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5번째 봄 100권의 책 “약속을 지키고 있나” 묻는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4. 03:56

5번째 봄 100권의 책 “약속을 지키고 있나” 묻는다

등록 :2019-04-13 11:30수정 :2019-04-15 17:28

 

[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참사 뒤 5번째 봄

기억저장소, 유족·생존자 등 100명
인터뷰한 구술증언록 100권 발간
국가·언론 왜곡한 그날 생생히 증언
“트라우마 딛고 저항한 역사 보여줘”

 

세월호 5주기를 맞아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가 100권의 책으로 나온다. 구술증언록에 참여한 정동수 아빠 정성욱씨(왼쪽부터), 김도언 엄마 이지성씨, 책임 연구자 이현정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유혜원 아빠 유영민씨, 신호성 엄마 정부자씨가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그날을 말하다> 책들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다시, 봄이다. 304명과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5년, 그날을 기억하는 5번째 봄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을 껴안은 엄마, 아빠들의 육성을 담은 4·16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가 100권의 책으로 나온다. ‘4·16기억저장소’에서 이현정 서울대 교수(인류학)가 이끄는 구술증언팀(연구자 23명)을 꾸려 2015년 6월부터 4년간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났다. 피해자 가족 88명, 잠수사 4명, 동거차도 어민 2명, 유가족 공동체 단체 관련자 6명이 구술증언에 참여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술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피해자의 기억과 경험을 오롯이 드러냈다. 이 책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서 세월호 인양,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는 유가족들의 투쟁이 트라우마의 고통을 딛고 ‘기념비적 삶’을 살아간 자들의 저항의 역사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 10일 <그날을 말하다>에 구술자로 참여한 유혜원 아빠 유영민씨, 김도언 엄마 이지성씨, 신호성 엄마 정부자씨, 정동수 아빠 정성욱씨와 면담자였던 이현정 교수가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지난 5년간 지나온 봄을 되돌아봤다.

 

“2014년 그해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진도체육관으로 들어가면서 이 와중에도 꽃이 이렇게 활짝 피었나 싶었다. 올해 (경기도 안산시) 고잔공원에서 벚꽃나무 밑에 예쁜 들꽃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 ‘너희들은 살려고 발버둥 치며 해마다 다시 피는구나. 근데 내 자식은 이러지 못하는구나.’”(호성 엄마)“4월달에 어디 도망가고 싶어. 무서워, 벚꽃 피는 게. 이 세상에서 벚꽃이라는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우리 애들 벚꽃 필 때 떠나서 해가 갈수록 꽃을 보는 시선, 느끼는 감정이 더 확연해지고 더 아파질 것 같아.”(혜원 아빠)다시, 봄이다. 304명과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5년, 그날을 기억하는 5번째 봄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을 껴안고 엄마, 아빠들은 오늘도 다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으며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우직하게 내디딘다.그 엄마, 아빠들의 기억과 경험을 담은 4·16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가 100권의 책으로 나온다. 참사 이후 세월호 관련 기록을 수집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시민들의 모임에서 발전한 ‘4·16기억저장소’(소장 김도언 엄마 이지성)에서 2015년 6월부터 4년간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났다. 기억저장소는 이현정 서울대 교수(인류학)가 이끄는 구술증언팀(연구자 23명)을 꾸렸고 피해자 가족 88명, 잠수사 4명, 동거차도 어민 2명, 유가족 공동체 단체 관련자 6명의 육성을 편집 없이 그대로 옮겼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공개할 수 없는 영역은 ‘비공개’로 표시해 제외하고 책을 엮었다. 구술자는 약 2시간씩 3회에 걸쳐 참사 이전의 삶, 팽목항과 진도에서의 경험, 자녀에 대한 기억, 참사 이후 투쟁과 공동체 활동, 개인과 가족의 변화와 깨달음 등을 증언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술 내용을 한권의 책(120~500여쪽)으로 엮어 피해자의 기억과 경험이 지니는 개별성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이 교수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에서 세월호 인양, 그리고 촛불 혁명에 이르는 유가족들의 투쟁은 트라우마의 고통을 딛고 ‘기념비적 삶’을 살아간 자들의 저항의 역사”라며 “세월호 참사를 좀 더 정확하고 다각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진상규명과 역사 서술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지난 10일 <그날을 말하다>에 구술자로 참여한 유혜원 아빠 유영민씨, 김도언 엄마 이지성씨, 신호성 엄마 정부자씨, 정동수 아빠 정성욱씨와 면담자였던 이현정 교수가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지난 5년간 지나온 봄을 되돌아봤다. 이들의 구술증언록에서 남긴 봄의 기억도 좌담에 더했다. 구술증언록에서 인용한 부분은 따옴표를 붙여 좌담에서 한 발언과 구분했다.

