교에서는 허세가 가장 강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놈은 자기보다 한 수 더 뜨는 새침데기 여학생을 만났답니다.” “입심 좋군요.” 그녀는 손들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하고 차 드시지요. 커피 들래요?” 나는 고개를 까땍 꺼렸다. “화났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말했다. 나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객관화해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하자면 나 자신의 생활에 액자를 둘러 현실로부터 붕 띄워보는 겁나다, 액자 속의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거든요. 또 덤으로 날개가 붙어 천사의 옷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감미로운 설득력을 갖고 계시네요. 국문학 전공이세요?” “천만에. 화학입니다.” “그렇다면.” “주재 넘는다는 이야기죠?” “아니에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 부정했다. 이때 커피가 운반되었다. 나는 크림을 치는 것을 거절하고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꿀꺽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러나 입안에 가득 찬 커피는 너무 뜨거운 것이었다. 한순간 뱉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꿀꺽 마셔버렸다. 뜨거운 불덩이가 목줄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확 치솟았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잔을 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황해서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약간 입술을 대보는 정도로 다시 잔을 놓았다. 입안이 화끈거려 찬물을 머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잔을 들고 자기도 꿀꺽 한 모금 들이마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랐지만 못 본 체하고 있었다. “미술의 감상에도 그런 이론이 적용되나 봐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계속했다. “미슬 작품은 화포와 색채라는 가시적 질료로 구성되었거든요. 그런데 이차원 평면에 그려진 이 그림은 관조자가 처해 있는 현실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상의 공간으로 관조자를 유인하고 이 격리된 현상의 공간은 투명해 지면서 다시 환상, 거리, 배합, 온도, 색채, 운동 등 특수한 미의 진수를 보게 한대요. 따라서 그림에서도 액자는 실제와 현상을 격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니에요?” 나는 황홀하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술 전공입니까?” “아니에요. 영문학이에요. 저도 당돌하지요?” 그 말은 여간 애교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황홀했습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곧 아르바이트를 나갈 시간이었다. “과학도답게 시간이 아까운가 보지요?” 그녀는 눈치 빠르게 말했다. “뭐 개인지도비를 받았으면 이제 물러나야 하잖아요?” 다방 문을 나오자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입천장에서 벗겨져 나오는 하얀 피막을 뱉어내며 잰걸음으로 아르바이트 장소를 향해 걸었다. 그녀도 분명 며칠간은 입맛을 잃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뒤로도 그녀와 가끔 테니스도 하고 차도 마셨다. 그러나 그녀에게 빠져들지 않았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나는 나 나름대로 여자를 사귀는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한 여자만 사귈 것. 여자에게 절대로 치근덕거리지 말 것, 싫어지면 여자 편에서 언제든지 결별을 선언할 수 있도록 상황과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 이런 원칙이었다. 나는 이 소극적인 원칙을 고수할 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외톨이 고아였고 따라서 누구도 나를 진실로 사랑해 주리라고는 믿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헤어질 때 상처는 내 몫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다만 나는 한동안이라도 외롭지 않고 사랑받는 환상을 보장받고 싶었다. 나는 그녀 집에 전화했다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혼이 난 꿈을 꾸었고 그녀에게 치근거리다가 뺨을 얻어맞은 꿈도 꾸었다. 또 어떨 때는 그녀를 껴안고 마구 우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했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고는 한 번도 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는 운동장이건 도서관 열람실이건 마구 헤매다가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되돌리곤 했다.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에는 눈에 보이게 겨울이 다가서곤 하더니 학기 말 시험을 두 주일 남겨놓고 첫눈이 내렸다. “첫눈 턱. 첫눈 턱 내요.” 나는 그녀를 만나자 달려가 헐레벌떡거리며 말했다. 이날은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첫눈 턱이 어딨어요?” 