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세상읽기] 깨지 못한 신화, 시험을 다시 들여다본다 / 이병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20. 06:17

[세상읽기] 깨지 못한 신화, 시험을 다시 들여다본다 / 이병곤

등록 :2020-11-18 16:48수정 :2020-11-19 02:39

 

고3을 대상으로 한 첫 수능 모의평가인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지난 5월21일 오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1교시 시험을 치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병곤 ㅣ 제천간디학교 교장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문제지를 검색해 내려받았다. 70분 안에 정답 고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30번 문제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형식만 영어 시험이었지 실제로 지문 내용은 미국의 논리학 기초 교재에서 뽑은 듯 여겨졌다. 수험생들이 말하는 ‘킬러 문항’이 아닐까 추측된다. 실제로 수능 수학 시험에는 정답률 2%라는 ‘진짜 킬러 문항’이 존재한다. 오로지 등급을 매기기 위해서다. 2015년 전국 고교생 수학 포기자 비율은 59.7%라 한다. 킬러 문항과 수포자. 기괴한 병존이다. 과목별로 고난도 문제들의 정답 찾기에 최적화되려면 우리 수험생들은 얼마나 학업에 매진해야 할까. 간만에 수능시험 한 과목을 풀어보니 특별훈련 받은 선수만 오를 수 있는 이종격투기 케이지 속을 잠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다.

 

문득 수십년간 운전 잘해온 사람들에게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다시 보게 하면 어느 정도 비율로 통과할까 궁금해졌다. 질문은 꼬리를 잇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모 역할은 시험으로 부여받았던가? 시험은 과연 사람의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도구인가? 사회의 여러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능력, 성실성, 진실함은 대학 서열과 거의 관련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는 열아홉살 즈음에 결정된 ‘대학의 명칭과 서열’이 평생을 좌우하도록 방치한다. 대학 이름을 획득하여 지대(地代)를 창출하는 셈이다. 돈을 모아 처음 땅을 사기 어렵지만 일단 한 번 구입한 뒤에는 안정적으로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 자산 개념으로서의 대학은 상위권일수록 높은 지대 수입을 보장한다.

 

문제는 누가 이 지대를 더 쉽게 취득하느냐 하는 지점이다. 올해 <한국사회학> 학술지에 발표된 김창환·신희연의 연구에 따르면 계층 10분위 가운데 1분위씩 높아질 때마다 엘리트 대학에 입학할 확률이 1~1.5%포인트씩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경향은 수능, 내신, 논술 점수의 반영 비중을 어떻게 바꾸든 상관없이 유지된다고 했다. 즉, 시험제도는 결코 우리가 믿는 수준만큼 공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시험에 관한 한 ‘터널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폭 좁은 신화를 가슴 깊숙이 품고 산다. “애들은 정기적으로 시험이라도 쳐야 겨우 공부한다. 국영수사과는 배워야 기초학습을 다질 수 있지. 시험과 경쟁으로 이나마 산업화를 했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누가 뭐래도 시험은 공정한 선발 체계이다. 학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며, 시험은 그것을 검증하고 유지하는 수단이다.”

 

대학입학시험을 객관식 선택형 문제로 운영하는 나라는 극소수다. 대부분 주관식 논술형으로 출제한다. 과목별 총점을 합산하여 입시 사정자료로 삼지 않고, 내신 성적을 등급으로 비교 평가하여 산출하지 않는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도달 목표를 중심에 두고 개인별 학점을 부여하며, 그 과목별 기록을 대학입학 면접 심사 때 참고하거나 활용한다. 그뿐이 아니다. 공무원, 교사, 대기업 신입 직원들을 선발할 때 시험으로 뽑지 않는 나라가 훨씬 더 많다. 객관적인 시험 성적이나 자격증 유무보다는 채용 인터뷰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 요즘 ‘뜨는’ 교육기관인 미네르바 스쿨의 스티븐 코슬린 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필요 없는 능력이 있어요. 바로 시험 보는 능력입니다. 졸업 후에 시험 볼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우리 학교 고3 아이들 18명은 수능을 28일 남겨둔 날부터 나흘간 학교 밖 특정 장소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인문학 캠프’를 열었다. 두셋씩 짝을 지어 하나의 모둠을 만들었다. 이들 모둠은 종교, 2차 세계대전, 대학, 페미니즘, 환경 분야를 주제 삼아 수개월 동안 자신들이 학습한 내용을 중심으로 청중 앞에서 발표한다. 학습량이나 표현력에 따라 발표문의 수준은 제각각이지만 공통된 것이 하나 있다. 자기의 의식이 성장한 만큼 스스로의 소신을 진솔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시험이나 자격증과 아무 상관 없다. 타인이 정한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속도로 자기의 관심 분야를 파고들어 가본다.

 

시험은 특정 시기의 능력 지표를 부분적으로만 드러낼 뿐 수험자의 총체적 성장을 보증하지 않는다. 경쟁을 배경으로 획득한 학습자의 성실성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스피드 카메라 촬영 범위만 벗어나면 곧장 과속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운전 습관을 꼭 빼닮았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시험의 영향력을 줄이기란 어렵다. 뾰족한 대안 없이 표류하는 사이, 올해 수능시험이 벌써 2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연재세상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