세월호 5주기를 맞아 4·16기억저장소에서 발간한 구술증언록 <그날을 말하다>. 유족 등 100명을 인터뷰해 각각의 구술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9년 그리움 짙어진 봄
납골당에서 집으로 아이 데려오고 싶어
없는 거 실감할까봐 사진 잘 안봐
죽어서 만나면 ‘미안해, 고마워’ 말할 것


그리움은 혼을 빼는 아픔2019년 봄, 엄마, 아빠는 깊어지는 그리움을 토로했다. 너무 그리워서 아이가 있는 곳을 자주 가기도 하고, 너무 그리워서 두서너 달 발길을 끊기도 한다고 했다.유영민(이하 혜원 아빠) 오늘 4·16기억저장소에 있는 혜원이 교실을 들렀다. 방문일지에 누가 쪽지를 넣어놨더라. ‘장미의 꽃말은 그리움입니다.’ 그걸 딱 보는데, 가슴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너무 강해지니까, 돌아버리겠어. 혜원이가 서울(납골당)에 있어서 주말마다 가는데, (집으로) 데려왔으면 좋겠어.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이) 더 강해지니까.네 자녀의 맏이인 혜원은 사려 깊고 다감했다. “우리 애는 돈 달라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진짜로. 고등학교 다닐 때도 교통카드 충전해 주면 되게 오래갔어요. 웬만하면 걸어 다니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그런 게 고마웠죠. 엄마, 아빠 힘들게 돈 버는 거 아니까.” “(참사 며칠 전 밤 10시에) 우리 혜원이랑 마지막 카카오톡 한 게 있어요. ‘딸 어디야? 버스 탔나?’ 했더니 ‘어, 탔어’ 그러더라고. 아이랑 비슷하게 (집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거 같더라고요. ‘내리면 집에 가지 말고 슈퍼 앞에 있어. 아빠랑 맛있는 거 먹고 가자’ 했던 게 있어요. 그런 내용은 못 지우겠더라고요. 큰딸이 살가웠죠. 고등학생 되어도 아빠한테 와서 서슴없이 뽀뽀까지 해주고.”이지성(이하 도언 엄마) (지난해 4월 경기도 안산시 정부합동분향소가 철거되는 날, 희생자) 위패와 사진이 없어진 텅 빈 재단을 보는데 피해자들의 미래 같았다. 우리 아이들이 사라지는 거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우리 아이 기억이 부모의 가슴과 머리에 다 있지만 그 느낌, 아이를 안았을 때, 손잡고 갈 때, 뽀뽀했을 때, 그것은 사라진다. 엄마, 아빠가 힘들어하는 부분이 그것이다.도언은 중3 때 엄마와 커플 반지를 나눠 낄 만큼 애교 넘치는 딸이었다. 학교 선생님을 꿈꾸며 아침 7시에 등교하는 ‘바른생활부’ 활동을 했는데 그 등굣길을 엄마랑 늘 함께했다. “내 차는 도언이 전용차였거든요. 도언이가 되게 좋아했어요. (아침) 6시 반에 집에서 나오면 학교 가는 시간에,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해요. 도언이가 맨날 그랬어요, 엄마 목소리 들으면서 학교 가면 기분이 너무 좋고 발걸음이 가볍다고. 그 말에 신나서 만날 가는 거죠. 항상 아침에 내릴 때는 그래요. ‘딸 사랑해.’ (중략) 내가 ‘애기야’ 이렇게 부르거든요. ‘넹’ 이렇게 답해요. 문자도 우리는 카카오톡도 그렇게 주고받거든요. 항상 애교 섞인 그런 단어를 사용해서. 그런 행복들이 없다 보니까.” 도언 엄마는 도언이 사진을 잘 안 본다. 아이가 있는 평택 납골당을 가는 것도 드물다. 자꾸 보면, 자꾸 가면 도언이 없는 게 실감 나기 때문이다. “도언이가 없으니까 모든 게 의미가 없어요. 하나도 의미가 없어요.” “우리 아이는 항상 매서운 눈으로 감시를 하고 잔소리를 할 것 같아요. ‘엄마, 그렇게 살면 안 되지.’ 나는 죽을 때까지 똑바로 살아야 해요. 그래야 내 자식을 죽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방관하고 살면 아이를 못 만나게 해줄 거 같아. 그래서 죽어서 너 소원이 뭐냐고 하면, 내 아이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고. (울음) 그애한테 진짜로 무릎을 꿇고 빌고 싶어요. ‘미안해. 진짜 고마워. 너처럼 따뜻하고, 멋진 아들이 엄마 아들로 왔는데, 이것밖에 못 해줘서 진짜 미안해.’ 꼭 안아주고 싶어요.”(호성 엄마)호성은 엄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따뜻한 아들이었다. 그는 항상 참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고 무거운 거 들지 마. 엄마가 자꾸 하면 엄마가 하는 일로 알잖아.” 호성 엄마는 더는 아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기로 다짐했다. “아들, 엄마가 새로운 삶을 보여줄게. 무력감에 빠져서 아파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 거야. 너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가 죽을 때까지 어떻게 해볼게.”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기억, 안전 전시공간' 개관식이 열린 12일, 호성 엄마 정부자씨(맨 오른쪽)가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 넷째)과 함께 기억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광화문광장은 세월호 천막이 4년8개월간 머물렀던 자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7년 두려움 마주한 봄
살려고 몸부림쳤던 고통의 배
진상규명 위해 인양했지만


