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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칼럼] 팬데믹 영화제 로드 무비를 상상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14. 09:39

[조은 칼럼] 팬데믹 영화제 로드 무비를 상상하다

등록 :2020-06-11 17:49수정 :2020-06-12 02:38

 

 

팬데믹 영화제 로드 무비를 상상하는 일과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 담론을 쏟아내는 지식 행위 중 어느 쪽이 더 부질없을까를 자문한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을 가져온 생산 양식이나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고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면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미몽에서 우리가 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욕망 구조 안에서 코로나 이후를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나 문법을 가질 수 있을까….

무관중 온라인으로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를 다녀온 뒤 그 여정을 복기하다가 로드 무비를 찍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전주영화제 가는 길’에 부닥친 일상적 장면들이 그런 상상을 부추겼다. 영화는 관객의 피드백이 중요하니 ‘온라인 영화 보고 댓글이라도 달아주세요’라는 단상으로 정리하기에는 영화제 일정과 나의 일상에 침투한 팬데믹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언어로 풀기가 난삽해 장면들을 로드 무비처럼 엮어 써본다.전주영화제 주최 쪽은 코로나19로 영화제 기간 동안 온라인 극장을 운영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고심 끝에 극소수만이 참석하는 오프라인 개막식과 시상식을 진행했다. 5월28일 개막해서 6월1일 시상식을 진행한 영화제는 경쟁작에 한해 심사위원과 해당 감독들, 소수의 게스트가 참석하는 비공개 극장 상영도 했다. 필자는 〈사당동 더하기 33〉이라는 경쟁작 감독으로 이 모든 오프라인 현장에 있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라텍스 장갑을 끼고 소독제를 받아 극장의 좌석을 닦고 앉은 뒤 나올 때는 앉은 좌석을 닦아주고 장갑을 반납하는 일을 의식처럼 되풀이했다. 마스크 쓰고 라텍스 장갑을 끼고 영화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어 전주에 머물면서 다른 경쟁작들을 챙겨 보려던 원래의 계획을 접고 중간에 서울로 올라왔다.개막식 행사에서 감동적인 언어나 제스처를 건져보려고 해도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시상식에서 마스크를 통해 나오는 감독들의 수상 소감과 거기에 화답하는 장갑 낀 손뼉이 마주치면서 내는 낯선 음이 비현실적 현실이었다. 이번 영화제 동안 그나마 웃음이 터져 나온 순간은 온라인 영화제로 코로나 덕을 보게 된 플랫폼 와브에서 왔다고 소개했을 때, 그리고 이어 와브와 반대로 최대 피해를 보게 된 씨지브이 관계자라는 인사가 터져 나왔을 때뿐이었다. 물론 발이 묶여 시상식에 못 온 국제 경쟁작 수상 감독들의 영상 메시지와 함께 코로나 의료진한테 보내는 ‘덕분에 챌린지’ 해시태그 화면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이 매해 되풀이된다면 눈을 감을 수도 있다.축제일 수 없는 팬데믹 영화제로 가는 로드 무비를 찍었다면 어떤 장면으로 시작했을까 생각해본다. 전주영화제 개막식 전날 방문한 서촌의 작은 한옥 뜨락과 그 뜨락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미터 깊이로 파헤쳐진 지하 공사장이 될 것 같다. 대지 18평에 건평 10평의 이 작은 한옥 뜨락에서 며칠 전 지인을 따라 차를 마셨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적 정체성’을 고민하다 1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서촌에 둥지를 튼 설치미술가의 집이다. 첫 방문 때 한옥 처마 선에 걸린 오후 3시의 햇살과 바람이 불 때마다 볼을 부비는 대나무들의 사각거림과 차향으로 그득한 뜨락에 빠져들었다. 세평 정도의 서재 마루와 두평쯤 되는 안방과 건넛방 그리고 한평 정도의 부엌으로 구성된 이 작은 집은 안방의 작은 창으로 얼굴을 내밀면 북악산이 보였다. 