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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지고 사라지면서도 분교는 사람들을 남기고 있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14. 09:45

스러지고 사라지면서도 분교는 사람들을 남기고 있었다

등록 :2020-06-13 16:32수정 :2020-06-13 17:31

 

[토요판] 특집
강재훈의 ‘분교 30년’

1982년 시작된 소규모 학교 통폐합
2018년까지 3885개교 합치고 없애
학교에 새겨진 시간·이야기도 소멸

사진가 강재훈 30년 걸친 분교 작업
1991년부터 전국 100여개교 오가며
폐교 직전 학교들의 마지막을 기록

최고도 학교부터 최남단 학교까지
줄배 타고 등하교하는 아이들부터
닫힌 정문 보며 눈물 흘리는 졸업생

경제성·효율성 앞에서 스러진 학교
사각 프레임에 붙들려 폐교 뒤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남아준 이야기들

1997년 7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우음분교에서 단 한 명의 전교생인 혜진이와 담임 선생님이 여름방학식을 하고 있다. 개학과 함께 우음분교는 고정초에 통폐합됐다.

 

▶1982년 시작된 정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으로 2018년까지 모두 3885개의 작은 학교가 큰 학교에 합쳐지거나 없어졌다. 그 스러지기 직전의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진들 안에서 폐교와 동시에 사라졌을 학교의 표정들이 웃고 울었다. 사진가 강재훈의 30년 분교 작업을 정리한 전시(‘들꽃 피는 학교, 분교’)가 6월9일부터 7월5일까지 류가헌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에서 열린다.

“내일도 학교 와도 돼요?”

혜진이가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학생과 교직원 ‘전체’가 참석한 방학식이 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여름방학식이 끝나자마자 혜진이는 다음날 등교해도 되냐고 묻고 있었다. 작은 섬마을에서 그네와 시소가 있는 학교는 혜진이가 매일 찾아오는 놀이터이기도 했다.“그럼.”혜진이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선생님이 “언제든지 놀러오라”고 했다. ‘놀러올 순 있어도 더 이상 공부하러 올 순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학교 구성원 전체가 모인 운동장이 여백으로 꽉 차 있었다. 학생은 혜진이 한 명뿐이었고 교직원도 혜진이 담임선생님 한 명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혜진이는 우음분교(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의 유일한 1학년 학생이자 단 한 명인 전교생이 됐다. 학교 관사에서 생활하는 선생님은 아침마다 학교 옆 언덕에 올라 큰 소리로 외쳤다. “혜진아, 학교 오너라~.”선생님이 부르면 학교 갈 시간이 된 줄 아는 혜진이가 “예~” 하며 동생 한석이(미취학)를 데리고 나타났다. 남매에게 학교는 ‘공부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 곳’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에서 청설모와 뛰어놀았고,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 땐 두 손을 포개 입에 대고 “뻐꾹 뻐꾹” 화답했다. 학교 텃밭에서 선생님이 따준 방울토마토를 입에 물고 눈깔사탕 굴리듯 오물거리기도 했다.“와~.”방학 때 학교 와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에 혜진이가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갔다. 누나 손 잡고 등교해서 책상 옆에 앉아 몸을 배배 꼬아대던 동생 한석이도 뒤따라 뛰었다.생김새가 소를 닮은 섬이라고 했고, 육지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섬이라고도 했다. 서해 반월만의 작은 섬(면적 0.42㎢에 해안선 길이 2.4㎞) ‘우음도’는 시화지구 간척사업(1994년 완공)으로 육지에 합쳐졌다. 갯벌을 잃은 주민들이 섬을 떠나면서 분교에서도 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졌다. 1997년 7월16일 우음분교의 방학식은 사실상 폐교식이었다. 개학과 동시에 혜진이는 더는 우음분교 학생이 아니었다. 간척사업 완공 3년 만에 우음분교는 6㎞ 거리의 고정초등학교에 통폐합(1997년 9월1일)됐다. 혜진이의 첫 여름방학식 한 달 보름 뒤였고 개교(1949년 4월) 48년 5개월 만(모두 119명 졸업)이었다.그 우음분교의 마지막 날이 ‘처음할아버지’의 카메라에 담겼다.혜진이는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삼십대 후반의 아저씨를 ‘막 할아버지 시기에 들어섰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어린 부모가 개발보상금을 챙겨 섬을 떠난 뒤 남매는 증조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처음할아버지가 뭍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혜진이는 엄마·아빠도 아니고 할머니·할아버지도 아닌 증조할머니와 살게 된 ‘어떤 이유’를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그리고 23년이 흘렀다.8살 혜진이가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는 동안 폐교된 우음분교는 민간 생태학교(2003년)로 바뀌었다. 사진기자로 정년을 맞은 처음할아버지는 나이 예순의 ‘진짜 백발’이 됐다. 그가 찍은 흑백사진 안에서 첫 방학식이 마지막 방학식이 돼야 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 혜진이가 여전히 배시시 웃고 있었다.