그녀는 눈을 흘기며 그렇게 말했으나 결국 저녁을 샀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집어치웠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을 마치자 다방에 앉아 있었다. “내 생일도 겨울이었으면 좋을 뻔했어.” 그녀가 감상적으로 말했다. “언제가 제일 좋지요? 내 생일을 그날로 하게요.” 그녀는 웃었다. “어머. 생일을 마음대로 정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아무러면 어때요. 신고 나름인데.” “생일 생시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데.” 그러다가 그녀는 어깨를 움찔하며 웃었다. “설마 미신이겠지.” 그녀는 싱글싱글 웃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는요. 사주 관상을 보는 사람이 왔다 하면 빼놓지 않고 가요.” 그녀는 또 혼자서 웃었다. 나는 그녀가 좀 얄미웠다. 천국에서 잠을 자고 지상에 내려와서 그곳 생활을 행복하게 회상하는 꿈 꾸는 천사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족 전체의 사주를 보는 건데요, 아무도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춘향전을 여러 번 듣는 것보다는 훨씬 변화가 있어 즐거워요.” 어머니 주변에 가족들이 두리두리 앉아 과거를 다시 한번 되씹어보고 관상쟁이가 예견한 미래를 눈을 반짝이며 흥미진진하게 듣고 공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행복한 가정을 그려보며 나는 눈 내리는 안방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소년처럼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는 엄마하고 시장에 갔는데요, 저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 남자를 붙들어 왔어요.” “왜?” “글쎄 집에까지 데려오더니 엄마 왈 ‘아저씨 관상을 보니 관상을 보게 생겼는데 관상 좀 안 봐 줄래요?’ 그러잖아요. 그 사람은 정말 관상을 봤어요.” 그녀는 꿈꾸듯이 말했다. 나는 막 웃었다. 그날 밤 그녀는 여느 때보다 유쾌했기 때문에 나도 이유 없이 유쾌했다. “큰 오빠 생일날이었어요. 그때 엄마는 시장에서 어린 자라를 열 마리나 사 왔어요.” “자리를 한 마리씩 먹으려고요?” 그녀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아이 무식해. 요리가 아니고요.”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라 등에 우리 각자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띄워주면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법석을 떨며 페인트로 등에 각자의 이름을 써서 물에 담가놓고 잤는데 다음날 깨고 보니 다 어디로 가고 없었었다는 이야기였다. “글쎄 그렇게 오래 살고 싶었나요?” “나도 동감이에요. 하지만 부모들의 심정은 그렇지 않은가 봐요. 우리 가정은 종족보존의 본능이 유독 강한가 봐요.” “자녀 중 남자는 오빠 한 분뿐이었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퍽 우울한 표정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물으려 하자 곧 화제를 돌렸다. “그날 아침 우리는 교인들이 부활절 아침 달걀을 찾는 어린애들처럼 소란을 피웠어요.” “새침데기의 달걀은 어디서 찾았죠?” “맞춰볼래요?” “길 잃은 어린애처럼 길거리까지 나간 거 아니에요?” 그녀는 몸을 비비 꼬며 귀엽게 웃었다. “가장 찾기 쉬운 농 밑에서 옹기종기 엎디어 있었어요. 착한 어린애들처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 나 자신이 그녀로부터 점차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내 이름도 하나 써넣지!” 그녀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더니 소리쳤다. “정말 얌체야.”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오늘 동생하고 영화 보러 가기로 해놓고선.” “그럼 나오라고 해요. 나도 한 몫 끼게요.” 그녀는 한참 나를 노려보더니 카운터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힘없이 돌아왔다. “아직 안 돌아왔데요. 그 애는 나보다 더 감상적이에요. 아마 첫눈이 왔기 때문에 헤매고 돌아다닐 거에요.” “일어나요 나갑시다.” 내가 재촉하자 그녀는 입술을 뾰쭉 내밀더니 씽긋 웃고 깡충 일어났다. 극장 안은 으스스 추운 편이었다. 나는 약간 떨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예상외로 에로틱한 애정물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긴장된 순간. 화면에서 흥분된 남녀의 두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내 앞자리에서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그 순간 또 하나의 조명이 화면을 향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향해 명멸하며 비춰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을 관조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나는 관객의 표정도 보고 싶었다. 남자는 격정적으로 다가가 여자를 껴안았다. 그러더니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눕혔다. 그는 뒹굴면서 여인의 등 뒤 지퍼를 끄르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히고 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얌체야. 일어나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따라 극장 밖으로 나왔다. 