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새마을 운동 시절 - 단편 [오승재 장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1. 9. 06:04

새마을 운동 시절 - 단편

은혜 추천 0 조회 7 20.12.29 10: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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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시절

 

눈까풀이 까칠까칠하고 무거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시력조절이 잘 안 되어 물체가 둘로 혹은 셋으로 보이다가 이내 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오늘도 나가야 했다. 9시부터 시작되는 교회의 대학생 클럽을 맡아 지도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장을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등이 오싹해지면서 등에서 땀이 쭉 솟는 느낌이 들자 나는 느른해지고 이날은 그냥 쉬고 싶다는 기분이 되었다. 주중은 학교 일에 바쁘고 주일에는 교회 일에 쫓기니 쉴 시간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꿈꾸듯이 지나갔다.

힘을 주어 눈을 뜨고 농촌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목전에서 야릇한 풍경이 전개되었다. 한 여인은 쌀가마인 듯한 것을 리어카에 싣고 괴성을 지르며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고 또 한 여인은 뒤에서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뒤뚱거리고 달려 따라 내려가고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괴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여인의 소리가 리어카에 짐을 싣고 힘 안 들이고 내려가는 쾌감 때문인지, 무거운 짐에 밀려 걷잡을 수 없이 밀려가는 공포와 전율에서 나오는 동물적인 비명인지 꿈속 같아 얼마 동안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가던 길에 우뚝 멈추어 서서 눈을 감았다. 달려 내려가는 리어카 앞에서 정신없이 놀고 있는 어린애 몇이 비명을 지르고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비켜, 비켜, 비켜라아.”

그러나 이 비명은 무언가가 나동그라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멎어버렸다. 눈을 뜨자 길을 따라 깊숙이 파 놓은 도랑에 리어카는 모로 처박혀 구십도 회전하고 두 바퀴만이 이쪽을 향한 채 공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내 뒤뚱거리며 뒤에서 달려가던 여인이 리어카가 넘어진 밭 둔덕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고, 흩어졌던 어린애들이 공포에 싸인 표정들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달려가자 여인은 흩어진 머리에 새파란 얼굴을 하고 다른 여인의 부축을 받은 채 밭 둔덕에 앉아 있었다. 외관상 크게 다친성싶지는 않았다. 쌀가마는 저만치 앞쪽 도랑에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어린애들도 다 무사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러나 머릿속은 비명으로 꽉 차서 그곳을 박박 긁어 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것이 요즘 자기 삶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신경질이 나고 답답한 것일까? 나는 집을 나오면서 아내와 말다툼을 한 것을 생각했다. 성경 찬송 책을 들고 막 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따라 나왔다.

“참 당신 약 안 먹었군요.”

“무슨 약을 먹어?”

그녀는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고단위 비타민 C와 간장약 프로헤파룸 골드를 들고나와 나에게 내밀었다.

“글쎄, 멀쩡한 내가 무엇 때문에 약을 먹어요?”

“언제나 드시는 약이잖아요. 당신은 간장이 나쁘고 요즘은 특히 피로해 보여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의사가 그 정도의 간디스토마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하지 않습데까. 그리고 내가 피로해 보이는 것은…”

“자요.”

아내는 다짜고짜로 약을 쑥 내밀고 물컵을 주었다.

“제발 우리 가짜 선전에 속지 말고 제정신으로 살아봅시다. 그 친구들은 생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 약을 팔아먹는다는 말이오. 우리 생각으로 살아보자구요.”

“글쎄, 어떻든 해로울 것은 없잖아요.”

“정신위생 상 해롭지 않소. 이건 남의 인생을 살아주는 거요. 시장에 가서 싸구려 상품이 있으면 엉뚱한 것을 사 들고 오지 않나. 이건 우리 필요 때문에 계획적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남의 필요 때문에 우리가 선택을 당하는 것이란 말이요.”

“그래, 내가 못 쓸 것을 사 오기나 했다는 말이요? 평소에 사려면 두 배 이상을 주어냐 한다는 말이에요. 남자가 소심하긴. 당신이 살림하시구려.”

