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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넘어선 ‘연대의 인류학’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0. 14:59

비극을 넘어선 ‘연대의 인류학’

등록 :2020-05-08 08:30수정 :2020-05-08 14:35

 

1980년 5월18일부터 열흘간 단계 설명
항쟁 자치 최후 항전 거쳐 기억하기까지

 

5·18 광주 커뮤니타스: 항쟁, 공동체 그리고 사회드라마강인철 지음/사람의무늬·2만5000원

 

[책&생각]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리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14년 12월 타이완 가오슝에서 홍콩과 타이완에서 모인 민주 인사들이 광둥어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날 가오슝에서는 국제학술대회 ‘민주화와 과거청산의 실천’이 열렸다. 한국, 타이완, 홍콩의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모여 각 나라의 체험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광주 5·18 기념재단, 광주민주유공자유족회와 참가한 나는 한국작가들의 문학적 실천을 발표했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오슝 노조 조합장이 노래를 시작하자, 아시아에서 모인 시민운동가들이 팔을 흔들며 아시아인의 투쟁가를 불렀다.

분수대 앞 광장, 민주의 커뮤니타스.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변혁의 리미널리티, 광주 커뮤니타스

 

이 노래를 만든 역사를 분석한 <5·18 광주 커뮤니타스>에서 저자 강인철 교수(한신대)는 1980년 5월18일 아침부터 27일 아침까지 10일 동안을 몇 단계 중첩적으로 설명한다.5월18일부터 21일까지는 치열한 충돌과 계엄군의 학살극이 있었다. 물론 5월16일 학생들의 횃불 시위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계엄군의 학살이 있자 광주시민들은 변혁의 리미널리티(liminality) 단계로 변한다. 문지방(limen)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리미널리티는 일상의 문지방 곧 ‘문턱에 있는’ 마술적 순간을 말한다. 광주 시민은 평범/비범을 가르는 문턱을 넘어선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리미널리티는 보통 사회가 일시 정지되고, 전혀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지는 순간을 말한다. 20일 초저녁 7시경 헤드라이트를 켠 200여 대의 차량시위로 시민 참여가 눈덩이처럼 확대되며, 처음 집단적 환희가 촉발된다. 광주항쟁은 ‘변혁 리미널리티’가 전개되는 생생한 현장이다. 리미널리티는 광적인 카니발리즘이 아니다. 리미널리티는 성찰과 비판과 대안을 나누는 성스럽고 단기적인 현상이다.일상적인 커뮤니티와 구별하여, 리미널리티가 지속되는 공동체는 ‘커뮤니타스’(communitas)라고 한다. 광주항쟁 초기 시기를 ‘재난과 항쟁의 커뮤니타스’라고 한다.

생명의 공동체 광주.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자치와 의례의 커뮤니타스

 

5월21일 오후 8시부터 27일 새벽까지 5.5일 정도의 기간은 해방의 시간이었다. 계엄군이 광주 밖으로 퇴각하여 비교적 평온했고, 주민들이 대동세상을 만들었던 ‘자치의 커뮤니타스’ 시기였다. 버스터미널 구두닦이와 이발소 아저씨나 술집 아가씨도 차별 없이 서로 ‘민주시민’으로 불렀다. 직업에 관계없이 헌혈 대열에 줄을 섰다. 그릇이 부족해 주먹밥으로 밥상 공동체를 이루었다. 도덕적 분노로 모인 민주시민들은 자발적 나눔에 긍지를 가지며, 자치의 커뮤니타스를 이루었다.동시에 시신과 관 위에 태극기를 감싸고 <아리랑>을 부르는 추모의식을 반복했다. 평화의 커뮤니타스는 ‘시민종교’(civil religion)와도 연관된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성스러이 여겼다. 시신 썩는 심한 악취 앞에서도, 강요해서 부를 때와 전혀 다른 애국가다운 <애국가>를 추모의 만가로 불렀다. 태극기는 시민군의 상징이자 군기(軍旗)였다. 모일 때마다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내게 강같은 평화>를 부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분노로 참을 수 없었던 그들은 거룩한 추모의 커뮤니타스에 공손하게 참예했다.‘변혁의 리미널리티’야말로 대동세상, 화엄광주, 광주코뮌, 하나님나라 광주 등으로 불렀던 ‘광주 커뮤니타스’의 잉걸불이었다. 초기에 ‘광주 리미널리티’에의 참여는 대체로 원치 않았던 선택이었지만, ‘광주 커뮤니타스’에의 참여는 지극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광주 커뮤니타스에서 평등하며, 우애와 연대가 넘치고, 이타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으로 집단적 기쁨을 나눴다.이들은 두려움 없이 혹은 두려워하며 무장했다.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2012)에서 시민군들을 ‘리미널한 존재’(liminal entity), ‘문지방을 넘는 사람들’로 명명했다. 시민군들은 지위를 따지지 않고, 무소유하며, 서로 낮추는 겸손을 공유한다. 그들이 경험했던 해방의 기쁨은 백 년의 고통도 견디게 할 두터운 자긍심을 주었다. 5월27일 괴이쩍은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총살은 잔인한 2차 학살극을 자행했다. 죽을 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지리멸렬하게 판단하지 않았다. 죽을 자들은 살 자들에게 부탁했다.“돌아가, 살아서 계속 싸워줘.”죽을 자들과 살 자들의 연대로 ‘최후 항전의 커뮤니타스’가 이루어졌다. 죽을 자들은 예정된 ‘집단적 순교’로 스스로 세상을 내려놓았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과의 약속을 평생 울음 삼키며, 또 울음 삼키면서, 미덥게 지켰다.