좀 어두운 데까지 종종걸음으로 걷던 그녀는 홱 돌아섰다. “그런 영화를 보면 남자가 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 법 아니에요? 뭐에요 글쎄. 아이 챙피해.”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순간 나는 이제는 파탄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쩔쩔매며 그렇게 말했다. “미안하긴 뭐가 또 그렇게 미안해요. 어쩔 땐 꼭 바보 같애. 가서 시험공부나 해요.” 그녀는 뱉듯이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이 언제 내렸느냐는 표정으로 길거리는 발랑 지저분한 몸뚱이를 보이며 나자빠져 있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자 나는 곧 농장으로 내려가 버렸다. 나는 언제나 이곳을 고아원(보육원)이라 부르지 않고 농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노처녀인 우리들의 어머니는 오래전에 고아원을 정리하고 이 농장을 샀다. 당시 데리고 있던 열세 놈들은 대부분 입양을 보냈다. 지금 데리고 나온 몇 명은 그래도 어머니에게 싹수가 있는 놈이라고 인정된 형제들이었다. 방학 동안 이 어머니를 돕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줄곧 이 농장에서 지냈기 때문에 영화관 사건 이후 그녀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도 얼마 동안은 우리 사이가 서먹서먹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이는 곧 회복되고 옛날처럼 테니스도 하고 차도 마시곤 했다. 다만 불문율처럼 우리는 영화관 사건은 없었던 것처럼 묻어두고 지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 행사가 많았다. 신입생 환영회, 체육대회 등이 끝나자 또 축제가 시작되었다. 학교가 작을수록 이런 모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축제 때 여자 파트너를 누구로 했으면 좋겠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걸 왜 나에게 물어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자 파트너로서 자기를 초대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환영이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전화를 해 왔다. 아무래도 자기는 대중 앞에서 나와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긴 학내에서 파트너를 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다음날 그녀를 만나자 말했다. “나는 이번 쌍쌍 파티에 안 나가기로 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우리 그때 저녁 식사나 같이해요.” 나는 의외의 대답에 눈이 커졌다. “더욱 영광이지요.” 그러나 막상 그날이 되자 그녀는 또 전화해 왔다. 둘만 빠져나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폭죽 터지는 소리와 시끄러운 밴드 소리를 들으며 기숙사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와는 아무 진전 없이 이대로 졸업 때까지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소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가 너무나 즐거운 그녀를 사귈 수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 큰 고문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다행히 바쁜 여러 가지 일들이 연발해 주었다. 화학과는 격년으로 졸업생을 외국에 유학시켰는데 군을 마치고 장학생인 나는 그중 유망주였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미국인 과장의 권고를 받고 있었다. 거기다 중간고사가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대학이 결연을 하고 있는 피혁 공장에서 의뢰해 온 크롬 태닝을 시도하기 위한 최적 조건을 구하는 실험을 과에서 지시한 대로 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온몸에 쇠가죽 냄새를 풍겨대며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말숙(이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나는 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이름은 용모만치 귀엽지도 않고 산뜻한 대화만큼 세련되지도 못했다. ‘딸은 이것이 끝이다.’라는 말숙(末淑)을 왜 내가 불러야 하는가?)은 그녀대로 중간고사 후 영어연극 준비로 바빴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인데 벽을 사이에 둔 두 원수의 가정에 피라모스라는 아들과 티스베라는 딸의 열렬한 사랑 이야기다. 두 사람은 밤중 아시리아의 왕 니누스의 무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먼저 나간 티스베가 사자에 쫓겨 베일을 떨어뜨리고 숨었는데 베일을 피 묻은 입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을 늦게 온 피라모스가 애인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자살하고 뒤늦게 나타난 티스베가 또 피라모스의 칼로 자살하는 비극 이야기다. 이때 튄 피가 그 무덤에 서 있던 뽕나무에 튀어 흰 오디가 붉은색으로 변했다는 비극이다. 여기에 그녀는 티스베 역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운동장에서 그녀를 만나자 연극의 대사를 외듯이 이렇게 말했다. “오! 티스베여, 우리는 벽도 없지만 이렇게 만날 수가 없구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 연극에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 볼래요?” 나는 또 대사를 이었다. “그러나 나는 죽기는 싫소이다.” “저두요.” 그녀는 애교 있게 답했다. “정말 차 한잔할 시간도 안 납니까?” 그녀를 보고 있자 나는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싶다는 충동을 또 느꼈다. “우리 유월 중 휴일에 신나는 플랜을 짜서 놀러 나가요.” “또 실망하게 하려고요?” “미안해요.” 그녀는 한눈을 찡긋 해 보였다.
