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무료(無聊)한 승부 - 중편 소설 [오승재 장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1. 9. 06:08

무료(無聊)한 승부 - 중편 소설

은혜 추천 0 조회 75 20.12.29 14: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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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승부

無聊

 

 

“어이 중대가리. 오늘 어때 핑퐁 외교 한번 안 할래?”

열한 시에 교회에서 대학생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병주가 늘 어울리던 네 사람만 만나자 며칠 전 삭발한 윤구를 보고 말했다.

“난 그만두겠어. 주일을 조용히 성스럽게 보내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핑퐁 외교가 성스럽지 못할 건 또 뭐야. 지난번에는 우리가 져주었지 않아. 그런데 갑자기 도전을 회피하는 이유는 뭐야. 사람이 너무 변했는데.”

“정말이야. 오늘은 그냥 좀 보내줘.”

윤구는 계속 사양했다.

“이거 봐. 삭발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역사적인 시간을 그냥 넘길 순 없잖아. 자, 오늘 깨끗이 지는 편이 점심을 사는 거야. 여기 최 여사도 기대를 걸고 있으니까.”

병주는 함께 있는 파트너 최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요. 아이 정말 멋있어. 율 브리너처럼 남성적인 매력이 넘쳐요. 오늘은 져 드려도 난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요.”

“정말 왜 이렇게 내 머리를 가지고 이러지?”

윤구는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처음 삭발을 하고 대학 교문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수군거렸다. 며칠 전부터 어린 1학년 학생들의 삭발이 몇 사람 있었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3학년에 복학한 그는 그들과 어울릴 리 없을 뿐 아니라 쉽게 그들과 부화뇌동할 성격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를 본 여학생들은 피식피식 웃었고 공교롭게도 자기와 함께 복학한 막역한 친구 병주도 처음에는 “감기 들려고 이게 무슨 짓이야”하고 맥빠진 소리를 냈었다.

“장발이라고 집에서 어찌나 성환지 그냥 깎아버렸어.”

윤구는 분위기가 너무 의외여서 쑥스러워 귀밑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낙지 대가리처럼 밀어버리라고야 누가 생각했겠어?”

“깎을 바에야 이게 시원하고 좋지.”

“하지만 너하곤 안 어울리는데.”

삭발했다는 게 문제는 문제였다. 소문이 났는지 그는 학생처장에게 불려갔다. 왜 군대에 갔다 온 주제에 삭발했냐는 것이었다.

“왜 머리 깎을 자유도 없나요?”

“누가 그걸 묻나? 동기가 뭐냐는 것이지.”

“처장님, 삭발하면 반드시 동기가 있어야 하고 그 동기를 학교 당국에 보고해야 하나요?”

처장은 호탕하게 웃었다.

“정군. 나는 말이야 요즘 교정에 중대가리들이 여기저기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몸이 오싹해진단 말이야. 그런데 군대까지 갔다 온 자네가 삭발하고 나타나니 혹 또 이 처장을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나서 그러는 거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은 살생을 미워한답니다.”

“그런데 자네 갑자기 중이라도 될 생각을 했나?”

“아닙니다. 전, 장발보다는 이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때를 보고 그런 생각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글쎄 어디 생각이 때를 따지고 형편을 따져서 나는 겁니까?”

“자넨 성적도 우수했고 품행이 얌전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네의 행동 하나하나를 더 주시할 거야. 그러니 조심해서 행동해야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또 이 삭발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적당한 선에서 머리를 기를 것이니까요.”

윤구가 처장실을 나오려 하는데 처장은 다시 그를 불러 세우고 엄숙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정군. 삭발은, 때를 보고 하는 거지 함부로 어느 때나 하는 것이 아니야. 알겠지?”

삭발한 뒤 처음 졸업반에 있는 영희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뒤였다. 복도에서였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보자 아!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싸 안았다.

“왜 안 되겠어?”

“몰라요. 난 몰라요.”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마구 그를 피해 2층을 올라가 버렸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가 입대하기 전에 애송이 기자로 대학신문사에 들어와서 함께 일한 일이 있는 여학생이었다. 입대 후 계속 신문을 보내었고 그 뒤로는 3년간 편지 왕래가 계속되었던 여학생이었다.

처음 삭발을 했을 때의 친구 병주는 이런 말을 했다.

“난 말이야, 어젯밤 네가 왜 삭발을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는데 이건 삭발을 한, 1학년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

“그건 새삼스런 것이 아니잖아.”

“문제는 말이야 네가 스스로 결단한 삭발의 동기가 뭐냐는 건데 그걸 알아냈다는 거야.”

“웃기는 짓 하는군.”

“넌 장발로는 내 미모를 당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거야. 그래 삭발로 나를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땐 모두 장발이었는데 병주는 특히 장발을 좋아했다. 그는 약간 곱슬머리인데 귀 뒤로 내려간 머리가 살짝 커브를 그리며 목덜미를 덮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멋있다고 의식하고 있었는지 거기에 약간 물기름을 발라 까만 윤을 내고 다녔었다. 그러면서 윤구만을 좋아하는 것 같은 영희에게 “영희 씨 어때요. 내 머리 멋있죠?”하고 뽐내기도 했다.

“야, 시시하게 제멋대로 해석을 하지 마. 나는 그저 깎고 싶어 깎았을 뿐이니까.”

*

윤구는 주일 오후 대학생회 예배를 끝내고 탁구를 하고 싶지 않았디. 이날은 조용히 식사나 하며 영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그렇게 영희와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우린 그냥 가요.”

영희가 윤구의 팔을 끼며 자리에서 비켜서려 하자 미자가 대들었다.

“어머 언니 너무해요. 우리가 보는 데서 팔짱을 끼고 그렇게 갈 수 있어요?”

영희는 당황해서 손을 내리고 얼굴을 붉혔다.

미자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윤구 씨, 저도 좀 데리고 가 주세요. 그렇게 둘만 가기에요?”

그러자 병주가 한마디 했다.

“나하구 가면 되지.”

“싫어요.”

윤구는 야릇한 분위기를 의식하며 말했다.

“좋아. 타구 시합을 하자. 오늘은 지더라도 두말없이 내야 해.”

그들은 가까운 탁구장으로 들어갔다. 윤구는 영희의 어깨를 두들기며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약속을 못 지켜서. 그러나 힘내요.”

영희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기분 안 나요.”

