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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거주불능의 지구를 넘겨줄 수는 없다 / 원희룡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4. 03:35

[기고] ​거주불능의 지구를 넘겨줄 수는 없다 / 원희룡

등록 :2020-06-03 18:15수정 :2020-06-04 02:39

 

원희룡 ㅣ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제주도의 남단 중문마을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반딧불이 깜깜한 밤을 밝힐 만큼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었지요. 후두둑 비가 온 뒤, 맨발로 집 앞 밭이랑을 걷다 보면 부드럽게 밟히는 흙의 감촉 속에 지렁이가 움직이는 게 느껴져 살며시 발을 빼던 기억이 나곤 합니다. 햇볕이 따뜻할 때면 동네 아이들과 천제연폭포에 놀러 가 종일 물장난을 쳤는데 바람에 부딪히며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와 뒤섞이며 묘한 화음을 내던 것도 떠오릅니다. 제주의 태풍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일년에 세 번 이상은 지나갔는데 하얀 귤꽃이 피었다 떨어지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고 이게 구슬만한 크기가 될 때쯤 첫 태풍이 찾아왔습니다. 그 시련을 견뎌낸 열매들이 금빛으로 빛나다가 노랗게 여물어 결실로 거둬지면 그것이 저희 집에는 한 해의 마무리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이 생활을 도왔고 달력을 대신했던 겁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전기가 들어왔고 저는 반딧불을 따라다니던 소년에서 밤늦게까지 책읽기에 빠져든 학생으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 저는 제주특별자치도지사로서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역대급 팬데믹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계절과 상황 변화에 따라 2차, 3차로 나타날 수 있고 변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이어 생활방역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도민들의 물음에 속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인수공통감염병’, 즉 사람과 동물 사이에 전파되는 병원체에 의해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인간의 활동영역이 생태계를 과도하게 침범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배후에는 인간이 화석연료 남용으로 초래한 기후변화라는 더 큰 위험이 있다고도 합니다. 모기 서식지가 북상하며 전염병도 따라서 북상하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시베리아 동토에 동결된 고대 바이러스가 지구온난화로 깨어나 인간세계로 전파된다면 그 충격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다룬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케이트 레이워스라는 생태경제학자는 “경제와 사회, 그리고 자연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21세기적 경제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함께 자라나 압축성장의 혜택을 누린 세대로서 미세먼지에 이어 바이러스의 습격까지 받게 된 지금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는 ‘공존의 경제학’입니다.

 

저는 2015년 파리 기후변화 정상회의를 계기로 ‘탈탄소 제주’(Carbon Free Jeju) 기본계획을 수립해, 도내 전력수요의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자동차 100%를 친환경 전기차로 바꾸는 정책을 추진해왔습니다. 그 결과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은 2019년 12월 기준 14.4%로 전국 1위가 되었고, 전기자동차 보급도 2만대에 육박해 전국 전기차의 19%가량을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의 토대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도와 속도로는 2030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망치(BAU) 대비 34% 줄이는 데 그칠 것입니다. 가속화되는 기후위기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2050년까지 탄소중립(Net Zero)의 지구적 목표를 향해 다 함께 더 노력하고 더 분발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거론하는 ‘그린뉴딜’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를 이어갈 다음 세대에게 ‘공존불가의 자연, 거주불능의 지구’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로 인해 피해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5일은 환경의 날. 깨끗하고 안전한, 그러면서도 활력 넘치는 미래를 만드는 책임은, 좌우를 넘어, 바로 우리 세대에게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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