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조은 칼럼] ‘그들의 시간’과 만날 수 있을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2. 4. 06:53

[조은 칼럼] ‘그들의 시간’과 만날 수 있을까

등록 :2020-12-03 14:58수정 :2020-12-04 02:39

 

김종철이 안고 간 시대의 아픔과 어머니가 안고 간 시대의 아픔은 깊숙이 묶여 있다. ‘잊혀진 전쟁’ 속을 헤치며 무망하게 살다 간 ‘그들의 시간’과 환경 위기를 헤치고 살아갈 ‘그들의 시간’이 우리들의 시간 속에 있다. 그 간극을 우리의 시간 속에 담아내지 못하고 더 넓히고 있는 것 같은 한 해다.

코로나 팬데믹에 일상을 내준 스산한 연말에 마지막 칼럼은 어떤 아침 음악 방송 인트로처럼 “가볍지 않게 무겁지 않게”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다. 주변에 너무 아픈 삶도 죽음도 많아 ‘어쩌면 철 지난’ 이런 이야기를 써야 할까 주저하다가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안은 여전한 숙제 더미라는 생각에 내 일상의 깊숙한 자락을 꺼내 든다. 어머니가 몇달 전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라는 단어만 나와도 마음을 졸이며 혹여나 종전 소식이 없을까 뉴스에 채널을 맞추셨는데 무위로 끝났다. 어머니를 선영에 모시고 온 다음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어머니가 스물여섯에 혼자되셨고 아흔여섯에 가셨으니 그 일흔 해가 한국전쟁 발발 70년에 걸쳤다는 생각에 마음을 뒤척였다.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들의 시간’이 새로운 무게로 왔다. 선영은 새롭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6·25가 터졌을 때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제 넷 그리고 큰집의 장손까지 스무살 이상의 남자가 여섯 있었다. 전쟁 후 살아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들은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큰집 장손은 한 줌의 흙으로도 돌아오지 못했다. 선영에는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고향에서 희생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유택만이 있는데 어머니가 그 곁에 누우신 것이다. 어머니는 한때 “친정 산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달고 사셨다. 요즘 말로 ‘시월드’에 대한 반감과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언어인가 했는데, 전쟁의 참화를 피해간 친정 식구들 옆에 눕고 싶다는 다른 표현이었다. 마지막 순간에야 전쟁으로 풍비박산된 시댁 선영으로 가는 결정을 하셨다.

 

3년 전 본란의 필진 제의를 받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에 방점을 찍고 주저했는데 수락하고 나서 맨 먼저 한 일은 엉뚱하게도 필진의 면모를 들여다본 일이었다. 낙상으로 눕게 된 연로한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어 혹 칼럼 날짜라도 바꿔야 한다면 필진 중에 부탁할 사람이 있는가를 본 것이다. 같은 과 입학 동기인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이름을 보고 안도했다. 그런데 김종철이 우리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 삼우제를 지낸 바로 그날 그의 사십구재에 가야 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본란에 마지막 쓴 칼럼 날짜를 기억하는데 그날이 원래는 내 칼럼 날이었다.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오월 광주’ 때문에 그와 날짜를 바꿨다. ‘오월 광주와 우리 선생님에 대한 사유’라는 제목을 뽑아놓았는데 4월17일로 내 칼럼 일정이 잡힌 것을 보고 오월 첫 주에 배정된 김종철한테 연락했다. 칼럼 순서를 바꿔달라는 뜬금없는 내 요청에 그는 두말없이 “그러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은 그의 마지막 칼럼이 되었다. 이명 때문에 일상이 힘들었다는 것을 그가 떠난 뒤에야 알았다. 그가 떠나기 8개월 전쯤에 쓴 ‘툰베리의 결기’에서 기후위기를 알리며 “인류사회는 기후변화로 멸망하기 전에 인류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맑고 민감한 영혼들이 사라지거나 병들어버린 결과로 속절없이 붕괴할 가능성”을 예고한 칼럼 몇 줄이 자주 아프게 떠오른다. 그는 <녹색평론> 3년치 정기구독료를 보내면 “언제 폐간될지도 모르는데 뭘 3년씩 정기구독 하느냐”는 특유의 냉소적이면서 무심한 한마디를 전화선에 던지고는 했다. 그가 새벽 산책길에 유명을 달리한 날은 6월25일이었다. “오늘이 그 육이오 터진 날”이라고 지나가듯 흘리는 어머니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집을 나온 날이다. 사족을 덧붙인다면 어머니 때문에 칼럼 날짜를 바꿀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는 8월 초 내가 칼럼을 넘기고 마지막 수정 문의까지 답한 그날 조용하게 잠자리에 드셨고 다음날 아침 주무시듯 가셨다. ‘장산곶매 이야기 좀 빌려도 될까요?’가 어머니 가신 날 아침에 나온 칼럼이다.