“오늘은 파트너를 바꿔서 시합하면 안 돼요?”

미숙이 말했다.

“그럼 복수전이 아니잖아.”

윤구의 말을 받아 또 미자의 독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시합할 때의 윤구 씨가 제일 귀엽더라. 보통 때는 표정이 약간 바보스러운데 시합 때만 되면 도둑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상대방을 잡아먹을 기세거든.”

윤구도 한마디 했다.

“나는 몰상식한 상대와 싸울 때는 더블 스코어로 이기려고 긴장하는 버릇이 있거든. 아마 그래서 그렇게 느낄 거야.”

그러나 이번에는 윤구 내가 졌다. 미자는 영희가 톱스핀이나 쇼트커트에 약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그걸로 약을 올리고 영희는 라켓을 던져버렸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다방에 가서 앉았다. 윤구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영희는 씨무룩한 채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 시합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건데, 왜 그래요. 핑퐁 외교가 아니라 절교가 되어서는 안 되죠.”

“난 이젠 탁구는 안 할 거야.”

영희는 차를 마시고 대화하다가 화장실로 가겠다고 나갔다. 미자가 병주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은 거린 뒤 자기도 따라나섰다. 윤구는 미자의 활달함에 놀라 말했다.

“정말 미자는 보통내기가 아니야.”

“오늘도 네가 영희 씨만 데리고 갈려는 눈치가 보이자 그렇게 심통을 부린 거야.” 그러면서 병주는 갑자기 말했다. “너 미자 좋아하니?”

“무슨 소리야. 너도 다음번엔 파트너를 바꿔서 시합하고 싶어?”

“아니야. 나는 미자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싫고 좋고가 문제가 아니야. 걔는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누구나 좋아할 타입이야. 그러나 나는 관심 없다.”

“걔는 질투도 심하다. 그러니 일단 여기서 나갈 때는 뿔뿔이 헤어져 가는 것으로 하자. 영희 씨와는 세 시쯤 딴 장소에서 만나라. 그래 서대전 삼거리에 왕성이라는 다방이 있어. 새로 개업했는데 가보니 깨끗하더라고.”

병주는 그런 제안까지 했다. 이때 미자가 오면서 말했다.

“무슨 구수 회담을 그렇게 하시죠?”

“음. 신학교에 다니는 무슨 여자가 그렇게 왈가닥으로 생겼느냐고 흉보는 중이야.”

그녀는 코웃음을 친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윤구는 영희에게 3시에 왕성 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 산부인과 원장이 그의 아버지였고 그 병원 2층이 그의 거실이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카운터에 있는 순이가 소리쳤다.

“윤구 오빠, 윤구 오빠, 거기 좀 서봐요.”

나이 어린 간호사들은 그를 다 오빠라고 불렀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우뚝 섰다.

“오빠 나 꼭 한 가지만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 줘요.”

그녀는 보조개를 파고 장난스럽게 웃고 서 있었다.

“뭐야?”

“나 오빠 머리 한번 만져보고 싶어. 꼭 한 번만.”

“뭐야?”

“아니야. 나 만져보고 싶어. 만져보고 싶어.”

그녀는 발광하듯이 말했다.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어머니가 이 꼴을 보고 호되게 꾸중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2층에서는 어머니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채신머리없이 삭발하니 어린 간호사들이 놀려대지 않느냐는 말부터 시작하여 국내외 정세, 그리고 인류의 사활문제까지 설교는 계속되었다. 중동문제로 유류파동이 밀어닥쳐 현재 난방도 제대로 못 하는 형편이며, 또 모든 물가가 덩달아 올라 생활고가 피부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며, 국가에서는 이런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노력하고 있는데 국민이 총력을 기우려 협조해야 할 시국에 삭발은 웬 말이냐? 비록 중동의 석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동력자원의 새로운 개발이 없으면 인류가 모두 멸망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래도 인간을 사랑하시어 중동문제를 통해 잠을 깨워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래도 잠을 깨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말세를 당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대학생들은 올바른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신랑은 도둑 같이 올 텐데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처럼 되고 싶은가? 그러고 나서 끝으로 지각없는 아들을 둔 것이 후회된다는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식한 용어들을 기억하게 되었는가? 아마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다닌 부흥회의 설교를 통해서 또 여성 봉사단체의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안 그리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합니까? 제 삭발은요 그런 거창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정말 왜들 이러십니까?”

그는 영희와 약속한 3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30분 전에 집을 뛰쳐나왔다. 서대전 삼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자 새로 세운 빌딩 2층에 왕성이라는 간판을 단 다방이 눈에 띄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레지와 손님들이 일제히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아 그는 눈을 내리깔고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의자가 편하고 좋았다. 원색 전등이 많아, 세련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줄 뿐, 새 다방답게 깨끗한 곳이었다. 카운터 옆 보라색 유리판 안에서 리시버를 끼고 분주히 LP 판을 고르고 있는 디스크자키를 멍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앞 의자에 덥석 앉았다.

“어머나 윤구 씨, 웬 일세요? 그러잖아도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 막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망설이던 중이에요. 그런데 윤구 씨가.”

그건 미자였다.

“아니 여긴 웬일이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그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뭔가 올가미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언니가 개업한 다방이에요. 개업 날 병주 씨와도 한번 왔었지요. 그런데 윤구 씨가 웬일이세요?”

“심심해서 걷다가 새로운 이름의 다방이 보여서 그냥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는 영희와의 약속을 말하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마침 잘 되었네요. 그러잖아도 윤구 씨에게 이 다방을 소개하고 싶었던 중이었거든요.”

그녀는 참새처럼 잘 종알댔다. 그리고는 “언니”하고 손짓해서 마담을 앞에 앉히고 인사를 시켰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멋있는 분이라고. 저희 다방 좀 아껴 주세요. 미자는 어려서부터 동생처럼 귀여워해 왔답니다.”

“음악이 좋습니다. 디스크자키의 목소리도 좋고.”

그는 한마디 거들었다.

“네 다 미자의 아이디어였지요. LP판도 귀한 것을 많이 구해 주었고. 또 일류 디스크자키도 소개해 주었다우.”

미자는 곧 말을 가로챘다.

“언니 내가 말했잖아요. 어젯밤 꿈에 윤구 씨를 만났는데 아무리 불러도 본 체도 하지 않고 가버리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만났으니 얼마나 좋아요. 꿈은 반대라더니 정말 그런가 봐.”