‘영남 알프스’의 한 축인 재약산 자락의 고사리학교(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는 ‘하늘 아래 첫 학교’였다. 폐교 5년 전인 1991년 11월의 모습.

 

소반 위의 촛불 두 개

 

사진가 강재훈은 지난 30년간 ‘전국의 우음분교들’을 찾아다니며 ‘전국의 혜진이들’을 기록해왔다. 폐교 직전의 분교들과 그 아이들의 시간이 사각 프레임에 붙들려 폐교 뒤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버텨줬다. 분교 30년 작업의 첫 사진은 1991년 ‘하늘 아래 첫 학교’에서 나왔다.강재훈이 고사리학교(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를 찾아간 해는 1982년 정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현재 ‘적정 규모 학교 육성 계획’) 추진 9년 뒤였다. ‘영남 알프스’의 한 축을 이루는 재약산을 기어오르느라 차오른 숨이 허파를 뚫고 튀어나올 때쯤 사자평의 너른 억새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기슭에 내려앉은 평지 한쪽에 집 한 채 크기의 ‘그 학교’(해발 812m)가 있었다. 고사리학교(공식 이름은 산동초 사자평분교)는 화전민 자녀들을 위한 배움터였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사자평 일대의 화전민들을 한곳으로 몰아 이주·정착시킨 땅에 세워졌다. 개교(1966년 4월) 당시 화전민의 흙집을 교실로 썼다가 2년 뒤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한 칸짜리 학교를 지었다. 그 학교가 강재훈의 카메라 안으로 들어왔을 땐 5개 학년 8명의 아이들이 선생님 한 명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 옆 민박집 아들인 5학년 국환이가 맏이이자 학생회장이었다. 돌을 캐낸 땅에서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고사리를 꺾으며 사는 마을엔 그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국환이가 작은 소반에 공책을 펴고 숙제를 하면 아버지는 상 위에 촛불 두 개를 올렸다. 초 하나도 아껴 써야 했던 산골 살림이었지만, 국환이 아버지는 “우리 아들 공부할 땐 특별히” 초 두 개에 불을 붙여 방을 밝혔다. 촛불 아래에서 국환이가 학교 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일기에 적었다.“유민이(4학년)와 인애(2학년)는 예쁜 사람이고, 정은이(1학년)와 여희(1학년)는 사탕을 많이 먹어서 이빨이 빠졌고, 은수(3학년)와 태진이(3학년)와 영진이(1학년)는 우리 반에서 억수로 떠드는 아이들.”억수로 떠드는 영진이가 5학년이 됐을 때(1995년) 고사리학교의 학생은 영진이밖에 없었다. 마을에 입학할 아이가 더는 없자 고사리학교는 이듬해 폐교했다. 개교 이래 30년 동안 졸업한 학생은 36명이었다. 2006년 사자평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뒤 학교는 등산객 대피소가 됐다. 흐릿한 촛불을 앞에 둔 12살의 국환이는 겨울 산바람에 쓸려 볼 빨개진 얼굴로 지금도 강재훈의 사진 속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경제성과 효율성이 “옛 도심과 농·산·어촌 소규모 학교의 열악한 교육 여건 개선”이라는 수식을 받으며 전국의 작은 학교들을 통폐합했다. 합친다고 해서 반드시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가 통합되면 폐합되는 시간이 있었다. 작은 학교에 새겨진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본교로 따라가지 못하고 폐교되는 학교에 남아 졸아들었다. 폐교와 함께 말라 증발하고 말았을 100여개 학교의 표정들이 30년 동안 찍어온 강재훈의 분교 사진에서 웃고 울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명달분교(2000년 2월 서종초등학교에 통합)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이른 아침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다. 1998년 풍경.

 

아이들은 알아서 배를 띄웠고 알아서 강을 건넜다.동강 이편에서 5학년 우진이가 나루터에 도착하면 강 저편에서 4학년 영광이가 줄배를 몰아 강을 가로질러 왔다. 배에 우진이가 올라탄 뒤 둘은 반대로 줄을 당겨 다시 강 저편으로 배를 몰았다. 강을 건넌 두 아이는 강가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연포분교(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에 닿았다. 그들이 학교에 도착할 때쯤 6학년 순애가 농번기에 돌봐줄 어른 없는 어린 조카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예미초등학교로 합쳐지기 한 해 전 강재훈도 강을 건너다니며 연포분교를 사진에 담았다. 한때 학생 80여명이 공부하던 학교에서 남은 전교생 7명이 카메라 주위로 모였다. 연포분교는 1999년 문을 닫았다. 설립(1969년) 30년 만이었다. 2017년 강재훈이 다시 찾아갔을 때 강 이편과 저편엔 다리가 놓여 줄배 없이도 연결됐다. 분교는 자동차 캠핑장이 돼 있었고 우진이도, 영광이도, 순애도, 그곳에 없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그들이 사진 속에서만 기억되고 있을 때 명달분교(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의 아이들은 어른이 된 얼굴로 그때 그 ‘카메라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완전히 망가졌어요”

