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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남는 건 감정뿐 / 조이스 박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3. 20:34

[세상 읽기] 남는 건 감정뿐 / 조이스 박

등록 :2020-10-22 18:25수정 :2020-10-23 02:40

 

조이스 박 ㅣ 영어교육가·에세이스트

 

영화 <유스>(Youth)를 보면 은퇴를 앞둔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의 친구 믹 보일은 그 쓸쓸한 노년을 마주하며 그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남은 건 감정뿐이야(Emotions are all we’ve got).” 인생 선배들 말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추억들이 남는다고 한다.

 

이후 그림책 수업을 하는 분들과 만나 이야기 나눈 일이 있었다. 시니어를 위한 그림책 수업을 하는 분들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들과 수업을 하면 그 반응이 정말로 다채롭고 풍성하다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터져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지금 60대, 70대 이상인 세대는 어릴 적에도 그림책을 본 적이 없고, 아이들을 키우며 읽어주면서라도 그림책을 볼 수 있던 세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분들에게 그림책은 시각적 성찬이 벌어지는 벅찬 경험이다. 그림은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감정 반응을 쉬이 불러일으키는 매체다. 또한 그림책은 상당한 문해력이 요구되는 성인용 소설이나 인문서처럼 문턱이 높지도 않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쉬운 글들로 쓰여 있다. 예술 매체인 미술처럼 어렵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쉽게 빌려 와 아름다운 그림들을 탐닉할 수 있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이런 그림책은 할머니들이 수십 년 해묵은 감정에 물꼬를 터준다. 그림책은 감정들이 엄한 데로 터져나가지 않고, 가만가만 흘러나와 피어나게 해주는 장을 열어준다.

 

영화 <유스>에서 말했던 대로 감정이 중요하다. 수십 년 살며 그림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을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도처에 있다.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오로지 생존이 목표였던 세대는 당신들의 감정을 톺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저 혼란스러운 감정은 범벅으로 어우러져 당신들 내면에서 수십 년을 꿈틀거렸으리라.

 

가장 쉬운 감정은 분노다. 감정적인 여유가 없는 이들조차도 이 감정은 쉽게 표현한다. 분노의 물꼬를 터서 밖으로 표출하는 게 가장 쉽다. 살펴보면 길거리나 대중교통 수단에서 화를 내는 할아버지들과 마주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자리가 없다고, 혹은 빨리 비키지 않는다고 버럭 화를 내는 할아버지들을 꽤나 많이 본다. 한국의 힘들었던 생존 환경도 이런 할아버지들의 분노에 한몫을 했겠지만, 남자들의 경우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문화 역시 큰 몫을 했다. 가부장이라는 짐을 짊어진 남자들에게 감정 표현은 사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이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은 분노밖에 남지 않게 되었나 싶다. 감정을 밖으로 끌어낼 채널이 분노의 채널 외에는 없는 상태로 노년이 된 것이다.

 

할머니들 중에는 자식들, 특히 가장 만만한 딸에게 수십 년 묵은 감정을 쏟아내는 분들 얘기가 주변에서 종종 들려온다. 내 또래 딸 중에는 이런 어머니 때문에 수십 년을 어머니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살아오며 괴로워서 우는 이들이 적잖이 있다.

 

감정은 혼란스러운 덩어리 범벅인 상태로 수십 년을 두면 안 된다. 감정들을 따로 떼어내어 이 감정은 아픔, 이 감정은 슬픔, 이 감정은 후회, 이 감정은 미련… 이런 식으로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고, 왜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지 들여다보고, 그 아픔은 달래고, 그 슬픔은 울어주고, 그 후회는 증발시키고, 그 미련은 녹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을 끌어내는 길들이 다양하게 생긴다. 감정의 길이라고는 분노가 파놓은 고랑밖에 없어서 남에게 터뜨리는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가만가만 여러 갈래로 흘러나오게 해서 고이고이 갈무리하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후자의 방식이 삶을 다채롭게 만들고, 삶의 끝자리도 풍성하게 한다.

 

노년의 삶의 질은 과연 감정이 좌우한다. 감정이 흘러나오는 길을 젊어서 많이 만든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감정의 추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삶이 고단했던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이 이런 감정의 길을 내는 내면 성찰을 해볼 여유가 없이 살아오셨다는 점이다. 시니어 그림책 수업이 그 와중에 놀라운 것은 직관적인 그림과 쉬운 글로, 평생 처음 노인분들이 꿍쳐두기만 했던 감정을 끌어내보는 작은 기적을 일구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이런 작은 경이들을 보고 싶다면, 노인분들께 그림책을 권해드려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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