신나는 플랜. 그것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무조건 즐거웠다. 온종일 그녀를 곁에서 쳐다보며 사이다 맛이 나는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신나는 플랜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연극은 끝나고 쾌청한 유월의 휴일이 왔다. 그녀는 2인분의 도시락을 싸서 나왔다. 우리는 한적한 교외의 절을 찾았다. 절이 속세를 떠나는 상징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도피행각을 한 셈이었다. 이 아련한 공범의식이 또한 나를 더없이 설레게 했다. 절에 도착하여 산을 헤매다가 클로버가 한 무더기 나 있는 잔디를 발견하자 나는 벌렁 나자빠져 뒹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커다란 둥근 물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하고 소리쳤다. “우리 연극 어땠어요?” 그녀는 배를 깔고 엎디어 클로버 꽃으로 화환을 만들며 말했다. “멋있었어. 배경 하나도 없이 연극을 했다는 건 말이야. 나무판자에 그려놓은 벽과 벽 틈을 보고 그것이 바빌로니아의 벽과 벽틈이라고 우리는 보고 있었거든. 연극은 자유로운 영혼들의 상상과 꿈을 불러모으는 힘이 있어 좋아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랬어요? 내 연기 어쨌느냐는 말이에요.” “일품이었지. 연기자는 제2의 창작자라고 했던가?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어요.” “뭐라구요?” 그녀는 마구 내 등을 두들겼다. “또 애인을 따라 죽으려고 할 때의 연기. 나는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때 뭐라고 했었죠?” “‘오! 죽음만이 당신과 나를 갈라놓을 수 있지만, 그 죽음도 내가 당신 곁으로 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그 부분 말이에요?” “맞았어. 더 실감 나는데. 그 장면이 더욱 일품이었어요.” “나는 정말 그렇게 죽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 반대지만.” 그녀는 일어서서 클로버 꽃은 모두 꺾어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내 가슴이며 배 위에 가뜩 늘어놓고 화환을 만들면서 이야기했다. “남들은 나더러 명랑하다고 말하지만, 집에 가면 우울한 생각을 더 많이 해요.” 드디어 커다란 화환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화환을 목에 걸고 배를 깐 채 내 옆으로 바싹 다가 누웠다. “여기다 목을 집어넣어요.” 나도 배를 깔고 둘이서 한 화환에 목을 걸었다. “처음으로 만났을 때 액자에 관해 이야기하셨죠?” 나는 화환 속에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지금 현실과 격리된 액자 속에 있는 거예요. 꿈과 자유밖에 없는.” 그녀는 벌떡 일어나 화환을 멀리 던져버렸다. “왜 그래?” “필요 없잖아요. 우리는 이미 액자 속에 있는 건데. 이젠 온 산이 다 우리의 것이에요. 우리는 지금부터 꿈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녀는 양팔을 벌리며 자유를 만끽하는 형상으로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꿈을 꾸고 있는걸.” “무슨 꿈?” “이게 꿈이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꿈이 아닌지 만져 봐야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징그러운 뱀이나 본 듯이 괴성을 지르며 빠져 달아났다. 우리는 쫓고 쫓기고 넘어지고, 뒹굴고, 웃으며 온 산을 헤매었다. 그리고 허전해지자 점심을 먹었다. “인생도 소꿉장난 같애.” 그녀는 말했다. 이때쯤 해서 우리의 말투도 변해 있었다. “왜 소꿉장난이야? 인생은 싫어도 그만둘 수 없는데.” “난 그런 게 싫더라. 액자 속의 인생엔 그런 거 없기.” “오직 우리들의 꿈만을 위해.” 나는 음료수병을 높이 들었다. 점심을 마치자 심심해졌다. “우리 트럼프 할까? 나 가져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무슨 트럼프야?” “그럼 뭘 해. 심심하잖아.” “그냥 이렇게 서로 쳐다봐. 상대방의 영상이 망막에 각인 될 때까지.” 우리는 오십을 세게까지 상대방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는 놀이를 했다. 오십 번째에 고개를 홱 돌려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럼, 거기 하늘에 상대방의 모습이 신기하게 하늘에 뜨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치자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그녀가 내 바른팔을 붙들더니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땅에 묻고 팔을 베었다. “나 이런 일 처음이야. 오해 말아줘. 괜찮지?” 나는 처음 사지가 얼어붙어 꼼짝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꿈꾸는 건데 워.” 그녀 쪽으로 돌아눕지 못하고 꼼짝할 수 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늘 사랑해 온 긴 머리칼이 내 팔 위에 놓여 있었다. 