정밀(精密)한 사치는 거기까지였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맞닥뜨린 건 지하를 한없이 파내고 있는 공사 현장이었다. 차향은 멈췄고 예정에 없던 서촌 한옥 보존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힘겨운 싸움 이야기로 옮겨갔다. 덜 편하고 덜 빠른 일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 삶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서촌에서 마을살이를 실천해보려 했던 설치미술가는 그런 고차원의 질문 대신 서촌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한옥 권장 지구가 ‘한옥 파괴 지구’로 둔갑하는 비(몰)상식을 문제 삼는 싸움꾼이 되고 있었다. 전주영화제 개막식 전날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서 거기 들렀던 것은 온갖 꼼수와 ‘건축 지식’으로 비상식적 인허가를 합법화하는 과정 뒤에 건축학과 교수가 있다는 하소연 때문이었을 것이다.다음날 전주영화제 개막식 가는 길에 마중 나온 제자가 전주에 인접한 완주에 있는 괜찮은 한옥 게스트하우스 단지에 들러 차를 마시고 가자고 했을 때 서촌 ‘한옥지구단’을 둘러싼 토건 멘탈이 가슴을 눌러 거절할까 하다가 그냥 따라갔다. 거기서 뜻밖의 책방과 마주했다. 전주 주변에서 헐리게 된 고택을 그대로 옮겨와 크기도 모양도 다른 일곱채의 한옥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단지였는데 자연 풍광을 그대로 살리고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은 한옥 단지를 디자인하면서 반드시 책방을 넣기로 했다는 대표의 설명과 공간 배치는 팬데믹 영화제 로드 무비에서 뺄 수 없는 장면이 될 듯했다. 어쩌면 팬데믹 이후를 잠깐이라도 꿈꿔보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카메라는 책방에 오래 머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책방 옆에 붙어 있는 ‘깜빡거리는’ 멍 때리는 장소쯤으로 명명된 듯한 플리커(flicker)라는 명패가 붙은 텅 빈 공간을 미장센으로 오래 잡을 수도 있다. 이윤 극대화나 효율성 또는 가성비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프레임을 배반한 공간이었다.영화제 중간에 잠깐 서울에 왔을 때 〈사당동 더하기 33〉 내 다큐의 주인공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1986년 사당동 철거 재개발 현장에서 만나 33년간 함께 만들게 된 영화인데 프리미어 상영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 사당동에서 열세살 소년으로 만났던 이 가족의 장손은 필리핀 아내를 맞은 다문화가족 가장인데 아내가 다니던 봉제공장이 코로나로 폐업할 뻔했지만 “다행히” 마스크 생산 업체로 전환해 일거리가 많다고 전했다. 본인 일자리에 대해서는 우물쭈물 넘어갔다. 열살 소녀로 만났던 둘째는 노래방 도우미여서 일자리를 잃었을까 걱정했는데 일을 계속한다고 했다. “요즘은 단속을 피해가며 일해야 해서 더 힘들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잠깐 안도할 뻔했다. 헬스클럽 트레이너 셋째는 이미 새벽 배송 알바를 겸하고 있었다. 배송업체 플랫폼 노동자들의 코로나 감염 확산 소식에 걱정되어 전화를 맨 먼저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부부가 번갈아 새벽 배송 일을 나가는 것 같아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는데 통화는 안 되고 “별일은 없다”는 짧은 문자만 왔다.이런 장면들을 엮은 팬데믹 영화제 로드 무비를 상상하는 일과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 담론을 쏟아내는 지식 행위 중 어느 쪽이 더 부질없을까를 자문한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을 가져온 생산 양식이나 생활 양식을 바꾸지 않고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면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미몽에서 우리가 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욕망 구조 안에서 코로나 이후를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나 문법을 가질 수 있을까를 질문해본다.

조은 l 사회학자·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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