스트레스로 이빨 9개나 빠져
세월호 마주하는데 몸이 부들부들 세월호가 바닷속에서 떠올랐던 2017년 봄은 엄마, 아빠에게 두려움으로 각인돼 있다. 아이가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마지막 고통을 고스란히 품은 괴물 같은 배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정성욱(이하 동수 아빠) (세월호 인양) 테스트라고 해서 먹을 것을 하나도 준비 안 하고 (세월호가족협의회가 세월호 인양 모습을 감시하던 동거차도로) 들어갔다. (3월23일 새벽에) 세월호가 딱 뜨고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2014년 봄에 만났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눈앞으로 스쳐지나는 것이다. 우리 동수가 (2014년) 5월6일에 나왔는데 그 전에 나온 애들을 거의 다 봤으니까. 그 아이들이 지나가다 딱 멈추는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마비가 왔다. 몸 왼쪽에. 그때 엄마들이 그 옆에 있으면서 마사지를 해줘서 다행히 마비가 풀렸는데. (아이들) 죽음의 장소를 본다는 게, 그 첫 느낌은 무서움이었다. 그날 동수 아빠는 두려움에 아침까지 울었다. 지난 5년간 그는 동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2015년 12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참고인으로 출석해 아들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사진 속 동수의 얼굴은 퉁퉁 붓고 다리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혜원 아빠 (인양을) 엄청나게 기다렸잖아. 막상 배가 올라온다니까 너무 무서운 거야. 도저히 (동거차도에 가서) 그걸 볼 자신이 없어. 내 아이가 마지막에 (고통을) 당한 장소를, 내 눈으로 본다는 게. (며칠 후 세월호가 거치된 전남 목포신항으로 갔는데) 저 멀리서 배가 딱 보이잖아. 너무 싫은 거야. 차 운전하는데 가슴에 딱 꽂히는 거 같더라고. 가서 배를 도로 물에 집어넣고 싶더라, 눈에 안 보이게.정부자(이하 호성 엄마) 세월호 하면 그냥 괴물 같다. 선체에 올라가는 게 싫은데, 아들이 마지막에 있던 현장을 봐야 하니까, 호성이 있던 곳을 찾아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지. ‘이 좁은 공간(침대칸)에서 어떻게 있었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고, 뭔가 (나를) 빨아들이는 게 느껴지더라. 창가를 쳐다보니까 ‘아이들이 밖을 다 보면서 기다렸겠구나’ ‘정말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구나’ 무서움과 분노가 교차했다.도언 엄마 미수습자와 진상규명을 위해 인양을 바랐지만, 내 아이를 죽게 한 그 배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이들 동영상을 보면 복도에 쭉 앉아 있어. 그 좁은 공간에서 마지막에 누구를 불렀겠나. 엄마, 아빠를 불렀겠지. 저것(세월호)을 볼 때마다 미쳐버리는 거지.두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졌다. 세월호가 목포신항으로 옮겨진 뒤 동수 아빠는 그 곁을 지키며 수색 과정을 지켜봤다.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이들 유류품, 그리고 휴대전화, 차량 블랙박스 등을 위주로 살폈다. 보이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2017년 7~8월에) 첫 고비가 왔어요. 당시에 처음으로 미수습자가 나왔는데 그걸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거예요. 내가 (세월호 선체에) 올라갔을 때 우연히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미수습자였던 거예요. 그 후 잠을 못 잤어요. 그때부터 정신적으로도 몸도 너무 힘들어지더라고요.” 동수 아빠는 심한 스트레스로 잇몸이 다 무너지고 치아를 받치는 뼈도 무너져내렸다. 치아는 9개나 빠졌다. 대여섯번쯤 기절을 했고 3개월간 기억을 잃는 단기기억상실증까지 경험했다. 그런데도 2018년 1월 네덜란드에 가서 침몰 원인을 밝히는 모형실험을 지켜봤다. 배가 넘어지고 물이 차오르는 과정을 계속 지켜볼 때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들과 겹쳐졌다고 했다.이현정(이하 이 교수) 가족들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을 감내하도록 만든 것은 국가와 전문가의 잘못이다. 진도체육관에서 미수습자의 고통을 겪어봤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배를 인양하길 바랐지만, 피해자가 그 배를 마주하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가가, 전문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니까 피해자가 선체를 수색해서 증거를 찾았다. 너무나 잔인하다.

