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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고독’에 귀 기울이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0. 16:45

어린이의 ‘고독’에 귀 기울이다

등록 :2020-05-08 06:01수정 :2020-05-08 09:33

 

‘삐삐 롱스타킹’ 쓴 20세기 어린이책 대표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스무살 비혼모, 우체국 편지 검열 비밀 요원 경력 등 다양한 면모 조명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자신의 저서 <뢴네베리아의 에밀>을 손자 칼요한(왼쪽)과 그 여동생 말린에게 읽어 주고 있다. 그는 “아이들은 영혼에 바르는 연고”라고 했다. 창비 제공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옌스 안데르센 지음, 김경희 옮김/ 창비·2만5000원

 

‘어린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상은 ‘소리’다. 까르르 웃다가 악악 떼를 쓰고 엉엉 울먹이다 다시 깔깔거리는 변화무쌍한 그 소리들이 어린이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스웨덴 ‘국민 동화 작가’이자 우리에겐 <삐삐 롱스타킹>으로 잘 알려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은 반대다. 그는 어린이의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어린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외로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 말입니다.” 1973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린드그렌은 아이가 ‘한 말’보다 ‘하지 못한 말’을 들으려 했고, 아이에게 ‘해야 할 말’보다 아이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데 집중했다. 새 책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은 평생 아이들 곁에서 글을 지었던 린드그렌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다. 덴마크 전기 작가 옌스 안데르센은 린드그렌이 쓴 일기, 편지, 기고문은 물론 가계부와 나무 벤치에 남긴 짧은 메모까지 그러모아 95년을 살았던 20세기 대표 동화작가의 삶을 복원했다.

1907년 스웨덴 빔메르뷔에서 태어난 린드그렌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 나이로 열다섯에 수업시간에 쓴 수필이 지역 신문 <빔메르뷔 티드닝>에 실릴 정도였다. 그리고 2년 뒤, 열일곱의 나이로 이 신문 수습기자로 채용된다.

 

빠른 출발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임신이었다. 스무살 봄, 그는 신문사 편집장의 아이를 가졌다. “그때 난 피임법에 대해 전혀 몰랐어.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지독하게 무책임했는지도 몰랐지.” 훗날 린드그렌이 아이 생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 전혀 계획에 없던 임신이었다. 1920년대 작은 시골 마을, 임신한 ‘처녀’는 “타지로 도망가서 출산하든지 마을에 남아서 가족의 수치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강요 받았다. 결국 그는 “뱀 굴” 같은 소문을 벗어나 탈출을 감행한다. 산모가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아이를 받아주는 덴마크 국립병원에서 출산한 것이다.

 

그렇게 첫째 아들 라르스를 만났지만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자 경력은 끊겼고 아이 생부와의 결혼은 린드그렌 자신이 거부했다.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백일도 안 된 아들을 덴마크의 위탁가정에 남겨두고 그는 홀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속기와 회계, 서신 작성법을 배워 전화 상담원, 비서로 일했고 여행안내서 등을 만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돈과 시간만 생기면 스톡홀름과 덴마크를 오갔다. 라르스는 운 좋게 좋은 양육모를 만났지만, 그마저 건강이 악화되면서 엄마에 이어 양모와도 헤어져야 했다. “라르스는 소리 없이 울었다. 어차피 어른들 마음대로 할 테니까 울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울다니! 그 눈물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흐르고 있다.” 린드그렌이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에 귀를 기울인 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아이를 데려와 직장을 다니며 홀로 키우던 그는 1931년 직장 상사 스툴레와 결혼해 3년 뒤 딸 카린을 낳는다. 비슷한 시기 린드그렌의 이름은 다시 지면에 등장한다. “이따금 생활비가 모자라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한두 편 써서 잡지사에 팔았던” 것이다. 그렇게 썼던 그의 초기작은 엉성한 교훈을 담고 있으나,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린드그렌 역시 작가로 ‘성장’한다. 아이 ‘위’에 있던 시선이 아이들 ‘곁’으로 이동하면서 아이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된 것이다. 1937년 펴낸 <마야의 약혼자>가 그 첫 시도다. 사랑하는 가정부 마야에게 “피앙세”를 사주고 싶은 다섯살 아이의 천진한 목소리를 담았다. 2차 세계대전 중엔 스웨덴의 중앙우체국 검열국 소속 비밀 요원으로 스웨덴과 다른 나라를 오가는 서신 수만통을 검열하면서 전쟁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두 눈으로 보고 기록한다. 이 시기, 그는 드디어 <삐삐 롱스타킹>의 초고를 쓴다. 발목을 삐끗해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던 시기, 딸 카린에게 생일선물을 주려고 평소 즉흥적으로 지어냈던 삐삐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베드 테이블 노블’이다. 먹고 살려고 배워뒀던 속기가 이때 도움이 됐다.

 

린드그렌의 침대와 식탁을 오가며 헝클어진 양 갈래 머리, 짝짝이 스타킹을 얻은 삐삐는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 2주 동안에만 2만1000권이 팔렸고, 라디오·연극·영화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를 만났다. (지금까지 전세계에 팔려나간 삐삐 시리즈는 5600만부에 이른다.) 열광의 반대편에는 비난도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내 딸은 (삐삐에게) 전혀 호감 못 느끼더라’라며 삐삐는 병적이고 작품은 열등하다고 혹평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죽어가는 형과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아이의 이야기로 끝이 나는데 이에 대해 비판이 이어지자 그는 “어린이는 아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요”라고 답했다.

 

“아스트리드는 38세에 작가로 데뷔했다. 69세에 정치 기자로 데뷔했다. 그 후 계속 언론인으로 살았다”는 기사가 나올 만큼 그는 정치에 깊게 관여했다. 반핵운동, 동물복지, 여성 성직자 논쟁 같은 페미니즘 관련 이슈를 비롯해 세금, 작가 인세 배분 같은 현실적 문제까지 그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1978년 독일서적상협회로부터 평화상을 받으면서는 “세계의 운명은 요람에서 결정되며 인류 사회가 집안의 독재자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는다면 군비축소를 아무리 외쳐봤자 소용없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한 동화만큼은 오히려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가 없다”고 비판 받을 정도로 정치로부터 철저히 보호했다. 2002년 1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전 세계 독자로부터 쏟아진 7만5천여 건의 편지를 받았고, 1천만 크로나(물가상승률 감안하면 1백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장례식에는 10만명이 넘는 이들이 그의 운구 행렬을 따랐다. 어린이의 외로움에 공명했던 이 작가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