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말글살이] 사과의 법칙 / 김진해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2. 08:06

[말글살이] 사과의 법칙 / 김진해

등록 :2020-05-10 17:31수정 :2020-05-11 02:37

 

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궁금했다. 희생자들은 왜 항상 보복이 아닌 ‘사과’를 요구할까? 힘없는 ‘사과’가 뭐가 대수라고. 사과를 해도 비판이 잇따르기 일쑤다. ‘오빤 그게 문제야.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미안하다고 하면 그게 사과야?’라는 노랫말처럼 ‘제대로 사과하기’란 더 어렵다.사과를 하면 사람들은 그 말의 ‘진정성’을 따지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마땅찮다.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거니와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천 갈래의 마음일 테니 뭐가 진짜인지 모른다. 게다가 이 무도하고 염치없는 세상에서 계산 없는 사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일이다.

 

차라리 사과의 적절성을 따지자. 그걸 알려면 사과의 성립 조건을 따지는 게 좋다. 약속과 다짐은 미래와 관련되지만 사과는 ‘과거’와 관련된다. 사과는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문제 삼을 때 성립한다. 과거를 집중 사과한 모범 사례 하나. 오스트레일리아 전직 총리 케빈 러드는 원주민 아동 강제분리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하면서 ‘반성한다’를 5회, ‘미안하다’를 9회, ‘사과한다’를 18회나 했다. 그가 세 번 연속 ‘아이 앰 소리’(미안합니다)를 외치자 그 나라 전체가 울었다. 사과가 성립하려면 자신의 행위가 듣는 이에게 좋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듣는 이에게 미안함이나 책임감을 표현해야 한다. 피해자의 체면을 세워주고,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려야 한다.

 

아이 때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빌면 화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은 두 말 사이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입해야 사과가 된다. 그럴 때라야 힘없는 사과가 새로운 관계맺기의 출발점이 된다.

 

연재말글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