 

햇볕이 뜨거워지기 전에 밭으로 나가는 부모를 따라 아이들도 일찍 책가방을 쌌다.마을 앞 삼거리에 이르면 6학년 민정이와 3학년 희연이가 2학년 혜영이를 만나 학교로 향했다. 고갯길을 휘돌자 나무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졌다. 혜영이가 두 팔을 옆으로 뻗고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오솔길을 걷고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학교로 가는 길은 때론 소풍처럼 즐겁고 때론 하기 싫은 숙제처럼 고됐다. 그 등굣길을 찍기 위해 서울에서 새벽길을 달려 명달고개에 이를 때마다 강재훈은 저만치 앞서가는 아이들을 따라잡느라 숨이 가빴다.

1998년 연포분교(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줄배로 동강을 건너고 있다. 학교는 이듬해 폐교됐다.

 

명달분교는 교실 두 칸짜리 학교였다. 전교생 7명이 학년별로 분포돼 있었지만 학년마다 배정할 교실도 선생님도 없었다.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더니 1~4학년(4명) 한 반과 5~6학년(3명) 한 반으로 알아서 나눴다. 몇 학년 몇 반 대신 ‘동생학년’과 ‘형학년’이라고 써서 교실에 붙였다.그 교실을 들락거리며 희연이가 난로에 넣을 장작을 고르면 우중이가 나르고 진선이가 쌓았다. 학교가 끝나도 아이들은 학교에 다시 와서 같이 놀았다. 남자아이들도 여자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했고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과 섞여 축구를 했다.명달분교는 2000년 2월 서종초등학교에 통합됐다. 그해 여름 강재훈이 다시 찾아간 학교 운동장은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운동장 저편에서 우중이가 혼자 학교를 둘러보고 있었다. 우중이가 아저씨를 알아보고 말했다. “우리 학교 완전히 망가졌어요.” 우중이와 진선이는 그해 2월 명달분교를 흡수한 본교에서 졸업했다. 졸업식 뒤 둘은 명달분교 정문 앞에 와서 졸업장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시무룩한 얼굴들이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20년 뒤 우중이는 자동차 정비 기술자가 됐고 진선이는 서울의 한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한다. 34살 된 아이들과 초로의 길에 들어선 아저씨가 옛 사진들을 보며 이젠 없는 학교(현재 산촌체험마을로 운영)를 이야기했다.석진이(1991년생)는 방동분교(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학생이었다.분교를 찍으러 전국을 다니던 강재훈은 2001년 자신의 아들(당시 초등 4학년)과 딸(1학년)을 교환학생으로 방동분교에 보냈다. 학교의 배려로 비어 있던 관사를 방으로 얻어 썼다. 강재훈도 매주 주말마다 인제로 가서 아이들과 지냈다.석진이는 그의 아이들과 형제처럼 공부하고 뛰어놀았다. 운동회 날이면 머리에 하얀 머리띠를 묶고 입을 앙다물고 뛰었다. 낚시경기에 참가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면 커다란 물통 안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나 때밀이 타올을 꿰어주며 싱글거렸다. 그 석진이가 지난 5월 늦은 밤 방송 뉴스에 등장했다. 지난해에 이어 강원도 고성에서 다시 큰 산불이 났다는 소식이 속보로 떴다. 마이크를 들고 뉴스를 전하는 기자는 원석진이었다. 강재훈이 얼른 카메라를 찾아들고 그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분교 작업을 시작한 해에 태어난 아이가 30년의 시간이 키운 열매처럼 자라 그의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스러지고 사라지면서도 분교는 그렇게 사람들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을 이어준 방동분교(1954년 개교)도 현재 재학생 2명인 학교가 되어 폐교 위기에 몰려 있다.

2001년 방동분교(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현재 폐교 위기) 운동회에서 계주 경기에 출전한 원석진(1991년생)군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사진).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으로 자란 석진씨가 2018년 한겨레신문사로 ‘강재훈 아저씨’를 찾아왔다(가운데). 방송기자가 된 석진씨가 2020년 5월 강원도 고성군 산불 피해 상황을 뉴스로 전하고 있다(오른쪽).

정부는 1982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3885개교(본교 1375개교+분교 2510개교)를 통폐합했다. 폐교된 학교들 중 2447개교(올해 3월 기준)를 민간에 매각했다. 28개교(2019년 10월 기준 초 24개교+중 3개교+대안학교 1개교)는 휴교 상태다. 잡초가 우거진 폐교들에서 책보를 허리에 낀 ‘반공소년’ 이승복만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애달파하고 있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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