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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신’ 태어난 델로스섬, 찬란한 고대 역사를 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19. 05:04

‘태양의 신’ 태어난 델로스섬, 찬란한 고대 역사를 품다

등록 :2020-10-16 05:00수정 :2020-10-16 10:01

 

[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⑪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보고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 얽힌 신화의 무대
척박한 땅에 상업의 중심지이자 군사 기지 옛 모습 아스라이 남아

 

하얀 기둥만 남아 있는 ‘아폴론의 탄생지’ 델로스섬. 김헌 제공

 

델로스섬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 에게해 중앙에 있다. 처음엔 ‘아스테리아’로 불렸는데, 제우스가 사랑했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여신은 티탄 신족 중에 지성의 남신 코이오스와 밝음의 여신 포이베의 딸로서 제우스의 사촌이었다. 그녀는 질척대는 제우스를 싫어했다. 메추라기로 변신해 도망쳤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섬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섬을 ‘오르티기아’라고도 불렀는데, ‘오르틱스(메추라기)의 섬’이라는 뜻이다.

 

아스테리아를 잃자 제우스는 그녀의 동생 레토에게 껄떡댔다. 이 사실을 알고 분통이 터진 헤라는 임신한 레토가 출산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진통이 버거웠던 레토는 언니 품에 안기듯 오르티기아섬의 킨토스산에 숨어들어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태양의 남신 아폴론이었다. 시인 칼리마코스는 섬을 두고 그 이름이 아스테리아였을 때 “뿌리도 없이 떠돌았지만” 남매가 태어나자 해저에 뿌리를 내렸고, 척박했던 섬의 바위와 종려나무와 시냇물이 모두 금빛으로 눈부셨다고 노래했다. 이들의 탄생을 축하하듯, 섬의 이름은 ‘델로스’가 되었다. ‘밝다, 찬란하다’는 뜻이다. 이날은 또 철학자 플라톤의 생일인데, 그의 어머니가 아폴론의 은총을 입었다는 전설도 있다. 플라톤은 참된 존재는 이데아이며, 최고의 이데아는 좋음(善)의 이데아로서 마치 태양처럼 모든 존재를 비춘다는 비유를 들기도 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닌 것 같다.델로스는 서쪽 레네이아섬과 동쪽 미코노스섬 사이에 두 손으로 감싸인 듯 자리 잡고, 이를 중심으로 220여 개의 섬이 겹겹이 둥글게 둘러싸는 모양새로 에게해 남쪽을 채운다. 그리스말로 ‘동그라미’를 ‘키클로스’(Cyclos)라고 하기에, 델로스를 중심으로 하는 이 군도 지역을 ‘키클라데스’(Cyclades)라고 부른다.

 

쉽게 들어갈 수 없고 살 수 없는 땅

 

델로스에 가려면 아테네에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일단 미코노스섬으로 가야 한다. 비행기로 40분, 배로는 4시간 정도 걸린다. 미코노스에서 다시 델로스로 들어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섬까지 가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방문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다. 현재 델로스는 일반인의 거주를 불허하며, 방문객이 밤에 머무는 것도 금지한다. 섬에 머무는 시간을 약 3시간 정도 잡으면, 오전이나 늦어도 오후 3시 이전에는 델로스섬에 들어가야 한다.작년에 나는 일행과 함께 미코노스에 5시쯤 도착 예정으로 아테네 인근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탔다. 일정상 델로스섬 방문이 어렵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시라도 델로스를 꼭 보고 싶었다. 상황은 더 나빴다. 출발부터 지연되더니, 미코노스에 접근했을 때는 항구에 페리를 댈 자리가 없어 해상에 정박해야 했다. 천 명이 넘는 여행객들은 순서대로 작은 배를 타고 미코노스로 들어갔고, 결국 우리는 7시쯤에 도착했다. 델로스 방문은 불가능한 시점,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예약한 전세 여객선을 타고 델로스로 향했다. 7시 넘어 선착장에 접근하는 우리 배를 보고 현지 관리인이 깜짝 놀라며 뛰어나와 정박을 막았다. 일몰까지 1시간 이상 남았으니 잠시라도 델로스 땅을 밟게 해달라고 간절히 외쳤다. 하지만 관리인은 단호했고, 우리는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면서 섬을 멀리서 바라봐야만 했다. 나무도 풀도 거의 없어 섬은 황톳빛으로 척박해 보였고, 유물이라곤 하얀 기둥 몇 개만 보이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수평선으로 점점 기우는 황혼이 섬을 금빛으로 물들이자 ‘델로스’는 찬란한 고대의 영광을 드러내는 듯했다.

