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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필사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2. 12. 06:42

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필사했다

등록 :2020-12-11 05:00수정 :2020-12-11 14:00

 

김응교 교수 새 책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
윤동주 시에 나타난 백석의 영향 살펴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그린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역할을 맡은 배우 강하늘(왼쪽)과 동주의 사촌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의 모습. 영화에서는 몽규가 동주에게 백석 시집 <사슴>을 권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루스이소니도스 제공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

김응교 지음/아카넷·1만8000원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잼’과 도연명과 ‘라이넬·마리아·릴케’가 그러하듯이”(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마지막 부분)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넬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마지막 부분)

 

백석과 윤동주의 잘 알려진 두 시는 이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를 알려주는 증거로 꼽힌다. 그들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서구의 시인들 이름이 나란히 들어 있다는 점에서 증거는 유력해 보인다. 백석의 시는 <문장> 1941년 4월호에 실렸고 윤동주의 시는 같은 해 11월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 <사슴>(1936) 전체를 원고지에 정성껏 필사하고 표지까지 손수 그려 책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표지 아랫부분에는 1937년 8월5일이라고 날짜를 적어 놓았다. <사슴>은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었기에 책을 직접 구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필사본을 보관해 온 윤동주의 동생 윤일석은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윤동주가 필사한 백석 시집 <사슴> 중 ‘모닥불’ 부분. 말미에 “걸작이다”라는 평가가 붉은 색연필 글씨로 쓰여 있다. 윤동주기념사업회 제공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쓴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는 백석과 윤동주의 영향 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앞서 두 권의 윤동주 연구서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와 <나무가 있다-윤동주 산문의 숲에서>를 낸 김 교수의 세 번째 윤동주 관련서다. 윤동주의 <사슴> 필사본을 중심으로, “동주가 백석에게서 배운 부분, 인유(引喩)한 부분을 대상으로” 삼았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이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덜구에 천상수(天上水)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백석, ‘초동일(初冬日)’ 전문)“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엔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거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윤동주, ‘굴뚝’ 전문)

 

<사슴>에 들어 있는 시 ‘초동일’이 동주의 동시 ‘굴뚝’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고 김응교 교수는 본다. 필사본 시집 <사슴>에서 “아이들이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는 구절에는 밑줄이 쳐져 있고 “그림 같다”는 짧은 평이 곁들여져 있다. 백석 시에 나오는 무감자는 고구마를 가리키지만, 윤동주의 시에서는 그것이 감자로 바뀌었을 뿐 아이들이 감자(또는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장면은 동일하다.

 

“아침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백석, ‘추일산조’ 첫 연)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윤동주, ‘산울림’ 전문)

 

<사슴> 필사본에서 윤동주는 ‘추일산조’ 첫 연의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에 밑줄을 긋고 “좋은 구절”이라고 붉은 색연필로 썼다. 꿩과 산울림의 장난이 동주의 시 ‘산울림’에서는 까치와 산울림의 장난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판단이다. 또 “별 많은 밤/ 하늬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백석, ‘청시(靑枾)’ 전문)에서 보이는 우주적 상상력은 동주의 시 ‘별 헤는 밤’으로 이어진다고 김 교수는 본다.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흰색의 비교도 흥미롭다.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아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백석, ‘흰 밤’ 전문)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윤동주, ‘슬픈 족속’ 전문)

 

흰 색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백석의 시들에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흰색들을 “공동체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김 교수는 쓴다. 비슷한 맥락에서 ‘슬픈 족속’은 “네 가지 흰색 사물을 절취하여 한민족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응교 교수. 황문성 작가 제공

 

백석과 동주의 영향 관계는 개별 시구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백석의 시를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 모두 아동문학에 관심을 지녔으며, 한반도 이외에 만주와 일본에서 지내면서 디아스포라 또는 난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그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윤동주의 동시 ‘오줌싸개 지도’, ‘눈’, ‘호주머니’를 통해 두 시인이 주변인을 표현하는 양상을 비교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흰 바람벽이 있어’와 ‘별 헤는 밤’이 각각 흰 바람벽과 밤하늘을 스크린 삼아 삶을 노래한다는 점, 윤동주의 ‘서시’ 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傀於天,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의 번역이라면 백석의 시 ‘귀농’,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는 도연명 시 ‘귀거래사’의 전원정신이 엿보인다는 사실 등을 김 교수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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