나는 약을 꿀꺽 삼키고 나왔었다.

“아빠”

(그녀는 당신이라는 말을 못 쓰고 늘 아빠라고 불렀다.)

“왜 그래.”

“몇 시쯤 들어오실래요. 오늘은 일요일인데 우리도 우리 인생 한번 살아봅시다.”

나는 교회의 집사였는데 한 번도 아내에게 교회에 가자는 말을 못 했다. 교회는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하는 곳이어서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차 안에서 재즈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어 더욱 머릿속이 소란해졌다. 정말 나는 피로해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계속 잠을 못 잤던 것이 생각났다. 가뭄이 계속되어선지 수돗물이 꼭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내는 TV를 봤다. 그럼 단칸방에 사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보기 마련이었다. 끝나면 허허하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오는 이 바보상자(Idiot Box)를 나는 살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러나 이웃집 아주머니는 전자제품 매판 원이었다.

“아유 텔레비 없이 어떻게 사세요? 글쎄 이것은 사치품이 아니고 필수품이에요. 애들 교육에 해롭다지만 어린애들을 위한 프로가 얼마나 상식을 갖다 준다구요. 텔레비가 없으면 즈들 사이에서 병신이 된다니까요. 글쎄 우리 집 애도 …”

이런 식으로 사게 된 것이었다. 이 바보상자가 시간과 잠을 빼앗아 간 셈이었다. 나는 버스 안의 시끄러운 재즈 음악 속에서 발작적으로 시청의 수도국장이나 급수계장의 머리통을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애초 수도를 놓아줄 때는 그런 계약이 아니었다. 집이 몇 채 아니었어도 높은 지대라 앞날을 보고 굵은 관을 묻어달라고 했는데 가는 관의 수도관을 묻었다. 새로 입주한 가정에는 따로 수도관을 묻든지 아니면 그때 더 굵은 관으로 교체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관은 그대로 두고 새 입주자들에게 물을 뽑아 주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있는 우리는 밤늦게야 수돗물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전화하면 조사해서 바로잡겠다. 좀 더 기다려라. 이런 식으로 몇 달이나 끌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옛날 같으면 우물물을 길어 마셔야 할 처지인데 많이 발전했다고 만족해야 할 것이가?

대학생 클럽은 교회에서 가까운 침례회관 이 층에서 모이고 있었다. 아직 아홉 시가 되지 않았는데 이십 명 가까운 수가 모여 한 무더기는 풍금 곁에, 한 무더기는 기타를 둘러싸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한 무더기 남녀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윗옷을 벗어 단지고 창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밖을 달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택시의 경적, 학생들의 소음을 함께 들으며 좀 더 조용하고 질서 있게 지낼 수 없을까를 생각했다. 적어도 이 모임은 자기의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고 의견을 듣는다든지, 누군가가 학교나 사회의 문제점을 던지고 토론을 한다든지, 아니면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한다든지. 뭐 그렇게 여가를 보내면 안 될까?

시간이 되어 성경공부가 시작되자 그들은 지루하고 역겨운 표정이었다. 공부를 인도하는 학생이 자기의 의견만을 목사의 흉을 내며 길게 설교조로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만”

나는 견디다 못해 말했다.

“우리가 오늘 공부하고 있는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있는데 왜 이렇게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할까?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 취생몽사하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주변이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국 사람이 머리를 길게 기른다고 무비판으로 나도 그렇게 기르고 산다면 취중에 살고 꿈속에 죽는 것처럼, ‘나’라는 참 존재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응대하지 않았다. 나는 몇 가지 예를 더 들고 다시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외면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빙자해서 모여 노래하고 지껄이기 위해 이 시간을 가진 것이다. 모이기 위해서는 지도교수가 필요해서 피곤한 나를 모신 것이다. 왜 사는지, 나는 누구인지 생각하지 말라. 독서회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금물이다. 운동경기에 열광해라. 오직 학과 공부에 열중하여 범생이 돼라. 이것이 사회에서 가르치던 내용이 아니었던가?

