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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리버럴의 착각 / 이재성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2. 06:25

[편집국에서] 리버럴의 착각 / 이재성

등록 :2020-05-10 17:26수정 :2020-05-11 08:20

 

‘킹덤’에서 정치의 목적어를 찾다

이재성 ㅣ 문화부장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 <킹덤>은 정치의 본질과 관료주의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은유로 가슴을 흔든다. 드라마 곳곳에서 벼슬아치들의 이기심과 반민중성이 세자 이창(주지훈)의 애민의식과 격렬하게 충돌하는데,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논점들을 돌아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좀비에 쫓겨 경북 상주 읍성으로 몰려든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상주 목사와 세자가 벌이는 논쟁은 의미심장하다. 상주 목사는 성문을 열면 먹을 것이 부족해 모두 죽게 된다며 성문을 열 수 없다고 버티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세자는 “그럼 저들이 죽어가는 걸 그저 두고 보겠다는 거냐”며 “누가 큰 백성이고 누가 작은 백성인가” 되묻는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긴급재난지원금에 이어 전국민 고용보험 도입 논의에 이르기까지, 더불어민주당과 기획재정부 사이에 벌어졌던 힘겨루기는 21세기 판본의 ‘상주 성곽 논쟁’이라 일컬을 만하다. 관료들은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집행’을 명분 삼아 ‘큰 백성’과 ‘작은 백성’을 나눈다. 가난을 선별하고 싶어하는 관료들의 욕망에 감춰진 비밀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정밀하게 폭로한 바 있다. 가난을 선별해야 자신들의 일자리가 유지되는 관료들의 눈에는 개별적인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절대 사람들을 보지 말 것. 지친 사람, 괴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는 것, 그건 ‘경제적 합리성’이 인간성에 의해 흩트려질까 두렵기 때문이다.”(프레데리크 로르동, <정치적 정서>) 관료들의 실패는 공감의 실패에서 비롯한다.

 

이른바 ‘리버럴’ 정부가 집권하면 관료들이 청와대나 여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며 갈등을 마다치 않는 ‘정부 안의 리버럴 현상’이 수시로 벌어진다. 보수언론은 이간질한다.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정책을 둘러싼’ 리버럴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 관료들에 대한 장악력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재정과 복지에 대한 보수적 철학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관료들의 보수 성향은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고, 기존 체제의 밑바닥을 이루는 다중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며 반민중적이다.

 

적자재정을 감수하고서라도 복지를 확대하려고 하는 리버럴 정부에서는 보수 성향 관료들과의 충돌이 예정돼 있다.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하지 않고 예정돼 있다고 쓴 이유는 피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리버럴은 리버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다. 현대적 의미의 리버럴이란 주로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를 강조하는 진보적인 리버럴(민주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상의 성향과 국민을 대하는 자세가 자유주의적이라는 뜻이지 직업공무원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러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과 여당이 공약을 비롯한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정책을 펴는데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는 현상을 허용하는 것은 리버럴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지녔던 과거제도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이, 개발독재의 기억을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의 관료들은 자신들이 나라를 끌고 간다는 선량(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다. 주어진 모든 권한을 동원해 개혁에 저항하는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관료 권력이 나라의 주인 행세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킹덤>의 좀비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달린다.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고 좀비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남은 건 오직 식탐뿐이다. 대기근과 전염병이 일상이었던 조선시대 백성의 처연한 메타포가 후손들의 눈가를 적신다. 세자 이창은 굶주린 백성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예외적 통치자다.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 예외적 존재의 역할을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이 대의민주주의다. 그러므로 현대 정치의 목적은 민심과의 삼투압을 높이는 일이어야 한다. 거대 여당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만과 독선을 경계하는 목소리로 과잉 대표되는 기득권의 욕심이 아니라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묵음’ 처리되는 저 멀리 성곽 아래의 민심이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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