2015년과 2018년 다른 두 대통령
1주기에 최루액, 물대포 동원
머리채 잡아 체포하고 무릎 꿇려


4주기엔 정부합동영결·추모식
진상규명 골든타임 얼마 안 남았다 엄마, 아빠는 5번의 봄을 지나며 두 대통령을 경험했다.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노숙하던 유가족을 외면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2018년 정부합동영결·추모식을 열고 “유가족과 국민 앞에서 세월호의 완전한 진상규명을 다짐”한 문재인 대통령. 그사이 세월호 피해자들은 국회에서 밤샘 농성을 하고 단식을 하고 삭발했다. 안산에서 서울까지,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도보행진 하기도 했다. 청와대로 향하려다가 광화문에서 연행되기도 하고, 횃불을 들고 청와대 앞 100m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격동의 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4월 세월호 1주기 때) 서울광장에 갔어요. 경찰이랑 몸싸움하고 난리가 났죠. 물대포 쏘고, 캡사이신 뿌리고, 경찰들이 시민과 유가족들을 발로 차고, 꼬집고, 표시 안 나게 멍들게 엄청 때리죠. 경찰들이 우리를 화장실을 못 가게 했어요. 그래서 경찰들 앞에서 무릎담요로 그냥 가리고 엄마들이 볼일을 봤어요.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그런 상황이죠. 우리가 청와대 쪽으로 직진해서 가려는데 경찰이 방패를 앞세워 막는 거예요. 도언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탁 벗기면서 내 머리를 확 잡아당기더라고요. 캡사이신을 얼굴에 뿌리더니 자기들 장갑으로 막 비비는 거예요. 나를 범죄자 체포하듯이 양쪽에서 끌어내리면서 무릎을 팍 치고. 중심이 무너지면서 무릎이 바닥에 꿇려지고 얼굴이 시멘트 바닥에 박혔어요.”(도언 엄마)“(2017년 3월 촛불집회에서) 인양이 꼭 필요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발언했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수십만명이)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인양’이라고 외쳤을 때예요.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서 세월호라는 게 살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많이 우시는 분들도 있고, 격려해주시는 분들도 있고. ‘힘드시겠지만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같이하겠습니다’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동수 아빠)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엄마, 아빠는 기대했지만,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수 아빠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세월호가 있는) 목포신항에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근데 새 정부가 들어서니까 딱 반이 줄어들더라. 미수습자까지 떠나니까 발길이 끊겼다. 다 해결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버린 거지.혜원 아빠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주위 사람들이 ‘해결 잘됐지’ 이렇게 인사한다. ‘아, 다시 일장 연설을 해야 하나’ 답답해진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진상규명은) 너무 더디게 가고. 추모공원도 과감하게 추진할 줄 알았는데.호성 엄마 정권 바뀌고 목소리 높이지 않았다. 내 자식 일을 하는 데 걸림돌 될까 봐. 고개 숙이고 제발 해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더라고. (4·16생명안전공원 건립이 확정되니까 공무원들이) 이제 한발 뗀 거라고, 이렇게 한발 한발 해나가면 된다고 하는 거다. 국가가 알아서 해주는 거는 하나도 없구나.동수 아빠 해양수산부 장관은 바뀌었지만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2017년 11월 미수습자 장례식을 앞두고 세월호 선체에서) 유골이 나왔는데 은폐한 사건이 있잖아. 과감하게 그 사람들 쳐내야 하는데 가벼운 징계로 끝내버리고.더디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엄마, 아빠는 믿고 싶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2017년 11월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해 2기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지난 2월28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시설인 ‘4·16안전공원’ 건립 계획이 확정됐다. 추모공원과 추모기념관, 추모비로 구성된 추모시설은 안산시 화랑유원지 인근 2만3천㎡ 넓이의 터에 건립된다. 내년에 디자인 공모와 설계를 걸쳐 2021년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반면 진상규명은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세월호 선체조사위는 침몰 원인의 결론을 내지 못했고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도 활동 성과가 아직 미미하다. 강제수사권이 없는 위원회가 갖는 한계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가족협의회는 지난달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을 설치하고 전면 재조사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을 올렸다. △해경은 왜 선원만 구조하고 승객들을 구조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지 △세월호 급변침과 침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지 △박근혜 정부는 왜 ‘7시간’ 기록을 봉인하고 집요하게 진상규명을 방해했는지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3대 과제로 꼽았다.동수 아빠 수사권이 있으면 충분히 자료를 가져올 수 있는데, 지금은 (특조위가) 요청하더라도 (정부기관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수중 수색할 때 독립피디(PD)가 다 찍어서 해수부에 넘겼는데도 해수부는 없다고 한다. 거짓말인지 뻔히 알지만 (압수)수색을 못 하니까. 정부문서는 보존 기간이 있잖아. 그 후엔 자동 폐기되고, 책임자 처벌도 공소시효가 있고. 벌써 5년이니까 합법적으로 문서를 폐기하고 처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시간이 재깍재깍 다가오는 것이다.

