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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의 세시반] 어느 철자법 광신자의 최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6. 04:38

[이충걸의 세시반] 어느 철자법 광신자의 최후

등록 :2020-10-25 16:14수정 :2020-10-26 02:36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어느 자리에서 나의 악습이 도졌다. 누가 “그러다간 옛날의 전차를 밟을 거야”라며 부하 직원을 몰아세웠기 때문에. 처음 그가 ‘화룡정점’이라고 했을 땐 실수 같았는데 신조어까지 만들며 다그치자 더는 참지 못했다. “‘전차’가 아니라 ‘전철’을 밟는 거죠. ‘전 시대의 잘못을 반복하다.’ 그리고 ‘화룡정점’이 아니라 ‘화.룡.점.정.” 걱정은 좀 됐다. 어떤 사람은 동정은 몰라도 모욕은 못 참으니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자리의 누구도.나는 늘 오자와 부정확한 인용, 쉼표 없는 장광설, 번역 투의 비문 앞에서 성에 제거 기능이 없는 냉동고처럼 얼어붙었다.

 

언어를 대하는 왕성한 규율과 문법의 유희에는 소수만 동의하겠지만 우린 다 남들에게 용납받지 못하는 것 하나씩은 갖고 있다.가끔 술자리에서 문제를 냈다. 다음 중 한자가 아닌 것은? 1. 대관절. 2. 어차피. 3. 도대체. 4. 철부지. 정답은 4번. 완전한 답은 아니다. 분별을 뜻하는 ‘철’과, 알지 못한다는 ‘부지’(不知)의 결합이라서. 와인 마시면서 무슨 한글 퀴즈냐는 이도 있지만 나의 대답은 “남들 험담하는 것보단 낫다.”맞춤법 강박은 예전에 더 심했다. 내 친구는 군대 가서 처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혹시 ‘마춤법’이 틀리더라도 이해하고 읽어줘.” 나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시작부터 ‘맞춤법’을 삐끗한 친구의 스트레스를 그땐 몰랐다.

 

어법의 샤일록을 자처하자 에피소드가 작렬했다. 레스토랑 메뉴를 펼치면 오자가 물고기처럼 튀어 올라 그곳의 무신경함을 고자질했다. 그때마다 펜을 꺼내 그 위에 교정을 보며 말했다. “여기 다시 왔을 땐 수정된 메뉴로 주문하고 싶어요.” 그들은 여태 아무 문제 없는 메뉴판 갖고 미발육된 목소리로 훈장질하는, 생전 첨 보는 인간형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요’라는 고궁 잔디밭 푯말을 가리키며 관리 직원에게 “‘요’는 연결형 어미고 ‘오’는 종결형 어미니까. ‘마시오’라고 해야죠!” 하며 따지고, 월드컵 경기장에서 <투란도트>를 볼 땐 ‘상냥한’의 오기인 ‘성냥한’ 자막에 오페라의 감흥을 다 잃어버리고, ‘에레베이터’로 표기된 공연장 엘리베이터 앞에선 이걸 누구한테 말하지? 혼자 분주하던 시절. 텔레비전에는 ‘곁을’과 ‘끝을’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촉망받는 배우가 너무 건전한 목소리로 “어둠의 ‘끄츤’ 멀지 않습니다”, 광고 카피를 읊으면 “‘그츨’이 아니라 ‘끄틀’이다, 바보야!” 하며 채널을 돌린다. 국가 대표급 여가수가 ‘내 겨츨’로 시작하는 데뷔 때 노래를 몇십 년 지나서까지도 ‘내 겨츨’로 발음하면 노래의 기쁨 어느덧 사라지고 노래의 슬픔만 남는다. 그게 받침 ‘ㄷ’, ‘ㅌ’이 조사나 접미사의 모음 ‘ㅣ’와 만났을 때 구개음 ‘ㅈ’, ‘ㅊ’으로 바뀌는 구개음화야? 국어를 라틴어로 배웠어? 주변 아무도 몰라? 작사가는? 소속사는? 녹음실 음향 기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이다. “말이라는 게 의미만 통하면 되지, 뭘 그렇게 따져?”나도 나를 흉보았다. 네가 무슨 주시경 박사야? 현대 조선 어학의 공로자 되시게? 방심하면 비극적 농담의 희생양이 되는 세상에 어법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러나 모두가 언어의 수렁에 빠졌다. 유행어를 쓰면서, 아이들의 요즘 용어에 당황하면서. 흥미롭지만 변덕스러운 철자법 히스테리, 까탈스러운 이상주의 분야로서의 문법 혐오는 또 다른 전염병이 되었다.

 

한편, 글 쓰는 이가 여러 텍스트를 실험할 때 문법이 배제된다면 딴 사람 연주만 듣는 바이올리니스트와 같을 것이다. 그는 더 어려운 경계로 나아가기 전, 기본 포지션과 스케일을 익히고 언젠가 악기를 마스터해야 한다. 축구팀도 경기만으론 불충분한 것. 동작의 기초를 새로 채우고 나쁜 습관을 캐치해야만 개별적 부분에서 능숙함을 얻을 것이다.

 

언어학의 가설은, 가장 두드러지는 말의 특징이란 우리를 창조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단어가 태어나고 다시 죽는 언어의 삶 속에서 나는 우긴다. “젊어서 문법이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면 늙어서 날카로운 정신을 유지할 거야. 구조가 단순한 말만 하면 60년쯤 지나 바보가 될걸.”사람들은 얼굴로 상대를 판단한다. 그러나 말은 얼굴 이상의 기준이다. 허점투성이 언어는 배의 바닥에 쌓이는 돌 더미 같아서 곧 가라앉게 만들 것이다. 부정확한 표기는 그 배를 겨냥한 포경선의 화살 같아서 배를 부술 것이다. 말 주위를 헤매는 진실은 언어와 혼합될 때 본래 얼굴을 드러낸다. 운이 좋거나 충분히 애썼을 때만 알 수 있는 그 사람의 본질을.내 말은, 언어는 골칫덩이이자 실재이며 에너지. 함부로 말하면 함부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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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충걸의 세시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