“미안하군. 내가 너무 간여했어. 이건 결국 자네들의 클럽이고 자네들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고 모임 아냐? 다시 계속하게.”

사회자는 새 힘을 얻어 활기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성경공부는 기도로 끝내고 싱 투개더(sing together)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11시에 교회에 나와 앉아서도 나는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잠이 활짝 깨는 설교는 하지 않고 졸리는 말만 길게 하는 것일까? 나는 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내 신경질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던 새벽 5시부터였다. 그만 그치려니 하고 참고 있으면 다시 계속되곤 해서 나중엔 머리통을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완전히 잠을 설쳐버렸다. 겨우 잠이 드는데 이번에는 동사무소에서 외쳐대는 스피커 소리에 또 잠이 깼다.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러 나오라는 외침과 새마을 노래, 향토 예비군의 노래가 소신껏 볼륨을 높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게으른 백성을 깨워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청소는 아내가 나가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계속 잠을 못 자고 설쳐서 골치가 아프다.

예배를 끝내고 나오는데 목사님이 나를 잡았다.

“오늘 오후에 바쁩니까?”

“아니요. 별로”

“그럼 도청 회의실에 좀 나가 주지 않겠소? 교회 지도자와 ‘새마을운동’에 대한 간담회가 있다는 공문이 왔는데.”

“목사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오늘 오후에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그럼 우리 교회 대표로 왔다고 얼굴만이라도 좀 내놓고 와 주시오.”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시내에서 점심을 마치고 다방을 몇 군데 순례한 뒤 3시에 도청 회의실로 나갔다. 간담회에 앞서 슬라이드와 영화가 한 시간 반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어 발광 직전이었다. 간담회 때 나는 무슨 망발을 할지 자신이 없었다. 살며시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집에 닿은 것은 6시가 다 되어서였다. 오자마자 옷을 벗어젖히는 것을 아내는 어처구니없는 듯 보고 있었다. 나는 베개를 꺼내어 벌떡 드러누웠다. 그런데 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전화 좀 받아요.”

아내가 수화기를 들었다.

“녜, 그렇습니다. 어머 김 선생님이세요? 웬일이세요? 지금 막 교회에서 돌아오셨어요.”

나는 전화를 바꾸었다.

“야 나다. 빨리 나와라.”

서울에서 약업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였다.

“여전하군.”

“또 억지로 죽어가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 나올래, 안 나올래.”

“어딘데?”

“빠, 별궁.”

“야, 거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너도 냉수 좀 마셔라.”

“너 교회 다닌다더니 사람이 많이 변했구나. 안 나와도 돼.”

“자식, 성질 급하긴.”

나는 전화를 끊고 옷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당신 너무 무리에요.”

“걱정 없어.”

나는 어느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눈꺼풀이 마구 감기어서 나는 다시 힘을 주어 추켜올렸다. 눈이 건조해져서 까칠까칠하다. 내리막길이 둘로도 보이고 셋으로도 보이다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서 땀이 난다고 느끼는 순간 이상한 풍경이 전개되었다.

리어카를 끈 여인이 또다시 괴성을 지르며 내리막길을 곤두박질하여 달려가고 있는 광경이었다. 나는 꿈을 꾸는 게 아닐까 하고 눈을 감았다. 비명. 그리고 둔탁한 금속음. 나는 눈을 뜨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십니까?”

나는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같은 마을 사는 학교 직원이었다. 길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환상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난 몽유병자처럼 멍청히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그렇지. 나 지금 친구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뒤통수에 통증을 느끼며 천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모두가 잘 살자고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는 때인데 왜 나는 생각이라는 것은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허둥대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김 사장을 만나면 또 필경 자기가 하는 일을 늘어놓으며 호기를 부리고 술을 권할 것이었다. 결국, 내 인생은 찾지 못하고 취중에 살고 꿈속에서 죽는 게 아닐까 하면서도 나는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197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