2014년 4월18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도언 엄마 이지성씨가 아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씨가 들고 있는 것은 딸이 날마다 덮고 자던, 제일 좋아하는 담요다. 진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4년 아이를 떠나보낸 봄
‘전원 구조’에 박수친 어리석은 엄마
희생된 아이 마구 찍는 기자 못막아


사복경찰은 시체검안소까지 들어와
어리석은 부모 되지 않으려 싸워 기억의 끝자락에선 2014년, 그 잔인한 봄이 기다리고 있다.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오보인 줄도 모르고 박수를 쳤던 나를, 뭍으로 처음 나왔던 아이들을 언론의 무례함에서 지켜주지 못했던 나를 원망한다. 미안함으로 몸서리치면서도, 부끄러운 부모로 살지 않기 위해 다짐하는 시간들이었다.“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힘없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하는 걸 모르고 아들은 그렇게 살려줄 줄 알고 기다리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갔는데, 엄마는 (참사 당시) ‘전원 구조’라고 (언론이 오보)해서 박수를 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만큼 어리석었어요. 그 공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 같아요. 마지막 (아들이 경험했을) 그 장면, 자기가 죽어간다는 그 현실 속에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무서웠고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겪는 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아들이 어딘가에서 지켜볼 텐데 더 이상은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거 같아요.”(호성 엄마)동수 아빠 (참사 첫날) 올라온 5명에게 제일 미안하다. 왜냐면 얘들을 못 지켜줬으니까. 아이들 (얼굴)이 덮여서 나왔는데, 보고 싶어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나는 병원으로 먼저 가자고 하고. 근데 기자들은 (희생자를) 찍자는 입장이었고. 실랑이하는데 방송사 카메라 기자가 제일 앞에 있는 시신을 열어버렸다. 줄줄이 다 열고 찍어버린 거다. 그게 방송에 처음 나갔다. 내가 곁에 있으면서 (경황이 없으면서) 아이들을 못 지켜준 게 너무 미안하다.“언론이 인터뷰를 어마어마하게 했는데, 제대로 보도한 게 없어. 그때 가족들은 모두가 죽은 자식 찾으려고 정신이 없었지. 죽은 자식 찾았는데, 축하한다고 했으니까 오죽했을까.”(혜원 아빠)“4월23일 아이가 나왔는데 안 주는 거예요. 디엔에이(DNA) 검사 결과 나와야 한다고. 난리를 치니까 해경 상황실에서 책임자가 올라와서 얘기하는데 옆 사람이 자꾸 딴지를 거는 거예요. ‘도언이 어머니 더 얘기하세요, 더 얘기하세요’ 하면서. ‘당신 누구야’ 했더니 유가족이래요. ‘몇 반 누구 아빠냐, 얘기하라’고 했더니 그제야 자기는 기자래요. (시체)검안소는 기자들 출입 금지여서 못 들어오거든요. 알고 봤더니 사복경찰이었죠. 내 자식을 찾아가는 그 순간에도 사복경찰이 들어와서 태클을 거니, 미친 나라죠.”(도언 엄마) <그날을 말하다>는 국가와 언론이 외면하거나 왜곡한 그날을 피해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한다. 당시 팽목항과 진도 혹은 바다에서의 초기 상황에 발생한 무능과 무책임, 죽음조차 무례했던 현장, 은밀한 사찰 등 중요한 증언이 포함돼 있다. 