그녀는 두 손을 박수하듯이 소리 없이 두들기며 지껄여댔다.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차로 대접해 주어요, 언니.”

“그럼 누구신데. 그럭허지.”

마담은 “김양”하고 소리를 쳤다.

벽시계는 3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 그냥 가봐야겠습니다. 시간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지만 차도 안 들고 가요?”

레지가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커피요.”

그는 당황해서 말했다. 난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희가 나타나면 큰일이다.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그가 차를 들고 황급히 일어나는데 미자도 따라 일어섰다. 디스크자키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걸어 나오는데 씽긋 웃으며 눈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던가? 그러나 윤구에게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이었다. 아마 미자에게 인사하는 것을 잘 못 본 거로 생각했다.

“오늘은 제가 윤구 씨를 기쁘게 해 드릴게요. 이렇게 우울한 계절에는 기분전환이 필요해요.”

밖을 나오자 미자가 말했다.

“난 우울하지 않습니다.”

제길 헐.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뭐래도 전 알아요. 저도 같은 대학생이니까요.”

“정말입니다. 전 우울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랑곳없이 미자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자 타세요.”

“정말 왜 이러죠? 난 가 봐야 한다니까요.”

운전기사가 고개를 쑥 내밀고 그들을 쳐다보며 수상한 눈초리를 보였다. 미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 숙녀를 이렇게 세워두고 창피를 주기에요? 그렇게 창피를 주기에요?”

미자의 눈에서 글썽한 눈물을 보자 떠미는 미자를 막아내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자는 거요?”

“동학사요.”

그녀는 화난 듯이 말하고 문을 꽝 닫았다. 차는 구르기 시작했다.

“미자 씨, 이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난 미자 씨가 싫습니다.”

“저도 윤구 씨가 싫어요. 하지만 우리의 세대는 이렇게 싫은 사람끼리 사귀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해요. 미국과 소련(러시아)이 그렇고, 한국과 북한이 그렇고, 월남과 월맹이 그렇고….”

윤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미자가 짜놓은 각본에 자기가 말려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자 씨. 좀 솔직해집시다. 미자 씨의 목적이 무엇이오?”

“기분전환 시켜드리려고 그런다고 말했잖아요.”

“왜요?”

“왜는요. 윤구 씨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순순하게.”

“난 기분전환이 필요 없소. 우울하지도 않으니까.”

“그건 억지에요. 우리는 우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는 뭐예요. 기성세대는 무력해 빠져서 우리가 사회정의를 외치고 나서면 소리도 못 내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어요. 또 어떤 정당은 우리의 행동을 협상의 유력한 무기로 심으려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구요. 도대체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우린 뭐냔 말이오. 꼭두각시처럼 일선에 서서.”

윤구는 차츰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작은 신학교의 전도사 지망생. 그리고 교회 대학생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학생. 그리고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 우울하지도 않은 나를 붙들고 당신은 우울하다. 당신은 불행하다고 최면을 걸고 있는 거요?”

“뭐라 해도 좋아요. 윤구 씨가 치기 어린 일 학년 학생이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아요. 군중심리에 어울려 함께 삭발하고 반정부 데모를 하고 또 그것이 대외적으로 인정되기를 원하고 이러는 일 학년 학생이라면 말이에요. 그러나 혼자 결단하고 홀로 그 아픔을 참는 윤구 씨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거예요.”

“이건 정말 삭발 수난인데. 솔직히 나는 내 개성에 맞는 조발을 찾기 위한 것 뿐요. 그런 거창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삭발 이야기는 그만두죠. 개미 쳇바퀴 도는 식이니까요. 그 대신 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그러면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대학 이야긴데요. 하루는 학교에 나갔더니 신과 학생 대부분이 갑자기 삭발하고 나왔어요. 그리고는 찬송가를 가지고 교정으로 나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 나갔더니 모두 찬송을 부르며 예배실로 들어가는 거였어요.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결의문 낭독을 했어요. 그리고는 계속 학내에서 구국 기도회를 할 것인지 거리를 나가 데모를 할 것인지를 토의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거리로 나가재요. 그땐 벌써 경찰이 교문 밖을 지키고 있을 때였어요. 학생들은 밖으로 나왔지요. 그런데 정문은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길을 남기고 양편으로 경찰이 즐비하게 서 있었어요. 학생들은 다시 후문으로 달렸지요. 그런데 그때 교수님들의 표정이 재미있었어요.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정말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어. 재미없어 난 반정부적인 언동은 질색이오. 군대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윤구 씨는 모르시는군요.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해야 한다는 역설을.”

“잠깐. 미자 씨 부친은 뭘 하시지요?”

“네? 제가 무슨 ‘개 조심’ 팻말이라도 붙이고 있나요?”

“아니요. 미자 씨는 연막을 잘 치기 때문에 부친께서 혹 화생방 장교 출신이 아니신지 궁금해서요.”

윤구는 오랜만에 씩 웃었다. 영희에 대한 미안함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막이요?”

“그렇지요. 난 지금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어요. 그래 우리 대화를 다방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뭘 시작한다는 말입니까?”

“날 정말 거기서 우연히 만난 것입니까?”

그는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래요. 우연이에요. 왜 그 우연이 싫어요?”

그녀는 뾰로통해 앞을 보며 말했다.

“저도 지금은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의 우연의 인연이길 바래요. 하지만 미자 씨는 3시쯤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천만에요. 아마 윤구 씨가 그곳에 약속이 있어 온 게 아닙니까?”

그녀는 마주 보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런 억측을 하는 걸 보니 그렇게 생각이 되네요.”

“사실 저는 심심해 그곳에 들린 게 아니라 3시에.”

그가 말을 멈추자 긴장한 미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태연히 말을 계속했다. “사실 병주와 만날 약속이 있었어요.”

“뭐라구요?”

“왜 그렇게 놀래죠?”

“거짓말 같으니까 그러죠. 탁구 치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되는데 다시 만날 이유가 있었어요?”

“사실은 영희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흥”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것도 거짓말 같습니까?”

“그건 정말 같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럼 내가 가로챘으니. 언닌 지금쯤 엄청 화났겠어요.” 그러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참 윤구 씨 부친은 무얼 하시죠?”

“산부인과 의삽니다.”

“경찰 출신이 아니구요?”

