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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첨단 산업, 종이신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8. 05:20

[정희진의 융합] 첨단 산업, 종이신문

등록 :2020-10-26 17:32수정 :2020-10-27 02:37

 

정희진의 융합 _09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아는 것‘만’ 보이는 법검색어는 이미 아는 정보온라인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정보의 그물종이신문은 ‘아는 방법’과 ‘모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융합은 무엇을 모르는가를 탐색하는 사유

글은 필자와 편집자의 협업이다. 글쓴이는 자기 글을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편집자에게 매우 의존적인 필자에 속한다. 글을 보낼 때는 언제나 이렇게 쓴다. “얼마든지 고치셔도 좋습니다. 최대한 ‘빨간 펜’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후사하겠습니다^^”.

 

다만 그들도 완벽하지 않으므로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내 입장을 설명하고 합의를 본다. 그 과정에서 나도 편집자도 배운다. 대개 젠더와 포스트 식민주의 관련 용어가 많다. 대표적인 단어가 ‘(지식의) 발명’이다. 나는 ‘발명’이라고 썼는데, 편집자들은 대개 ‘발견’으로 고친다.

 

자연과학을 비롯, 모든 지식은 발명된다. 발명은 특정한 시각에서만 고안되기 때문에, 그 시각을 갖기 이전에는 우리의 인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상적 대화, “그런 말 처음 들어보는데?”가 대표적 반응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것 이상을 알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삶, 즉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없다. 모르는 것도 아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리상의 발견이 아니라 지리상의 발명이 맞다. 서구가 동양을 찾아 나서겠다는 의지와 관점이 없었다면, 그 사건도 없었다. 또한 콜럼버스가 만난(?) 사람들은 서구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 속에서 만들어진 이들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시작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입장에서, 그들의 생각의 한도 안에서만 가능한 가상의 동양에 대한 생각이다. 당연히 현실의 동양이 아니다. 더군다나, 서구(‘The Western’)에 대항하는 동양이라는 동질적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내가 지구상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나는 당신을 드디어 발견했어요! 이렇게 누추하게 살고 있었군요, 당신이 가진 것을 제게 모두 주시면, 제가 잘살게 해 드릴게요”라고 한다면, 그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한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부동산 개발도 같은 논리가 아닌가.

 

검색은 이미 아는 것

 

우리는 종이신문의 핵심 요소가 ‘신속, 정확, 중립’이라고 배웠다. 물론, 어느 매체도 위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 인터넷 신문이 빠르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신속’은 내용에 의해 달라진다. 어쨌든 신문의 지면과 온라인 버전은 내용도 다르고, 발행 시간도 다르다. 온라인과 종이신문이 같이 운영되면서, 종이신문은 대표적 사양 산업으로 간주되고 있다. 종이신문을 둘러싼 자조나 조롱도 흔하다. “저는 신문이 아니라 신문지(紙)를 만들어요”라는 기자도 있고, “구한말? 아직도 신문을 보냐?”, “보는 사람이 있긴 있군요!”….

 

종이신문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천만의 말씀! “없어져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발행 부수는 적어지겠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엘리트 자본가’는 절대 종이신문을 없애지 않는다. 자기 자녀를 위해서라도 발행할 것이다. 종이신문은 아는 방법, 지식에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된 이슈이다. 빈부격차‘보다’ 무서운 현상이 지적 양극화고, 급속도로 실현되고 있다. 종이신문은 ‘아는 방법’과 ‘모르는 방법’을 가르는 중요하고 일상적인 매체이다.

 

“어떤 사람이 지식인일까요?” 간혹 받는 질문이다. 나도 ‘지식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말도 이상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르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데…. 거듭 반복하면, 우리는 아는 것 내에서만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검색은 정보를 얻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검색은 정보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입력된(발견된) 것을 더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아시다시피,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최근 나는 “braid”(노끈, 땋기)라는 단어를 검색했는데, 왜 이 단어가 ‘노끈’으로 번역되었는지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다. 이 단어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는데, 내가 검색창에 ‘재입력’한 것이다.

 

검색은 입력창(入力窓)에 아는 것을 넣는 행위다. 모르는 것은 입력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다른 경험이 없다면 영원히 모르는 세계다.