 

본란에 칼럼을 쓰면서 얽힌 이야기를 되돌아보다가 한 시대는 어떻게 가고 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또는 우리는 ‘그들의 시간’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해 본다. 김종철의 글은 언제나 앞으로 올 ‘그들의 시간’을 향해 있었다. 환경 위기와 자본주의 탐욕 바이러스를 집요하게 경고하면서 미래의 그들이 살아갈 시간과 세상을 걱정했다. 반면 어머니는 70년 전 그날에 멈춘 ‘그들의 시간’ 속에 사셨다. 가실 때는 뒷사람이 손댈 일 없이 삶을 정리해 놓고 가셨다. 당신이 매일 손길을 주던 이층장에는 몇십년간 입은 한복 몇 벌과 버선 세 켤레 그리고 동정 다섯 개가 남겨져 있었다. 환갑을 넘기신 후에는 새 옷을 사지 않으셨고 “한복은 동정만 갈면 항상 새 옷 같다”면서 가실 때까지 당신 저고리의 동정을 손수 손질해 입으셨는데 쓰시던 동정 한 죽에서 다섯 개가 남은 것이다. 언제나 과거의 시간에 머문 어머니가 20년분 간장을 담가놓고 “네 생전에 간장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신 말씀이 어머니에게 드물게 들은 미래의 시간이었다. 요즘 김종철과 동기라는 것을 알게 된 지인들 중에는 “앞으로 <녹색평론> 어떻게 될까요”라고 내게 묻는 경우가 꽤 있다. 이럴 때는 어머니가 담가놓은 20년분 간장 생각을 한다. 최소한 우리 생전에 <녹색평론>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김종철이 안고 간 시대의 아픔과 어머니가 안고 간 시대의 아픔은 깊숙이 묶여 있다. ‘잊혀진 전쟁’ 속을 헤치며 무망하게 살다 간 ‘그들의 시간’과 환경 위기를 헤치고 살아갈 ‘그들의 시간’이 우리들의 시간 속에 있다. 그 간극을 우리의 시간 속에 담아내지 못하고 더 넓히고 있는 것 같은 한 해다. 우리 대학 입학 동기들 소모임에 ‘녹평회’가 있었다. <녹색평론> 김종철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을 이끌고 있던 강정구와 함께한 모임이다. ‘우리의 시간’에서 가장 다급하고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이슈에 동기 두 명이 앞장서 논쟁적 담론을 이끌고 있었는데 정작 우리 동기들의 공식 모임의 포럼에는 둘 다 한 번도 연사로 초대받지 못했다. 이 점이 지금 마음을 무겁게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야기한 근본적 문제에 눈감은 채 ‘뉴노멀’ 타령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어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미국 대선 윤곽이 나오자마자 우리의 제1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외신기자 클럽에서 아무렇지 않게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핵 개발해야”라고 발언하지 않았다면 이 칼럼이 조금은 가벼워졌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과 슬픔과 책무가 한꺼번에 무겁게 몰려온다.

조은ㅣ사회학자·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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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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