그들은 함께 웃었다.

*

동학사에서 돌아온 것은 여덟 시쯤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친이 그를 불렀다.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냐?”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좀 늦었습니다.”

“친구? 어떤 친구야?”

“그런데 왜 요즘 갑자기 제 행동에 대해 관심이 커지셨습니까?”

“네가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머리만 깎으면 수상합니까?”

“어서 바른대로 대봐.”

“친구들과 어울렸다잖아요.”

“너 동학사에 갔었지?”

“네? 그걸 어떻게?”

“누구와 갔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최미자란 학생과 갔습니다.”

“뭐하러 갔어?”

“그냥 우울해서요.”

“뭐가 우울해?”

“그 애가 우울했어요.”

“가서 지금까지 뭘 했어?”

“산을 헤맸어요. 그런데 아버지 이건 알아야겠어요. 누구예요? 고해바친 자가?”

“그건 알아 뭘 해?”

“감시를 받고 산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남잡니까 여잡니까?”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남자다.”

“학생입니까? 일반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러나 넌 행동을 조심해야 해.”

“아버지. 한 가지만 더. 그건 몇 시입니까?”

“다섯 시쯤이다.”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5시. 남자. 병주인가? 그가 따라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동학사 유인은 병주와 미자가 함께 짠 각본이란 말인가?

동학사 입구에서도 이렇다 할만한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다. 가을 한 철 새빨갛게 혹은 샛노랗게 자신을 불태우던 활엽수들은 앙상한 가지 끝에 한 잎 두 잎 시든 이파리를 달고 쌀쌀한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한두 쌍의 어린 학생 차림의 등산객을 만났을 뿐 만난 사람은 없었다. 기억에 남는다면 파견 근무 하는 순경이 손을 잡고 걷는 그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한번 쳐다보는 것 같았으나 그뿐이었다. 또 한 사람 키가 작은 동학사의 주지 스님을 만나 인사한 일이 있었다. 미자네 집엔 가끔 들리는 스님이라나?

그리고 5시경 여관방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프다고 그녀는 말했다. 날씨가 추워 그들은 여관방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맥주 두 병을 놓고 땅콩을 수두룩이 까고 있었다. 그녀는 술을 따르며 말했었다.

“저는 어른들을 참 싫어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어른들 흉내가 내보고 싶어지네요.”

“나도 남녀가 여관방에 드는 것은 참 지저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그런 생각이 안 드는군요.”

“윤구 씨의 흠은요 누구에게나 잘해준다는 점이에요. 그러면서도 사람을 경계하고 더는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점이에요.”

“그게 흠이 됩니까?”

“제가 알기론 기독교의 사랑이란 그런 껍질을 깨뜨리고 영혼이 교감하는 자리로 옮겨가는 데서 움트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대화가 퍽 능란했다. 그의 손을 잡으면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미운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해요.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사랑을 체험하려면 미운 사람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을 이해해야 해요.”

그는 그녀의 행동을 흥미 있게 관찰하고 있었다. 영희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접근이었다. 영희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미자를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윤구 씨 공룡이 이 지구상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믿으세요?”

“화석이 나오고 있으니 믿어야지요.”

“그 공룡이 어떤 순간에 갑자기 사멸하고 새로운 형태의 생물이 이 지상에 서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믿구요?” 그녀는 계속했다. “그럼 어떤 순간에 인간이 멸종하고 딴 형태의 생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믿으세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 되나요?”

“글쎄,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세상의 끝이 아니잖아요.”

“자기 형상대로 지은 인간이 다 사라졌다는 데도요? 하나님도 ‘다 이루었다’하고 사라질 것 같은데요?”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만일 새로 나타날 생물이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봐. 그 종족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텐데 이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그는 인간들의 하나님’이었다고 박물관에 보관해버릴 수는 없잖아?”

“바로 그 점인데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종말은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던 인간들은 그냥 안 있을걸. 지옥과 천당이 분명하지 않고 엉뚱한 선도 악도 아닌 생명체가 생겨나니 말이야.”

“또 복음은 어떻게 되죠?”

“그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복음이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전해지듯 인간에게 국한된 복음이 다시 무엇인가에 의해 새로운 생명체로 전해지겠지?”

그들은 이렇게 상상의 세계를 현실을 잊고 즐기고 있었다.

윤구는 한순간 미자가 귀엽고 예쁘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두툼한 입술, 오뚝한 콧날, 반짝이는 눈동자, 잘 익은 복숭아를 생각나게 하는 보얀 살갗 … .

그녀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눈부신 듯 눈을 깜박이다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눈을 감고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윤구 씨, 저 한번 안아주어요.”

순간 그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일으키며 귀에다 소곤거렸다.

“미안해요. 저는 여전히 속물입니다. 도덕과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속물이에요. 인제 그만 돌아가지요.”

그녀는 눈을 뜨고 원망스러운 듯 그를 노려보더니 표변하여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요. 가요.”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나는 참 바보예요. 정복해야 할 순간에 나는 나 자신의 의지를 꽁꽁 묶어 물건 짝처럼 적 앞에 내동댕이치거든요. 정말 이게 바보스러운 줄 알면서 말이에요. 이 창피와 자학이 날 오래 두고 괴롭힐 줄 알면서 말이에요.”

그들은 시내에 나와 그래도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동학사에서 미자와 있었던 행동 전부였다.

윤구는 생각했다. 자기를 밀고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했다. 미자를 밀고자로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럼 병주인가? 그가 왕성 다방에 3시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병주, 영희 그리고 자기뿐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병주가 우리의 만남을 확인하려 3시쯤 왕성에 온다. 그러다 자기가 미자와 택시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본다. 호기심에 추적한다. 유성까지 따라가다 동학사 쪽을 가는 것을 보고 돌아서 왕성 다방으로 온다. 영희가 그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다. 영희를 만난다. 그때 윤구는 안 올지도 모른다고 자기와 영화나 보러 가지고 말한다. 영희가 거절하지 윤구는 내가 미자와 동학사를 갔을 것이라고 알려 준다. 영희는 화가 나서 기숙사로 돌아간다. 병주는 5시쯤 아버지에게 내가 어떤 여자와 동학사에 갔다고 밀고한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왜 병주가 밀고한다는 말인가? 미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질투가 나서? 그럼 병주는 정말 미자를 좋아하고 있었던가?