팔뚝의 맥박이 크게 뛰어 그녀의 머리에 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았다. “왼손 좀 줘 봐요. 손금 봐 줄게요.” “뭐야, 또 수상도 보시나?” 나는 왼손을 펴 보였다. “어머, 성공 줄이 기세 좋게 뻗었는데.” “성공하려나 보지?” 나는 또 물었다. “오래 살겠나 봐 줘요.” “팔십까지는 살겠는데요. 초년고생이 많군요.” “돗자리 깔아도 되겠는데. 마누라 복도 있는지 봐 줘요.” “응, 복이 많겠어. 그런데 서른두 살 때쯤에 결혼하겠는데요.” “뭐라구? 노총각이 되어서? 그럼 마누라 복이 없잖아.” 나는 갑자기 바른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껴안으며 돌아누웠다.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고 나는 기분이 묘해 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오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체취에 몽롱해진 채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한 몸으로 녹아들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그녀를 힘 있게 끌어안고 입 맞추지 못하고 바른팔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나는 귀여운 파랑새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앉아 고개를 흔들고 흩어진 머리를 양손으로 쓰다듬어 내렸다. 나도 벌떡 일어나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힘껏 세 번 쳤다. 주먹이 쓰리고 할퀸 자국에 피가 맺혔다. “뭘 하는 거야.” 그녀는 놀란 듯이 물었다. “정말 꿈이 아니지 확인해 보려구.” 그녀는 화장지를 꺼내어 내 손의 핏자국을 꾹꾹 눌러 주었다. “난 현철 씨를 너무 몰라. 현철 씨 이야기 좀 안 해줄래요?” 이때 그녀는 내 이름 김현철을 처음으로 불렀다. ‘현철 씨’하고 부르니 참 야릇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을 떠난 사람들이 아니던가?” “좋아요. 그럼.” 그녀는 입맛이 쓰다는 듯 맥이 빠져 있었다. “그 대신 이야기를 해주지.” 나는 저만치 물러나 나무에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금술 좋은 젊은 농사꾼 부부가 살고 있었지 하잘것없는 움막이었고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밭이었지만 그들은 불평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았댔어. 그들은 일찍 결혼했지만, 슬하에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이 학년짜리 아들 하나밖엔 없었어. 그래서 그들은 이 아들 하나가 보람이었지. 어느 날 농부는 아직도 처녀같이 고운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어. ‘신령님도 우리 사이를 보면 질투할지도 몰라.’ 그러나 벌써 북쪽에서는 검은 구름이 일고 폭풍우가 몰려오듯 어두운 그림자가 남하하고 있었어. 어둠이 이 집 앞에까지 와서야 그들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어. 결국, 장총과 농구화는 이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어. 이 부부는 두려워서 끼어 안고 오돌오돌 떨고만 있을 뿐.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혼란 가운데 악몽 같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이번에는 빛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북으로 밀려나면서 또 한 번 악마는 마지막 장난을 했단 말이야. 억센 세 사람의 농구화들이 장총을 갖고 밀려들더니 샅샅이 집안을 뒤진 뒤 가져갈 것이 없자, 젊은 농부를 산으로 끌고 가버린 거야. 아내가 그렇게 가슴 찢어지는 울음으로 호소해도 막무가내로. 그 뒤 매일 밤 농군의 집에서는 정화수를 떠 놓고 호롱불 밑에 흐느끼며 비는 애처로운 여인의 목소리만 들렸었어. 그런데 다시금 어둠과 빛이 요란하게 뒤바뀌더니 마지막 어둠이 북으로 밀려나면서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농구화가 장총을 들고 이 집에 들이닥쳤어. 온 집안을 뒤졌으나 더는 가져갈 것이 없었어.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흐느끼는 젊은 여인과 오돌오돌 떨고 있는 가엾은 어린 소년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한 농구화는 그래도 서운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가냘프게 흐느끼는 여인을 돌아보았어. 그러더니 장총을 내던지고 별안간 여인 위를 덮쳐 눌렀던 거야. 놀란 소년을 또 하나의 농구화는 밖으로 끌어내어 울 안의 감나무에 묶어 놓고 걸레로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말이야. 사내는 방 안으로 사라지고 얼마 후에는 요란한 총성이 서너 번 안에서 울려 왔었어. 이것이 소년이 어머니를 마지막 본 무서운 순간이었어. 마을 어른들은 이 불쌍한 소년을 고아원으로 보냈었지. 다행히도 그 고아원장은 신앙이 좋은 처녀로 좋은 분이어서 이 소년을 잘 돌보았고 고아원을 청산한 뒤에도 끝까지 그를 아들 삼아 귀여워하며 그 소년을 대학까지 보낸 거야.” 여가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말숙은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 “말숙이 현실을 듣고 싶어 했으니까.” 나는 마음이 후련해 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다 숨겨두고 말하지 않는 법 아니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아니야, 무서워 더 듣고 싶지 않아.” 그녀는 정말 무서워 몸을 오돌오돌 떨며 고개를 파묻고 웅숭그리고 앉아 내 앞으로 기어 왔다. “나 좀 안아 줘, 응?” 