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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 역사적 예수와 한국 교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23. 01:36

[정찬의 세상의 저녁] 역사적 예수와 한국 교회

등록 :2020-09-22 16:53수정 :2020-09-22 19:31

 

예루살렘 사제들은 야훼를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만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현장예배를 고집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런 예루살렘 사제들과 얼마나 다른지, 교회에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수의 식탁이 보여주는 자유로우면서도 거룩한 예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교회공동체는 아프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형성된 우리의 일상을 짧은 시간에 균열시킨 코로나19의 위력은, 전염병이 강요하는 ‘거리두기’가 역설적으로 삶을 성찰하게 하는 ‘정신적 거리’를 만듦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영위해온 자본주의의 삶이 지구 생태계는 물론 삶의 생태계에 얼마나 폭력적 형태였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현장예배로 방역 주체인 정부와 긴장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집단감염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현장예배를 가정예배나 온라인 예배로 대체해주기를 지속적으로 권고했음에도 일부 교회들의 현장예배 강행으로 지역사회 감염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두번에 걸친 코로나19의 폭발적 확산의 진원지도 교회였다. 그것으로 국민들이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일부 교회는 여전히 현장예배를 고집한다.지난 8월27일 대통령이 개신교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한 것은 코로나19 방역 문제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이 한 말 가운데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역에 적극 협조할 것이나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부분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교회의 존재성과 함께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기독교에서 예수는 근원적 존재다. 근원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두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못에 박히는 고통을 겪었던 ‘역사적 존재’로서의 정체성과,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이 두 정체성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생명체처럼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가 있었기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역사적 예수의 생애는 십자가형으로 종결된다. 십자가형은 예수의 생애를 집약하는 본질적 사건으로, 그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라는 초월적 존재가 잉태되었다. 역사적 예수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것은 예루살렘 권력의 원천인 성전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 부정의 극적 행동이 복음서에 기록된 ‘성전 정화’다. 당시 유대의 통치구조는 종교가 곧 권력인 신정체제였다. 성전은 유대의 민족신이면서 우주의 유일신인 야훼가 머무는 집으로, 희생 제물을 바쳐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유대 신정체제의 근간인 성전 이데올로기는 죄를 병의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성전을 유일한 참배 공간이자 치유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전세계 유대인들의 성전 참배가 끊이지 않았고, 그들이 성전에 바치는 세금과 재물은 엄청났다.성전 이데올로기는 성전에 들어오는 재물은 하느님에게 귀속된 재산이므로 세속적 목적으로 쓸 수 없게 했다. 성전과 성전 바깥의 세속 세계를 분리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성전에 엄청나게 쌓이는 재물은 성전 권력자들이 구축해놓은 부패구조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예수가 성전 뜰의 상인들을 내쫓은 것은 상인들도 성전 부패구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권력은 예수를 죽여야 했다. 성전 권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성전 정화’ 기록 가운데 요한복음서에 교회의 모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 나온다. 상인을 쫓아내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보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예수가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대답한 뒤에 나오는 구절이다.“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1-22)위의 구절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성전’의 실체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새로운 성전’이 신비스러운 것은 ‘부활’이 신비스럽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신비의 실체를 구현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노력의 구체적 형태가 교회다. 교회의 존재성은 부활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의 신비를 역사적 예수와 분리하는 순간 신비의 광채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예수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 유일한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가버나움에서조차 머무는 기간이 짧았다. 예수의 몸 자체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 교회의 식탁은 신분의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다. 상인 세리 농부 어부 노동자 대장장이 양치기 창녀 이방인에서 병든 자, 파산한 자, 버림받은 자, 누더기 걸친 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었는데, 그 식탁 자체가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였다. 예수의 죽음 이후 세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가 무너뜨리고자 한 성전과, 그 폐허 위에 세우고자 한 ‘새로운 성전’ 사이에 세워졌고, 앞으로도 세워질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사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예수가 생명체이듯이 예수를 구현한 교회 역시 생명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인 예배도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유를 희구한다. 그런 생명체를 교회 안에 가둔다는 것은 생명체를 훼손하는 행위다. 예루살렘 사제들은 야훼를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만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것은 신앙을 독점하는 행위이자 권력을 독점하는 행위다. 현장예배를 고집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런 예루살렘 사제들과 얼마나 다른지, 교회에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수의 식탁이 보여주는 자유로우면서도 거룩한 예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교회공동체는 아프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교회 세습도 위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교회를 생명체로 생각한다면 세습은 불가능하다. 교회를 물질로 보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물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비역사의 광채, 초월의 광채에 현혹되어 역사적 예수를 잊고 있다. 물질주의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한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광채를 잇는 다리가 십자가형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역사적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했다. 그 사람들을 쉼 없이 찾아다니는 예수의 옷과 신발은 늘 먼지투성이였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우리는 간절히 물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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