윤구는 밤이 늦었지만, 전화기를 들고 여자 기숙사를 불러 영희를 찾는다. 이윽고 영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반가워서 소리쳤다.

“여보세요. 나 윤굽니다. 오늘 약속을 못 지켜서.”

말도 끝나기 전 철컥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까 하다 그만두고 이번에는 남자 기숙사의 병주를 찾았다.

“야 너 오늘 재미 좋았니?”

병주는 먼저 명랑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뭐라고? 그거 무슨 소리야?”

“미자와 함께 나갔다며?”

“그건 어떻게 아니?”

“왕성 다방의 마담이 그러던데. 도대체 어딜 갔니? 시내는 아닌 것 같고.”

“야, 시치미를 떼지 마. 너 내가 어디 간지 알고 있지?”

“야가 날 사립 탐정으로 아나? 너 어디 못 갈 데라도 갔니?” 그러면서 계속했다.

“너 그러면 못 쓴다. 영희 씨를 놔두고 또 한 아가씨를 노려?”

“그래서 너 고자질 했구나.”

“뭐라구? 고자질? 누구에게?”

퍽 흥분한 목소리였다.

“산부인과 원장님께 말이다. ”

“자식, 너 사람을 우습게 보는구나. 야 난 그런 더러운 짓 않는다.”

“미안하다. 내일 만나 얘기하자.”

그는 수화기를 놓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꼬인 건지 아리송해졌다.

*

다음날 일찍이 그는 학교에 나갔다. 전국적으로 각 대학의 겨울 방학이 앞당겨지고 그가 다니는 대학도 시험이 일주일 앞당겨 졌으며 이날은 시험 준비 기간으로 수업이 없는 휴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희의 오해를 풀고 병주와도 만나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쓸쓸한 방학 기분이었다. 그러나 도서관 안은 그래도 많은 학생들이 꽉 차서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영희를 찾았다. 일 층 열람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층을 올라가자 저쪽 구석에 그녀가 앉아 공부하고 있는 것이 보이었다. 얼마 동안 쳐다보고 있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모른 체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할 수 없이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좀 만날 수 있겠어요?”

그녀는 어깨를 흔들어 버리고 책상에 엎디었다. 옆 친구들은 옆구리를 찌르며 킥킥 웃었다. 그는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한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홍수처럼 밀어닥쳤다.

그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그녀는 동양적인 애정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군대에서 외로움을 참으며 주고받던 편지들, 그립다 보고 싶다고 가슴 울렁이던 순간들, 휴가 나와 다방이나 영화관을 순례하던 며칠들, 그것은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그녀가 토라져 앉은 것은 춘향의 일편단심으로 둥우리를 찾아 알을 품은 자세가 아닌가? 오해를 풀어라. 나는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고 있는데 학생처장이 호출한다는 연락이 왔다. 처장실에 들어서자 처장은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자네 어제 오후에 어디 있었나?”

“왜 그러십니까?”

도대체 어떤 자식이 장난하는 것일까 하고 윤구는 적지 않게 화가 났다.

“글쎄 어제 지냈던 얘기를 좀 해봐.”

“처장님, 이건 학원이 아니고 마치 죄인 다루는 수사과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처장은 능글맞게 웃었다.

“그렇다면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 알리바이가 성립되어야 할 일이 생겼어. 그래 어제 하루 어디 있었는지 좀 알려주지 않겠나?”

“몇 시쯤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다섯 시 이전까지만 말해 주었으면 충분해.”

“우선 어디서 일어난 무슨 사건인지를 말씀해 주시죠.”

“그건 차츰 알게 될 테니까 먼저 자네 행방부터 말해.”

윤구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나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재증명이란 어느 장소에 없었다는 증거를 대는 건데 시간도 장소도 안 대주고 무슨 증명을 하란 말입니까?”

“좋아 한 가지만 말해 주게. 이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야.”

“그럼 난 상관없습니다. 이 학교에 나타난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 그 이야기를 좀 해 주게. 그동안 뭘 했다구.”

처장은 발을 괴어 올리며 말했다.

“처장님, 이거 전교생을 이렇게 조사하고 있는 겁니까? 소수 혐의자뿐입니까?”

“소수야.”

윤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처장님, 내게 혐의를 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삭발을 했기 때문이야.”

“몇 번이나 이야기해야 합니까? 개성에 맞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깎은 것이라고 당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교수님이 학생을 이렇게까지 불신하면 이 대학이 어떻게 지탱되겠습니까? 나는 어제 이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처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 믿고 싶지만, 이 세대는 그렇게 믿고만 지낼 수는 없게 되었어.”

“사제 간도 말입니까?”

“자네 상당히 반항적인데 좀 따가운 맛을 보아야 알겠나?”

“처장님은 품속에 권총을 가지고 계시던가요? 전 권총으로 쏴도 사건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처장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껄껄 웃었다.

“알겠어. 난 자네의 분명한 태도를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이 부탁만은 들어주게.”

그러면서 팔 절 백지와 사인펜을 가져왔다. 필적 검사용이라고 했다. 그는 펜을 받아 ‘너구리, 곰, 늑대, 여우’라고 크게 써주고 나왔다.

그는 너무 화가 났기 때문에 병주를 만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와 버렸다. 시험기일이 내일로 박두했는데도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거울 앞으로 가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민숭한 머리통을 보자 픽 웃음이 나왔다. 여기저기서 발길로 채는 축구공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공부를 집어치우고 중이 될까 하고 한순간 생각했다. 공부하면 뭘 하겠는가? 제대만 하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거듭 다짐했었다. 겉으로만 아니고 참 신앙인이 되어 지식을 올바로 쓰는 지혜를 터득하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반년도 못 되어 이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이 든 게 깊은 잠에 빠져 주위가 어둑해서야 눈을 떴다. 그것도 병원 카운터의 순이가 흔들어 깨워서였다. “오빠 전화에요.”

그녀는 수화기를 건네주며 웃고 있었다.

“너 설마 자는 내 머리 만지지는 않았겠지?”

그녀는 키들키들 웃으며 뛰어 내려갔다. 전화는 병주에게서였다. 5시 반쯤 시내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 오늘 나가고 싶지 않다.”

“난 만나야겠어. 물어볼 말도 있고 해서 말이야. 어젯밤에 말한 고자질이란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냐.”

“너 나 만나는 거지?”