본격적인 저항. (ⓒ이창성, 5.18기념재단 제공)

 

풍성하게 반복되는 사회극

 

저자는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인 4·19항쟁, 광주항쟁을 지배층의 위반에 저항한 하나의 사회극(social drama)으로 설명한다. 주먹밥을 만들든, 헌혈을 하든, 소총을 들든, 시신을 모시든, 통곡을 하든 광주 사람들은 각각 역사 현장의 등장인물이었다. 광주 시민은 역사라는 드라마에서 자신도 모르게 배역으로, 주체로 출연했다. 자기통치의 커뮤니타스를 경험한 이들은 끔찍한 고통과 상처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이겨냈다. 총알을 맞고도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부채감은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정신적 근력으로 변했다. 산 자들은 피로 찾은 자유의 의미를 악착같이 전수했다.

밥상의 공동체.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1987년 7월 사망한 이한열 열사를 모신 차량이 광주로 들어갈 때, 수많은 광주 시민이 맞아주었다. 시답잖은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버스 앞문을 열고 선동하며 금남로를 지나 저녁에 장례식 후 한열이 무덤가에서 밤을 지냈다. 묘지로 새벽기도를 온 어느 교회 승합차를 타고 시내로 오면서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깜짝 놀랐다. 어제 시위 때 광주 시민들이 주머니에 뭔가 넣어줘 사탕인가 했는데, 그게 다 꼬깃꼬깃 접은 돈이었다. 또 금남로를 걷는 중에, “어제 한열이랑 서울에서 오셨지요?”라며 전혀 모르는 세탁소 아저씨가 가게로 불러들여 땀에 전 바지며 셔츠를 금방 빨아 다려주고, 차비까지 줬다.

광주, 해방의 빛으로.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이듬해 1988년 노태우 정부는 ‘광주사태’라는 몰상식한 표현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1월28일 저들은 어쩔 수 없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화했다. 혁명적 경험을 몸으로 육체화·내재화한 이들은 비극을 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던 순간을 반복 기억하며 미덥게 실천해왔다. 2013년부터 광주항쟁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사실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실렸다.4·19와 5·18을 비교한 내용(12장)에서 5·18에 이르러 미국의 본질을 인식한 극적 전환을 쓴 부분은 인상 깊다. 4·19의 실패와 5·18의 희생은 1987년 6월 민주화 행진으로 이어졌다. 그 겨울에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외치며 불의를 몰아냈던 사람들 가슴에도 광주의 에너지는 훈훈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시민운동이 강한 까닭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광주라는 샘물이 가슴 깊이 끊임없이 솟기 때문이다.1989년 톈안먼 사건 때, 홍콩·이집트·필리핀 민주화 운동 때 그들은 광주항쟁을 반추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캄보디아어, 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아시아의 민주 시민들이 떼창으로 부르는 이유는 ‘광주 커뮤니타스’의 그 한없는 힘을 알기 때문이다. 세계인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한 체험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광주민주화항쟁 40주년 의미 또한 전해야 할 미덕이다.고통스런 역사는 ‘기억’으로 새롭게 조직된다. 그 기억은 기억하는 주체를 변화시키고, 기억하는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역사의 진실을 ‘기억’하느냐 ‘망각’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첫페이지를 넘기면 마음을 겸허하게, 가끔 시큰하게 하는 이 책은 기억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검박한 언어로 가르쳐 준다.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시민군.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국립5.18민주묘지 내 추모관. (출처 wikimedia commons)

 

김응교 교수 ⓒ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