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한가위 아무 말 대잔치 / 조혜정
등록 :2020-09-29 17:51수정 :2020-09-30 02:37
조혜정 ㅣ 사회정책팀장
선선한 공기가, 바깥에서 고기 굽기 딱 좋은 날이다. 본가 옥상, 지난 설 연휴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못 본 사촌들이 둘러앉았다. 4월 계모임은 코로나19로 취소했고, 시간 맞는 사람들이라도 보자던 여름휴가는 일정 맞추기가 힘들었다. 바비큐 그릴에서 지글지글 익은 통삼겹살과 부모님께서 옥상 텃밭에서 손수 기르신 깻잎, 겨자채에 소주 한잔 곁들이니 세상 행복하다. 5살, 3살인 조카들이 신이 나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갓 백일 지난 막내 조카가 그 소리에 놀라 빽빽 울어대지만 하나도 안 시끄럽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보며 수다를 떨고 있자니 꿈만 같다. 맞다. 이건 그저, 추석이 되니 가족·친척과 북적북적 어울리고 싶어 해보는 ‘상상 모임’이다. 방역당국이 “이번 추석엔 안타깝지만 집에 머물러달라”고 매일같이 호소하는 마당에, 10명 넘는 사람들이 마주 앉는 상상은 그냥 ‘아무 말’이다.
거리두기에 지쳐 나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애국세력이 코로나(19) 전파의 주범으로 매도당하게 하는 등 문재인 정권은 매직과 같은 정치기술을 발휘해왔다. 아무 상관 없는 차량 시위까지도 코로나(19)를 이유로 압박해 비판세력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서경석 목사 등이 주도하는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이 개천절 집회를 차량 시위 방식으로 진행하겠다며 한 얘기다. “정부가 쳐놓은 코로나(19)의 덫에 걸리면 안 된”단다. 이들이 참가한 광복절 집회로 코로나19 확진자 627명이 나왔고, 그 여파로 지금 수백만명이 명절에도 가족들 보러 못 가 애를 태우고 있는데 ‘정치기술’에 차량 시위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이들과 뿌리가 같은 국민의힘도 ‘아무 말’을 얹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교통과 방역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차량 시위는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했다. 성일종 비상대책위원은 “교통에 방해는 될 수 있겠지만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권리”라고 말했다. 경찰에 신고된 차량 시위 계획은, 개천절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울 여의도에서 광화문광장을 거쳐 서초동까지 차량 200대가 한꺼번에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10월이면 차 창문도 잘 안 열 텐데, 환기도 안 되는 차에 뜻 맞는 이들이 어울려 타서 정권을 규탄하느라 네 시간 동안 얼마나 침방울이 튈지, 이후 파장이 얼마나 클지 이들은 걱정이 안 되는 걸까? 심지어 광복절 집회 참가자 중엔 마스크를 제대로 안 쓴 이도 속출했는데 말이다.
‘8·15 집회 참가자 비상대책위원회’란 곳은 한술 더 떠 1천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를 강행하겠다며 소송까지 제기했다. 개천절 집회를 막는 건 ‘정치방역’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코로나19 대응으로 안 그래도 숨 돌릴 틈 없는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는 이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내는 수고까지 감내해야 했다. 말 같지 않은 말엔 대꾸를 안 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럴 수 없는 중수본 담당자는 얼마나 짜증 났을까.
추석 이후가 두렵다. 4월 말~5월 초 서울 이태원 인근을 오간 이는 1만여명이었고, 277명이 이태원 관련 코로나19 확진자로 집계됐다. 4만3천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 광복절 집회와 관련해선 627명이 확진됐다. 올 추석 이동인구는 여느 명절보다 크게 줄겠지만, 그래도 정부는 2759만명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극소수만 일탈을 해도 코로나19 전파가 얼마나 일어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규모다. 그 연휴 막바지에 대규모 집회는 무엇보다도 참가자 자신에게 너무 위험한 선택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을 앞당길 순 없다. 하지만 방역수칙을 지키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영상통화로만 보던 얼굴을 직접 볼 순 있다. 거리두기가 곧 사랑과 배려인 시대, ‘애국 시민’들의 참사랑을 보고 싶다.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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