병아리를 품은 씨암탉처럼 그녀를 품고 나는 부드러운 머리칼 위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 맞추었다. 우리들의 체온은 따뜻이 녹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녀야, 감상에 젖어 나를 동정하지 말아라.) 그녀는 울먹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 말했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 주지 않을래요?” “뭔데?” “나더러 현철 씨를 사랑하느냐구.” 나는 그녀의 이성을 잃은 방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서 꼭 껴안고 오래도록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너 언제까지 이렇게 숨기고 살래?) 하고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또 (안 돼요. 안 돼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도 들었다. (한순간의 감성에 휘말려서는 안 돼. 이성을 되찾자. 이성을.) 우리는 나쁜 장난을 하다가 들킨 어린애들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서 산에서 내려왔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나와 말숙과의 데이트는 물론 일회적이었지만 이들은 내 마음의 액자 속에서 오래도록 간직되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재생되었다. ‘한 여자만 사귈 것. 여자에게 절대 치근거리지 말 것.’ 이런 따위의 원칙에 제약을 받고 있던 나의 데이트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지만 마음속으로 그림이 재생될 때마다 이 사소한 모든 것은 투명해지고 참으로 내가 나의 새침데기, 나의 파랑새, 나의 말숙을 아끼며 사랑했다는 정직한 감정만은 남곤 했었다.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그녀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로 찾아온 일이 있었다. 집에서는, 의사로서 미국에 이민하려고 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나더러 정식으로 자기 부모를 찾아보고 청혼해 주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거절하였다. 그것은 서로를 절망에 빠뜨리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자 농장의 어머니를 만나 뵙고 곧 모교 대학을 찾았다. 철우가 대학에 조교로 남아 학위를 마치고 전임 강사로 취직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힘 있게 쥐며 어깨를 두들겼다. “야, 이 자식아.” “이 자식, 하나도 안 변했군.” 4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대학의 건물을 늘었지만, 손때 묻은 화학실험실은 변함이 없었다. 갑자기 말숙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요즘도 테니스 하니?” “그럼, 요즘은 하드가 대유행이다. 자식, 선물로 내 라켓이나 하나 사 들고 오지 않고.” 나는 버릇으로 양어깨를 움칠해 보였다. “나도 거기 가서는 테니스를 못 했어.” 그러다가 말숙의 이야기를 꺼냈다. “말숙은 미국 이민을 떠났나?” 철우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아직 그 앨 못 잊고 있구나.” “아니 그저 물어봤을 뿐야.” “그 애 시내에서 교편 잡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아무도 그 애의 심경 변화를 아는 사람은 없어. 약혼하고 오륙 개월 됐나? 갑자기 도미 직전에 파혼했어. 그리고는 시내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지. 얼마 전에 대학원도 마쳤지. 원래 머리가 비상하지 않니?”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결혼은 했나?” “아냐. 아주 처녀로 늙으려나 봐. 너 옛날 말숙으로 생각하며 큰 오신이다. 그 앤 원래 명랑했잖아? 그런데 아주 딴사람이 되었어. 통 친구도 만나지 않고 말이야.” 철우와 헤어져 학교를 나오자 나는 말숙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정들었던 시내였지만 어쩐지 외국에 온 것처럼 어설펐다. 다방 ’금문교‘는 옛날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림 같은 모습은 전혀 아니었고, 길가로 향한 창들은 먼지와 그을음에 꽉 찌들어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기는 일렀기 때문에 어슬렁어슬렁 층계를 올라 다방으로 들어갔다. 옛날 그대로였다. 그러나 매우 남루하다는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손님도 별로 없었고 쓸쓸했다. 내가 옛날 말숙과 처음 앉았던 자리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자 몸집이 크고 백 육십 파운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레지가 교태를 보이며 다가오더니 어서 오세요. 어쩌고 하며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끼고 나를 가까운 의자에 앉혀버렸다. 역시 한국이라는 생각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누굴 찾으세요?” “아뇨. 의자를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의자요?” 레지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있었다. “아냐, 아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옳게 찾아 앉은 것이다. 