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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람_칼럼 읽는 남자] 이 글은 왜 긴데? / 임인택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2. 18. 02:49

[칼람_칼럼 읽는 남자] 이 글은 왜 긴데? / 임인택

등록 :2020-12-16 18:52수정 :2020-12-17 02:37

 

임인택ㅣ여론팀장

 

130명 정도의 사내외 필자가 쓰고 있는 <한겨레> 칼럼 중 가장 짧은 코너는 국어학자인 김진해 경희대 교수의 ‘말글살이’다. 200자 원고 4매, 합해 800자쯤으로 매주 월요일 지면 한편을 메운다. 활자를 덜고 깎고 다지느라 배는 진땀의 냄새가 있다. 기자 출신 작가 김훈의 ‘거리의 칼럼’은 비슷한 크기이되 좀더 유연했다. 그래봐야 최근 마지막 칼럼 ‘다시, 라파엘의 집’은 907자, “그의 50주기를 앞두고 이런 글을 쓰는 일은 진땀 난다”며 호명한 ‘전태일’은 839자였다.

 

짧다 작다 해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물리에선 밀도, 화학에선 농도라 부르고, 글에선 통찰 내지 ―직간접 경험을 감각시키는― 도발성이라 이르는 요소가 있기 때문일 거다. 윤동주의 ‘서시’가 120자, 김춘수의 ‘꽃’이 200자, 그리고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900자가 조금 안 된다. 지어진 지 반세기가 넘은 2000년대 초입, 현역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힌 세 편의 길이이자 무게인 것이다.

 

요즘 우린 거의 매주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치 지지율’을 조사하고 트로트의 귀환을 얘기할지언정, 21세기 첫 20년을 위로한 시, 이끈 소설 같은 것은 뽑지도 기념하지도 않는다. 그런 판국에 더더욱 존재 미약한 짧은 글은 왜, 어떻게 가능한가.“이제 (4매가 익숙해져) 글을 늘리는 게 더 어렵겠다”는 김진해 교수는 사석에서 “썼다 덜어낸 내용을 보면 대부분 넋두리”라고 말했었다. 보통 10매까지 썼다 6매를 버린다는데 함박눈 온 13일 한참 늦은 원고 마감 메일엔 “눈에 깔려 있는 걸(글) 주워 말리느라…이리 늦었네요”만. 사실 올여름 개편 때 분량 큰 코너로의 이동을 타진하다 관뒀다. 당초 김 교수가 더 주저했다. 덕장에 오래 널어 찰진 글 덩어리를 다시 물에 풀어헤친다면 그건 최고급 테일러드 슈트를 물빨래하는 일만큼 나쁠 테니까. 이런 칼럼과 맞닿겠다. “군더더기 말 때문에 속내를 들키는 경우가 많다. 나/우리의 ‘속내’는 온갖 판단과 부조리와 모순과 욕망과 이기심과 열등감과 속물근성과 허세로 가득하다. ‘진솔함’은 이 추악한 속내를 남김없이 쏟아내는 게 아니다. 그걸 없애는 일의 어려움(불가능함)과 실패를 실토하는 거다. 세상은 추악한 속내를 숨기질 못하고 실행에 옮기는 자들 때문에 추해진다.”(11월23일치 25면 ‘생각보다’)

 

역대 대통령의 정권 후반기 발언 가운데 가장 ‘참신한 도발’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자임한 이명박 17대 대통령(현재 수형 중)의 ‘진솔함’ 덕분 아닐까 싶다. 2011년 9월30일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에 예정 없이 들어간 그는 “(그러한 정권이기에) 조그마한 허점(또는 흑점)도 남기면 안 된다”며 긴 회의를 장식했다. 이는 여생의 ‘족쇗말’이 되고 말았는데, 정권 이양 뒤 엠비(MB)의 발언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후과가 커졌다는 후일담 보도가 있었다. 측근들 비리에 대한 분노, 각오 등이 속내에 섞여 있었단 거다. 덧붙여 제대로 설명했다면 달라졌을까.

 

지워져야 할 말이나 문장이 지워지지 않을 땐 필시 추문을 만들고, 무엇보다 자신을 속여 이롭지 못하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팩트 간의 관계를 강제하지” 말라며 “태극기가 펄럭인다. 오늘은 3·1절이다”라고 하면 될 상황을 “오늘은 3·1절이기 때문에 태극기가 펄럭인다”로 쓰지 말라 했고, 내용의 허술함을 감추어 자신을 기만하기에 “‘닭이 울었다’고 쓰면 되지 ‘닭이 꼬끼오 하고 울었다’고 쓸 필요는 없다” 했고, 결국 “지우고 다시 쓰다 보면 생각이 변화하고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가짜 생각’과 ‘진짜 생각’이 구분된다”고 일렀다. 지워진 말은 지워졌을 때 비로소 의미를 얻고, 특히 덜어내는 퇴고는 기술이 아니라 ‘언어적 인간’의 자세인 셈이다.

 

하찮은 글의 종목일지언정 기사 쓰는 일을 15년 넘게 하고 때마침 전문 필자들의 여러 글들을 보며 글의 태도와 무게에 대한 생각을 새삼 하고, 깊이 되짚는 시간을 갖게 된다.

 

엠비가 무슨 권법인 양 ‘도덕완벽정권’을 강조한 때가 잔여임기 514일인 때다. 문재인 정부가 당도한 지점(17일 기준 510일)이다. 진귀한 말이 아니라 진솔한 말이 필요하다. 말미의 말이 아니라 초입의 말이, 여전히 필요하다. 적시적소, 그 언어가 꼭 길 필요는 없다. 거기서도 왜곡하는 이들 있겠으나 여전히 듣고 읽으려는 이들이 많다.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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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칼람-칼럼 읽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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