특히 국가적·사회적 폭력에 의한 피해는 개개인의 삶에 아주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그리고 처참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내가 새벽에 잠이 안 오면 (그림으로 크게 그린 아이 사진을) 보지. 탁 보고 있으면 애가 나를 보고 있어요. 똑같은 말을 해, 우리는 항상. ‘미안해, 미안하다, 딸 미안해. 보고 싶다. 사랑해.’ 사진인데도, 그림인데도 만져. 만져보면 눈에서 자꾸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 같아. 그게 사람이 이제 미쳐버리고 돌아버리는 거지. 남들은 이런 아픔을 안 겪었으면 좋겠어, 진짜. 이 그리움에서 나오는 이 아픔은, 어떻게 사람의 혼을 빼놓는 아픔이야.”(혜원 아빠)“(세월호가 있는) 목포에서 아이들이 수습이 시작됐으니까 (참사 초기에 현장에서 봤던) 아이들이 계속 (꿈에) 오는 거예요. 세월호 앞에 아이들이 쭉 서 있는데 얼굴 형상이 없어요. 몸은 훼손되고.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잠을 못 잤죠. 아침 6시 동이 트고 나서야 겨우 자서 하루에 2시간 정도? 1년간 그랬죠. 지금도 운전하는 게 겁나요. 내가 갑자기 차를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어서.”(동수 아빠)“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우리 아들 마지막 장면이죠. (꿈에서도) 캄캄한 객실에서 아이를 찾고 다니는 거예요. 그럼 아이들이 머리통만 뒷모습만 보이고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여요. 내가 가서 뒤에서 내 아이인 줄 알고 딱 젖히면, 얼굴은 안 본 상태에서 깨는 거예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거나.”(호성 엄마)

사진은 지하철 노동자이자 사진작가인 김정용씨가 2014년 7월18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을 찍은 모습이다. ‘미안해요, 잊지 않을게요’라는 낯익은 약속을 2019년 봄, 우리가 지키고 있는지 묻는 듯하다. 김씨는 12일부터 3호선 경복궁역 지하 1층 미술관 2관에서 ‘세월호 참사 5년’ 사진전을 열고 있다. 김정용 사진가

 

“사회적 기억 성숙하지 않았는데
피해자의 기억만 더 뚜렷해져”
‘잊지 않겠다’ 약속했던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 이 4월에
‘잊지 않겠다’는 약속, 기억하는가이 교수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아이 얼굴을 만지고 느껴야 하는데, 상실과 두려움, 미안함으로 그럴 수 없는. 너는 떠났는데 나는 살아 있다는 그 고통이 피해자들에게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에서 투쟁할 때는 끔찍했지만 유가족들이 함께하면서 그리울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피해자들이 하나하나 이 고통에 직면하는 거지. 사회적 기억은 성숙하지 않았는데, 피해자의 기억만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그날, 함께 아파하며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또다시 찾아온 이 눈부신, 잔인한 봄이 묻는다.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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