 

아는 것‘만’ 보인다

 

종이신문의 존재는 개가식·폐가식 도서관, 오프라인·온라인 서점을 둘러싼 논쟁과 연결된 중대한 문제다. 폐가식 도서관은 자신이 원하는 책, 즉 필요한 책을 신청해서 읽는 이용 방식이다. 반면 개가식은 자신이 돌아다니면서 몰랐던 책을 발견하는데, 그것이 발명에 가깝다. 나는 ‘성향이 다른’ 종이신문 두 개를 정기구독하고 있다. 뉴스 습득과 공부를 위해 정독한다. 전체 면을 다 본 다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한다.

 

같은 신문도 보는 방식, 웹 사이트이냐 종이신문이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읽는 형식’이 ‘아는 내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보면 신문사 혹은 포털 사이트에서 메인에 올린 것 혹은 자신이 검색한 것만 읽게 된다. 당연히 광고와 관련이 있다. 피디에프(PDF)로 전체 지면을 올리는 신문사도 있지만, 그렇게 읽는 독자는 많지 않다. 요즘은 빅데이터 시대라,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기사만 올린다. 우리는 남들이 선택한 정보만 보게 된다. 그래서 매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해지거나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두 경우 모두 페이크 뉴스가 섞여 있다. 공동체가 붕괴하는 지름길이다.

 

인터넷과 관련하여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 “정보의 바다”가 아닐까. 바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인터넷은 단어 뜻 그대로, 바다가 아니라 특정 정보만 담는 그물망들의 간격(inter-net)이다. 우리가 찾는 정보는 이미 누군가 쳐놓은 그물 안에만 존재한다. 정치권과 포털 사이트 간의 협력(?) 스캔들이나 자본의 정보 통제는 일상적인 현실이다. 인터넷은 항구에 정박된 여러 가지 선박들일 뿐이다. 그런 배에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다.

 

아는 방법과 모르는 방법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아는 방법과 모르는 방법, 자체에 대한 고민이다. 서가에서 모르던 책을 ‘꺼내 읽는 것’과 모니터에 ‘아는 책을 입력하는 것’, 후자는 이미 공부가 된(?) 것이다. 종이신문을 열람(閱覽)하는 것과 이미 누군가의 수차례 선별을 거친 온라인 기사를 읽는 것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모니터는 내가 읽은 것이 어떤 맥락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인터넷 정보를 맹신하면서 자기 생각은 없고 고집 센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번 이 지면에 한글 전용과 관련된 글을 썼을 때다. 당연히 “專用”이 맞다. 이건 기본이다. 그런데, 내 생각을 확신하지 못하고 한 번 더 체크한답시고 송고 직전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유력 포털 사이트들 모두에서 “傳用”으로 나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인터넷의 권위에 의지, “傳用”으로 고쳤다. 댓글에서 지적도 받고, 개인 메일로 상세한 가르침을 주신 분도 있었다(“專用”이 맞지만,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 샘’의 오류라고 한다). 자책하는 나를 ‘위로’한 독자분이, “그러니, 평소 인터넷을 너무 믿지 마시고요”라고 했을 때, 나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혼자 울었다(?).

 

수험서와 참고서로만 채워지지 않는 다양한 책이 구비된 동네 서점, 좋은 책인데 안 알려진 책만 모아놓은 서점, 장서가 많은 도서관을 바란다. 아직은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면, 일단 종이신문부터 시작하자. 최소한 신문이라도 온라인에서 읽지 말고, 종이신문으로 읽어야 한다. 종이신문이 나무를 파괴한다고?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소용되는 부패하지 않는 부품, 소모품, 고장 난 컴퓨터가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나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융합은 고정관념과 충돌하고자 하는 의지다. 종이신문에 대한 선입견부터 버리자. 안목을 넘어 선구안(選球眼)을 기르려면, 우리 몸을 덮어쓰고 있는 그물에서 탈출해야 한다. 종이신문의 운명은 매체 환경이 아니라 자체 콘텐츠에 달려 있다.

 

※이 글은 “아는 것=보는 것”이라는,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단어로 점철되어 있는 장애인 차별적인 글이다. 시각장애인은 다른 방식으로 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아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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