그는 다짐했다. 그들은 다방에서 만났다.

“도대체 어제 어디 있었니?”

병주는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알아 맞춰봐.” 윤구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병주가 시치미를 떼는 것이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내는 아닐 거구. 속리산?”

“아냐.”

“유성?”

“아냐.”

“동학사?”

“아냐.”

“그럼 어디야 공주?”

“아냐.”

“야.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

아무래도 병주는 행선지를 모르는 눈치였다.

“동학사였어.”

“이 추운 날씨에 가서 뭘 했어?”

“애인끼리 춥고 덥고가 있나? 뜨거운 연앨 했지. 질투심 안나?”

“내가 왜 질투를 해.”

“너 미자 좋아하지 않아?”

“솔직한 점은 좋은데 좀 변덕스럽고 정신이 약간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말하자면 철학가 타입이랄까? 꼭 그렇지만도 않아. 공상이 많고 공상을 실현해 보려는 탐정적 요소도 있고…, 어떻든 평범한 주부 형은 아니야.”

“생각이 비상하던데.”

“그렇다니까 글쎄. 그러나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야. 또 집요한 승부 근성도 있어.”

병주는 밀고자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자가 누구를 시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왜?

“그러나 내가 시내에 없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야 인마. 3시부터 거의 5시까지 영희 씨와 함께 시내 다방, 빵집은 다 더듬었잖아.”

“영희는 어떻게 만났지?”

그는 웃었다.

“내가 왕성에 3시 좀 넘어서 갔었지.”

갔더니 영희 혼자서 우뚝하니 앉아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병주가 미자와 함께 나간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방 마담에게 들었다는 것이었다. 병주는 싫다는 영희를 데리고 시내 갈만한 곳은 다 더듬었다는 이야기였다. 영희는 함께 먹자는 저녁을 끝내 거절하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3시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야.”

“글쎄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 만나자고 했던 거야,”

그는 주일 점심을 끝내고 다방으로 들어와서부터는 미자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뭐 각본? 그게 뭔데.”

“나더러 너를 시험해 보라면서, 헤어진 뒤 너더러 왕성 다방에서 영희와 데이트 약속을 하라고 말해 보라는 거야. 너는 순진해서 꼭 그렇게 할 거래. 그런데 그 후 미자가 너를 빼돌릴지는 상상도 못 했지. 나는 호기심으로 왕성에 가본 것뿐이고.”

윤구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결국, 미자의 각본대로 자기가 놀아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행방은 누가 밀고했을까?”

“그러게 말이야. 나도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국 미자가 아니었을까?”

병주는 얼마 동안 주저하고 있다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모르지만 너 혹 미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무슨 말이야?”

“영희는 그것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는 것 같애.”

“지금 그런 질투로 괴로워할 때야? 아무튼, 그런 오해가 없도록 내가 찾아갔거든. 그런데 만나주지도 않잖아. 어처구니없게.”

“영희는 말이야 네가 미자 같은 애를 좋아할 타이프래. 내가 이건 미자의 장난일 거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네가 주관이 있다면 그렇게 따라나설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어쩌긴. 단단히 화가 났지. 아무튼, 이번엔 네가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 같아.”

“회개는 무슨 회개. 삼 년 동안의 애정행각이 내 장래를 구속할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내가 변명하겠다는데 왜 피하는 거야.”

“너 정말 좀 변한 것 같은데.”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춘향이 시대의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 내 심장은 구멍이 뻥 뚫렸어. 사랑한다면 서로 이 뚫린 구멍을 어루만져 줄 대화자가 되는 것이 아니야? 영희를 만나면 이야기를 해 줘. 난 지금 지쳐있다고.”

그들은 우울하게 얼마 동안 앉아 있었다.

“자 모든 걸 잊고 저녁이나 같이하자.”

병주가 먼저 일어났다. 저녁을 하면서 그는 병주로부터 학생처장이 필적 검사를 하는 것은 주일 오후 강의실에서 낙서한 선동적인 종이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력한 학생회는 물러나라>, <어용단체인 학생회는 총사퇴하여라> 등등 학생회에 대한 선동적인 낙서를 해서 뿌린 것은 대머리들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서울 각 대학의 데모는 이제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단계인데 이 지방 대학은 이제야 뒷북을 치는 것 같았다. 서울의 각 대학이 조기 방학을 하겠다고 하자 이 대학도 교수회에서 대학력을 바꾸어 시험을 일주일 앞당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 학년의 과격한 학생들은 이 대학의 학생회는 무얼 하느냐고 항의했다. 따라서 낙서해서 뿌린 자의 혐의는 삭발한 학생들에게 돌려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공기로 봐서는 학생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단 말이야.”

병주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내일부터 시험이 시작되잖아? 그래 이번에는 학생회가 주동이 되어 수업 거부 데모를 할 기세야.”

“이유는 뭐야?”

“시험도 보기 싫고 학생회가 삭발한 애들에게 밀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오늘 도서관엔 학생들이 꽉꽉 차 있던데.”

“물론 시험을 대비하고 있는 학생이 대부분이지 그리고 기왕에 시험을 볼 바엔 공부한 김에 보고 치워버리는 게 낫겠다는 의견이야. 그러나 대학가의 분위기는 안 그렇잖아? 일단 학생회가 수업 거부에 나서면 개인감정으로 반대는 못 하게 되어 있어.”

“뭐야, 그 지조 없는 학생회의 뜻을 따라 부화뇌동해야 한다는 말이야?”

“학생회는 조직이 있잖아. 시험 보기 싫은 것은 뒤편이고 대학이 학사력을 마음대로 바꾼다. 정부의 강압에 못 이겨 교육행정이 이렇게 흔들리면 학원은 이미 진리의 전당이 아니다. 우리는 불의에 항거한다. 이렇게 외치면 학생들은 따를 수밖에 없지 않아?”

“아무튼, 우울한 계절이야. 대학가에 낭만이 있나, 진리 탐구의 상아탑이 있나. 야 한잔 안 할래?”

병주가 이야기에 싫증이 났는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막걸릿집은 잡담과 담배 연기로 꽉 차서 사람들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일곱 신데 벌써 떠들고 노래하고 악을 쓰고…, 이건 바로 젊은 애들만 모인 지옥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는 그들을 대머리들의 무리 속에 끼워 넣었다. 벌써 너덧 명의 대머리들이 나와 마시고 있었다.