어머니 레토와 쌍둥이 남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조각상. 위키피디아

 

지중해 동쪽 에게해의 요충지

 

델로스가 폐허가 된 것은 기원전 88년이었다. 흑해 남쪽의 왕 미트라다테스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델로스섬을 공격해 참혹하게 파괴했다. 그 이후로 델로스는 지금까지 폐허로 남아 있다. 그 이전까지 델로스는 지중해 동쪽 에게해의 요충지였다.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를 잇는 바닷길의 주요 거점으로서 상업의 중심지였고, 특히 기원전 47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300여개의 도시국가가 참여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면서 군사적 핵심기지가 되었다.델로스 동맹의 목적은 페르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는 것이었다. 실제로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 초에 그리스를 두차례나 침략했다. 첫번째는 아테네가 마라톤에서 다레이오스의 군대를 막아냈고, 두번째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힘을 합해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를 밀어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력했고 위험했다. 특히 소아시아 서쪽 해안의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섬들은 페르시아의 야욕에 노출된 상태였다. 아테네는 이들을 결집해 군사적 동맹을 구축하고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했다. 델로스는 동맹의 금고와 해군기지를 유치하면서 에게해의 중심지가 되었다. 24년 뒤에 페리클레스가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겨온 후에도 델로스의 군사적 중요성은 확고했다.델로스 동맹은 아테네가 에게해의 패권자로 우뚝 서는 발판이 되었지만,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대립하면서 그리스 내전의 화근이 되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위협을 빌미로 동맹국들을 강압하며 자국의 이익에 몰두하자, 이에 반발하며 동맹을 이탈하려는 도시들이 나타났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끄는 스파르타에 손을 내밀었다. 아테네의 급부상을 줄곧 경계하던 스파르타는 기꺼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아테네에 맞섰고, 마침내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졌다. 페르시아가 침략했을 때,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싸웠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외세가 물러나자 갈라서더니,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꼴이 된 것이다.27년의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델로스의 중요성은 크게 줄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 말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원정에 성공한 후에도, 기원전 150년께 로마가 그리스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잡은 뒤에도 델로스의 중요성은 여전했다. 특히 종교적 중요성은 퇴색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집트 신들을 위한 신전까지 더해지면서 더욱더 커졌다.

 

4년마다 열린 델리아 축제

 

기원전 9세기부터 델로스는 4년마다 ‘델리아’라는 축제를 개최하였고, 규모는 다소 축소되었지만 6세기부터는 매년 ‘아폴로니아’ 축제를 열었다. 특히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면서 축제의 규모와 의미는 더욱 커져,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열렸던 올림피아 제전에 버금가게 성장했다. 델로스의 축제는 아테네인들이 주도했다. 아테네는 해마다 델로스섬에 사절단의 배를 보냈다. 고물에 화려한 꽃장식을 한 이 배는 ‘테오리스’라 불렸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탔던 배를 기념하는 것이었는데, 사연은 이랬다. 아테네가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과 전쟁에서 패한 후, 9년마다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될 미혼 여성과 남성 일곱 명씩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세 번째 시기가 왔을 때, 테세우스는 열네 명의 일원이 되어 크레타로 떠났다. 그는 아폴론에게 기도했다. “제가 살아 돌아온다면, 델로스섬으로 매년 사절단을 보내겠습니다.” 괴물을 죽인 테세우스는 약속을 지켰고,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배가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돌아올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깨끗이 하고 사형집행도 하지 않았다. 플라톤의 <파이돈>에 따르면, 테오리스 배가 델로스로 떠난 다음 날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려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배가 돌아올 때까지 집행되지 않았다. 그 덕에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오랫동안 철학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폴론은 소크라테스를 사랑했던가. 그 이전에 이미 델피의 아폴론 사제 피티아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내린 터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무지한 줄 모르고 뭔가를 안다고 떠들어댔던 반면,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르고 있던,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알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아폴론보다 하루 빠른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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