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년(숙종 46년) 4월 6일, 큰 학자로 영의정의 벼슬을 지낸 탁월한 정치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태어났습니다. 조선후기 정치가 조금 바르게 되고, 국운이 조금 펴도록 선정을 베풀었던 영조와 정조 시절, 가장 큰 영향력으로 나라의 기강을 세우며 백성을 위한 국정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거대한 기둥 역할을 했던 정치가는 채제공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든든한 후견인이자, 돌봄을 아끼지 않은 번암인데, 다산 또한 번암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대선배 정치가로 여겼습니다.
天挺人豪曠古今 고금에 유례없는 하늘이 낸 호걸이라 靑邱社稷繫疏襟 우리나라 사직이 그 큰 도량에 매여있었소 都無夭閼群生志 뭇 백성의 뜻 억지로 막는 일 전혀 없었고 恰有包含萬物心 만물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있었다오 ……중략……
天下百年無此氣 100년 가도 이 세상에 그분 기상 없을 테니 城中萬姓倚誰生 이 나라 만백성들 누구를 기대고 살리오 三朝白髮魁巍象 세 조정을 섬기면서 머리 허예진 우람한 기상 歷歷回思淚滿纓 옛일을 생각하니 갓끈에 눈물이 흠뻑 「번암채상공만(樊巖蔡相公輓)」
번암 상공의 타계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지은 다산의 만시입니다. 아무리 성난 파도 같은 반대파의 모함도 우뚝 선 강물 속의 지주(砥柱)로 버티며 막아주었던 채제공, 100년 만에 한 번 있을 법한 뛰어난 정승, 만백성이 이제는 누구에게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탄식 속에는 다산 자신의 외로운 신세가 잘 나타나 있는 애절한 내용의 글입니다.
영조 때도 번암은 ‘사직신(社稷臣: 국가를 책임지는 정치가)’이었지만 정조 때는 참으로 책무를 제대로 했던 ‘사직신’이 채제공이었습니다. 번암의 막역한 친구이자 정조 때 형조판서로 글 잘하고 학문이 높던 해좌 정범조(丁範祖)가 채제공의 신도비문에 첫 번째의 칭송이 바로 ‘사직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산도 ‘청구사직(靑邱社稷)’이 그분에게 달려 있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국가를 책임지고 이끌었던 대신(大臣), 선조 때의 유성룡이 나라를 건져낸 사직신들이었다면 조선후기, 사직신이라는 호칭은 유일하게 채제공에게만 가능했음을 다산은 분명히 밝혔습니다.
당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하고 11세의 세손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정조가 등극하던 그 난국의 시절, 정조가 임금이 된 뒤에도 정권이 안착을 못하고 흔들리던 정국이었습니다. 채제공의 지혜와 능력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선정을 베푼 정조대왕의 치세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산 같은 신진 학자 벼슬아치들이 거대한 집권세력의 틈새를 뚫고 소외세력에서 주류에 들어갈 길을 열어주었던 사람도 채제공이었습니다.
정조24년 재위기간, 10년을 정승으로 재직하면서 채제공은 참으로 위대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산의 기록, 「번옹유사(樊翁遺事)」나 「번옹화상찬(樊翁?像贊)」의 글에서 채제공의 업적은 그대로 알아낼 수 있으니, 긴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번암이 태어난 충청도 청양군을 찾아갔습니다. 타계한 때로 230년이 다 되어, 번암의 생가는 지금까지 어디인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번에 번암의 종부인 김양식(시인) 여사가 함께해서, 그곳 고로(古老) 등의 말까지 참고하여,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구재리(九在里) 27-2, 요즘 지명으로 화성면 어재울길 94-3이 번암의 생가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곳 집 앞에는 샘이 철철 흐르고 있어, 그 물을 마시고 자랐던 채제공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요즘 나라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법무부와 검찰이 대립하고, 정부와 감사원이 대립하는 이런 난세,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라도 번암의 생가가 복원되고 유적지가 꾸며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충청남도나 청양군 당국자들의 높은 정성이 나오기만 바랄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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