그곳은 내가 처음 말숙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자리였다. “차 드실래요?” “커피요.” 나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아라는 이름표를 떼려고, 즉, 옛날의 깊은 상처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살고 있던 나 자신을 생각했다. 미국의 양부모들에게서 고아원으로 선물이 오면 나는 고아들을 웃게 하고 선물을 안겨서 사진을 찍어 감사편지를 보내는 일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편지를 보낼 때면 속으론 우리 거지들은 이렇게 행복합니다. 하고 솔직히 편지를 써서 보내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이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내 긴장이 풀릴 때마다 무시로 엄습하는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 혼란기에 나 정도의 가슴 아픈 상처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나뿐이었겠는가? “차 왔어요.” 레지가 신경질적으로 말해서 나는 눈을 떴다. 그런데 웬일인가? 맞은편 빈 탁자 앞에 초록색 방울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말숙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안경을 벗고 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분명 말숙이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누구 손님을 기다리시나요?” “네. 그래요.”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동안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무 캐나요.” 그리고서 그녀는 얼굴을 돌려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어머.” 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설마 거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내 가슴을 두들기고, 꼬집고 소란을 피울 줄 알았는데 차분히 말했다. “언제 오셨어요?” “얼마 전에 귀국했습니다.” 나는 마주 앉으며 말했다. “아는 분이세요?” 레지가 이상하다는 뜻이 차를 옮겨다 놓으며 말했다. “네, 잘 아는 처녀입니다.” 그녀는 레지를 보고 빙그레 웃더니 이어 말했다. “안경을 쓰셨군요.” “눈이 나빠졌습니다. 왜, 싫습니까?” “아니요. 더 품위가 있어 보이는데요?” 나는 이런 진부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말숙 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씩 웃었다. 의자에 기대어 멍하니 벽을 응시하고 다시 고쳐 앉고, 망설이곤 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이야기할게요.” 그녀는 겸연쩍은 듯이 내 표정을 읽으며 또 씩 웃었다. “그분들은 복이 많은 분이었지요. 물려받은 과수원과 논밭만 하더라도 오십만 평이 넘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적건 많건 그분의 은혜를 입고 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요. 다만 소원이 있다면 아들을 더 갖고 싶다는 것뿐이었어요. 맏아들 밑으로는 줄곧 딸만 넷이었으니까요. 이 귀염둥이 맏아들은 서울의 작은 아버지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6·25가 터졌어요. 충청도 시골에서 살던 그분들은 어쩔 바를 몰랐습니다. 아들도 기다려야 했지만, 정부가 남쪽으로 천도를 하자 이 농장에서 남쪽의 가까운 친척을 찾아 피난하여야 했어요. 부르주아는 무조건 그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요. 어린 딸들을 거느리고 겪어야 하는 피난 생활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고생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답니다. 거기다 어머니는 위경련이란 병까지 얻게 되었어요. 갑자기 몸을 비비 꼬며 신음하면 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그것이 맏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말없이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수복되었으나 맏아들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작은아버지 가족도 보따리를 싸고 가족들이 뽈뽈이 헤어졌답니다. 몇 달 후 정부는 수복하여 평양까지 탈환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회는 다시 부산 문화극장에서 개회하는 혼란을 계속하고 있었답니다. 그 속에서 그분들은 가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옛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답니다. 아들이 돌아오면 찾아올 집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국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충청도 야산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가끔 나타나는 빨치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땅 반절은 을 헐값으로 팔고 집은 큰딸과 사위에게 맡긴 채 아버지는 치안이 좀 잘 되는 도시로 옮겼답니다. 물론 어머니는 그곳에 남았지요. 정전 협정이 되고 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교환자 명단에 혹 아들의 이름이 있는지 정신없이 뒤졌구요. 어머니의 위경련은 더욱 심해졌답니다. 