“형님, 웬일이세요.”

한 애가 불쑥 술잔을 내밀며 술을 따랐다. 그러자 또한 놈이 고개를 쑥 빼며 말했다.

“형님, 너무 도도하게 굴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요? 내가 잘못 들었소?”

그들은 교대로 거침없이 물어댔다.

“형님, 도대체 삭발한 이유가 뭐요? 이유나 들어봅시다.”

또 삭발 수난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정말 오해는 말아줘. 난 삭발이 내 개성에 맞는 조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거요.”

“그거 좀 이유치고는 치사하고 비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살이요.”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봅시다. 형은 요즘 사태에 대해 전혀 울분을 느끼지 않습니까?”

“요즘 사태라뇨?”

“꼭 말을 해야 합니까? 형사들이 학원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 서울에서지만 교수나 동료 학생들이 구속된 일. 등등 말입니다.”

“난 울분이 한 물 갔습니다.”

윤구가 술잔을 권하자 상대편은 저만치 밀어놓았다.

“야 너희들, 이 형이 치사스럽게 생각되지 않니?”

그는 동료를 쑥 둘러보며 말했다.

“맞아, 맞아.”

한 학생이 고개를 흔들흔들하며 일어나 엄지를 쳐들며 말했다.

“형, 나 좀 봅시다.”

“이거 왜 이래?”

분위기가 수상해지자 병주가 사이에 끼었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머리 하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야 참아라. 우리 미자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체, 꼴좋다. 또 이 틈바구니에 연애는.”

일어선 녀석이 덥석 주저앉으며 말했다.

“정말 미자와는 남매간이요?”

윤구는 번쩍 정신이 들어 물었다.

“그냥 누나라고 부를 뿐이요. 왜 그러시오?” “말해 주겠는데 난 미자와 연애를 한 게 아니요. 미자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여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난, 이 삭발 때문에 오늘 학생처장에게 혐의를 받고 필적 검사까지 받았지만 내 삭발은 울분과는 하등 관계가 없소.“

“철저하게 박쥔데.”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이거 오히려 기분 망치게 해서 안 되었는데.”

병주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니야.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럼 또 만나.”

그는 헤어지자마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그는 방안에서 걸려올지도 모를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을 내고 있는지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밀고자의 정체를 꼭 파헤치고 말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들어오면서 카운터를 지키는 순이에게 원장을 대달라는 전화는 무조건 누구냐고 묻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아니면 2층 자기 방으로 돌려달라고 당부를 해 놓고 있었다. 한 시간이 채 못되어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정 산부인과입니다.”

그는 부친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원장님이시오?”

그는 바짝 긴장했다.

“네. 내가 원장입니다.”

“당신 아들 윤구가 학원 내에 뿌려진 불온문서 사건에 혐의가 있다는 걸 아시오?”

“뭐라구요? 우리 윤구가요?”

“조심하시오. 그는 오늘 밤에 또 삭발한 학생들과 어울려 술자리에 있었소.”

“여보세요. 당신 도대체 누구요?”

전화가 찰칵 끊겼다. 술집에서 만난 애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가 미지에게 연락했을 테고 미자가 누군가를 조종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미자가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미자의 수족은 누구일까?

그는 밤 내 잠을 자지 않고 미자의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미로의 출구를 찾아 영희의 오해를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다음날 느지막이 학교에 나가 사태의 잔말을 살폈다. 데모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났다. 학생회에서는 수업 거부의 벽보를 교문과 기숙사 등에 붙이고 학생들을 다 노변에서 해산시켜 귀가시켜버렸다. 교수들은 호들갑을 떨고 교수회를 소집하여 이날부터 방학이며 기말고사는 1월 중으로 연기한다고 덩달아 써 붙였다. 이것으로 학생회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으며 으르렁거리던 삭발 족은 울분의 탈출구를 찾은 것이 되었다.

대학. 참으로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대학 생활이다. 윤구는 병주에게 전화했다. 오후 3시에 영희를 달래어 꼭 왕성 다방에 나와달라고. 그리고 미자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 웬 일세요. 윤구 씨가 정화를 다 해 주시고.”

퍽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젠 즐거웠습니다. 한편 미안했구요. 오늘 우리 학교가 데모를 했어요. 그런데 퍽 싱겁게 끝났구요. 오후에, 나 좀 안 만나줄래요?”

“누구 부탁인데요. 나가죠. 어디서요?”

“글쎄 어디가 좋겠어요?”

“다방? 제과점? 음식점?”

“다 싫습니다.”

“그럼 어디서요?”

“길에서 만나면 어떻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목척교 위 노숙자들의 거처 위에서요.”

그들은 한 시 반에 만났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해가 비쳤다간 구름 속으로 숨고, 다시 밝은 햇볕이 내리쬐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도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데모 얘기해 줘요.” 그녀는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러면서 계속했다. “정말 심심해 죽겠어요. 아니 답답해 죽겠어요. 도대체 뭐 흥미진진한 게 있어야죠.”

윤구는 발을 맞춰 걷는 두 사람의 구두를 내려다보며 얼마 동안 말없이 걸었다.

“오늘은 미자 씨에게 좀 고백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주 충격적인 거에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난 그때 나 자신이 도덕과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속물이라고 이야기했죠?”

“그걸 여태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 건 그 순간 버리는 게 아니에요?”

“전 미자 씨가 좋아질 것만 같거든요.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난 마음이 개운해지지 않아요. 난 무던히도 이 속물근성에서 탈피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게 안 되거든요. 따라서 난 이런 고백을 해보기로 결심한 겁니다.”

그들은 도청을 돌아 서대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영희의 이야기에요.”

“네? 언니요.”

“내가 대학신문에 취재부장으로 있을 때 그녀는 애송이 수습기자로 들어왔거든요. 그녀는 퍽 내성적이었어요. 그때 여름 방학 때, 기자 세미나를 갔었는데 혼자 너무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 옆에 앉아 같이 노래도 부르고 묵찌빠도 해 주곤 하며 즐겁게 놀도록 애를 썼지요. 그것이 어주 인상적이었나 봐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죠?”

“아닙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 해야 합니다.”