전쟁의 공포는 점차 사라져가고 전쟁 당시 막내딸이었던 소녀가 장성하여 대학에 들어갈 무렵 충청도의 작은 대학을 졸업한 이 소녀는 약혼자를 따라 미국에 이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답니다. 한때 실연을 당한 자포자기도 곁들여서.” 그녀는 여기서 말을 중단하고 현철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 다시 계속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 집안에 우레같은 소식이 잔해 졌답니다. 그때 간첩이 한 사람 잡혔는데 이 집에서 그렇게 찾던 아들이 그 간첩과 함께 대남침투 훈련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답니다. 그 간첩에 의하면 이 아들이 곧 남파될 가능성이 있다는 몸서리쳐지는 소식이었지요. 반가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소식에 어머니는 기절하고 말았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대공분실에 불려가서 혹 접선이 있으면 바로 신고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돌아온 뒤였습니다. ‘간첩신고는 113으로’ 이런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딸들을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어요. 큰 언니 집에는 날마다 잠복근무가 계속되었어요. 약혼자와 함께 그곳에 들렸을 때 언니는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 말도 큰소리로 하지 못했어요. 날마다 낯선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어서 자기는 무서워서 더는 그곳에 살 수 없다고 했어요. 다 떠나면 어머니만 그 집을 지키겠다고 우겼지요.” 나는 무표정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을 가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껴서인지 말을 중단하고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 눈 가장자리가 빨갛게 되더니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우는 거요?” “아니에요. 왜 울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어 보이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예요. 맏아들은 나타나지 않고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다시 햇발이 돋았으니까요. 그 아들은 이제는 나이가 많아 남파간첩으로는 결격이라나요? 그러나 그때 소녀는 연좌제로 유학을 못 하게 되고 약혼자를 잃은 거죠. 그게 뭐라고. 나 웃기지요?” 나는 그녀의 상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과 명랑했던 성격을 빼앗아 가버린 악몽. 옛날 트라우마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소녀.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오늘밤 저녁 안 사주시렵니까?”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걸었고 전엔 볼 수 없었던 양식 집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나는 식사에 곁들여 맥주도 갖다 달라고 말했다. “조근 드시죠.” “조금만.”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잔을 내밀었고 내 잔에도 맥주를 가뜩 채워 주었다. “우리의 장래를 위하여.” 나는 술잔을 쳐들었다. “결혼 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말숫 씨. 저더러 말숫 씨를 지금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으시렵니까?” 이것을 오래 전에 물었던 말이었다. 수줍은 듯이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그녀를 집에까지 걸어서 바래다 주기로 랬다. 벌써 땅꺼미져 어두어지고 있었따. 가는 길이 우리는 그 영화관을 지났다. “생각 납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손등을 꼬집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에는 그녀도 털어버리지 않고 내 손을 힘 있게 깍지 끼어 주었다. “우리 클로버 화환 속으로 다시 들어갑시다.” “무슨 말이에요.” “현실을 떠나 액자 속으로 다시 들어가자는 말입니다.” “그 철없던 시절로요?” “거기서 우리는 어두운 현실을 떠나 자유롭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현실이지 아니잖아요.” “클로버 화환을 던져버리세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신이 우리를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 안 느껴집니까? 지난 과거를 잊어버리고 암울한 과거에 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새로운 앞날을 예비했다고 말합니다. 말숙 씨, 우리 결혼합시다.” 그녀는 놀라서 멈추어 섰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고 말했다. “과거의 상처가 우리를 괴롭히면 이렇게 보듬고 새로운 세상을 삽시다.” 말숙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참새처럼 떨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가 점친 대로 꼭 서른둘에 그녀와 결혼하였다.
*이 작품은 1974년 현대문학 9월호에 발표된 내용을 개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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