그는 독백 같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입대하자 그녀는 계속 신문을 보내 주었어요. 그리고는 내가 고맙다는 편지를 내자 편지와 신문이 번갈아 가며 오가게 되었지요. 편지에는 꽃잎이나 아까시나무 잎, 단풍잎들이 예쁘게 붙여져 있었고 군에서는 그녀의 편지가 화제였습니다. 전 그 편지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 하나하나를 적어 보냈습니다. 따라서 주일날 교회에 앉아 있으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고 마주 앉아 기도하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성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미자에게서는 조금 전의 명랑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구는 계속했다.

첫 휴가에서 서로 만나자 우리는 아주 다정한 친구가 되어 있었어요. 영희는 그래도 수줍어서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서로 꼭 깍지 끼고 영화를 봤습니다. 손을 깍지끼고 있는 동안은 우린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손을 통해서 서로의 심장의 고동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아이, 지겨워. 무슨 놈의 고백이 그리 길어요?”

드디어 미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지금 미자 씨 지혜가 필요해요. 내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거든요. 그래 영희와의 관계를 찬찬히 간추려 고백하고 일단 정리를 해야 해요. 그는 다시 시작했다.

우리의 편지는 날이 갈수록 대담하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는 그런 것이 되었어요. 드디어 그녀는 너무나 대담한 짓을 해 왔습니다. 그녀가 3학년이 되기 전 방학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빨간 립스틱을 입술에 묻혀 키스 마크를 해 보내왔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들자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난 편지를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키스 마크에 입을 맞추고 전율했습니다. 그 뒤 휴가를 왔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중국집 작은 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군에서의 외로움과 성적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너무 고독해서 너무 유혹이 강해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는 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그녀의 손은 뜨거웠습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어요.

“발아 아파 더 못 걷겠어요.”

미자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발악했을 때는 수침교까지 왔을 때였다.

“그럼 되돌아가죠, 그러나 이 이야기를 나는 미자 씨에게 해야 해요. 그런 뒤 미자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는 자기의 시나리오가 너무 심했다고 후회했으나 그냥 계속했다.

참 그 방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요? 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마주 섰어요. 그녀는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예요. 다음 순간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고 참으로 길게 입 맞추었어요.

“윤구 씨, 절 고문할 셈이에요?” 미자는 아픈 다리를 절절 끌며 말했다. “다 알았어요. 그래 어쩌겠다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거든요. 이제 바로 고백할 한 단계가 더 남았는걸요.”

미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윤구를 쳐다보았다.

“알았어요. 까짓것 다 말해 보세요.”

“이건 미안하게 되었는데 즐거운 대화가 아니고 우울한 대화가 돼서 말이오.”

“뭘요. 십팔 세기 신파도 들어줄 만한데요.”

그녀는 시큰둥해 툭 쏘았다.

“이런 이야기가 군대에서는 신나는 이야기인데 대학에서는 왜 이렇게 공허하고 유치하게 울리는지 모르겠어요.”

“군대는 수거위들만 모아놓은 곳이 아니에요?”

“미자 씨 대답 좀 해 주세요. 난 내 속물근성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도 영희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요?”

“저도 윤구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요. 윤구 씨는 지금 각본을 외우다가 딴 길로 샌 것 아닌가요?”

윤구는 심각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미자 씨는 세상을 너무 장난스럽게 생각하는데 세상은 심각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각본이 완벽한데 끝에 좀 빗나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결국, 내 마지막 물음에는 노 코멘트입니까?”

“글쎄요. 속물이라고 했는데, 그런 문제는 속물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들은 어느새 왕성 다방 가까이 까지 와 있었다.

“좀 쉬었다 가죠.”

윤구는 다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에요. 저는 그놈의 결론 없는 고백 때문에 지쳤어요.”

그녀는 발을 절룩거리며 윤구에게 의지하다시피 다방의 계단을 올랐다. 그는 시계를 봤다. 3시가 좀 지나 있었다. 다방에는 병주와 영희가 와 있었다.

“야, 웬일이야”

미자는 놀란 듯했다. 병주는 미자와 함께 그들 곁으로 갔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담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마담 신청 곡 받아줍니까?”

“물론이어요.”

윤구는 종이쪽에 곡명을 써 건넸다. 그리고 디스크자키가 음반을 고르고 있는 것은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흔해빠진 곡이어서 없을 리가 없었다. 이윽고 판이 갈아 끼워지고 디스크자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음은 신청곡의 순서입니다. 흐느끼는 운율이 매혹적인 영원히 위드 유, ‘그대와 함께 영원히’입니다.”

“시시하게.”

미자가 입을 뾰족 내밀었다. “그대와 함께 영원히. 그대와 함께 영원히.”를 윤구는 몇 번이고 디스크자키의 목소리를 되뇌고 있었다. 틀림없어. 바로 저 목소리야. 그는 환성을 지르고 싶은 생각이었다. 윤구는 다시 마담을 불렀다.

“저 디스크자키 말이에요. 나와 잘 아는 사람 같아요. 좀 만날 수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미자가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요. 틀림없어요. 좀 나오라고 그러세요.”

세 사람이 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디스크자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 나왔다.

“어, 나 모르겠나?”

윤구는 손을 내밀며 일어섰다.

“글쎄.”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에도 나에게 전화했잖아. 일곱 시 사십 분쯤. 나 정 산부인과 원장이야.”

“그런 일 없어요. 전화 안 했어요.”

그는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윤구는 미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미자 씨 저 애는 장난이 심했어요. 일일이 내 행적을 집에 보고했거든요.”

미자는 그러나 능청맞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세요. 저 보라색 유리 상자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너무너무 심심해서 그러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윤구 씨에게 손들었을 거예요.”

윤구는 승리감에 취해 영희를 내려다보았다.

“끝났습니다. 이 이상 변명은 안 해도 되겠죠? 이제 가시지요.”

그러나 영희는 꿈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병주를 향해 말했다.

“병주 씨 우리 먼저 가요.”

영희는 병주를 눈으로 재촉하여 밖을 나갔다. 승리의 쾌감은 순간에 그치고 다시 우울하고 무거운 기운이 내리눌렀다. 윤구는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해는 구름에 가려지고 거리는 한없이 단조롭고 쓸쓸했다. 앞을 걷는 병주와 영희의 발걸음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너무 장난이 심했어요. 그러나 어떻게 해요. 이렇게라도 지내야죠. 안 그래요? 네, 윤구씨 안 그래요?”

미자가 발을 절름거리며 황급히 따라 나와 지껄여댔다.

 

197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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