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재판결론 유도, ‘권한 넘은 남용’ 처벌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4. 3. 17:53

재판결론 유도, ‘권한 넘은 남용’ 처벌했다

등록 :2021-04-02 22:45수정 :2021-04-03 02:31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㉘ 재판이란, 판사란 무엇인가

법원, 이규진·이민걸 판결에서
사법농단 재판개입 첫 ‘유죄’
판사의 나태함-명백한 잘못 등
사법행정권자의 지적 권한 인정

내부선 “재판개입 통로 열어” 반발도
“판단 방향 설정해선 안된다고 명시…
판결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 반박

 

재판 개입 혐의로 기소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2019년 8월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두번째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 혐의는 어느 하나 뺄 수 없이 중대하지만, 그중에서도 스스로도 판사이면서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것은 특히 중대합니다.”

 

2021년 3월23일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양형 이유를 읽어 내려갔다. 2019년 3월 시작돼 2년여 진행된 1심이 마무리되던 이날, 피고인석에 앉은 이규진 전 위원의 얼굴은 다소 붉게 상기돼 있었다. 오후 2시부터 3시간40분 동안 쉬지 않고 선고 이유를 설명한 끝에 재판부가 주문을 읽었다. 이규진 전 위원은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법농단 ‘재판 개입’을 처벌할 가능성이 열린 첫 유죄 판결이었다.사법농단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 사법부 행정 조직인 법원행정처가 일선 재판에 개입하고 행정처 기조와 어긋나는 판사와 판사들의 연구모임에 불이익을 준 사건을 망라한다. 법원행정처 핵심 간부인 이규진 전 위원 등은 재판 독립을 위협하는 대법원장, 행정처장·차장의 지시를 행정처 심의관이나 재판부에 내려보내는 가교 구실을 했다.판사인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기 위해, 그와 함께 일하거나 그로 인해 재판 독립이 침해됐다는 전·현직 판사들이 증인으로 줄줄이 법정에 불려 나왔다. 재판에서 오간 주장과 진술을 종합해 숙고한 결과물은 458쪽 판결문으로 남았다(이하 이규진 1심 판결). 판결문의 핵심은 직권남용죄가 적용될 수 있는지를 따져가며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재판은 무엇인가. 나아가 판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판사는 어떻게 판사가 되는가

직권남용죄(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남용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 권리 행사를 방해해야 성립한다.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이 전제돼야 남용이 가능하고, 그렇게 직무상 권한이 남용돼야 실제 행위의 상대방이 피해를 입게 된다. 남용이 가능한 공무원의 직무상 권한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진행 중인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직무상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건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장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입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2014년 2월~2016년 2월)로 재직하며 3건의 재판에 개입한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재판에 개입할 직무상 권한이 존재할 수 없으니 남용도 성립할 수 없다. 2020년 2월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송인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이하 임성근 1심 판결). 임 전 판사의 행위가 위헌이라 짚으면서도 무죄를 선고한 까닭이다. 재판 독립의 원칙이 오히려 재판 개입 처벌을 가로막은 역설적 상황이다.그러나 이규진 1심 판결은 달랐다. 재판 독립은 헌법이 보장하는 원칙이다. 소송 당사자의 주장은 엇갈리기 마련이고 판사는 그 양쪽의 주장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판단해야 한다. 기록 한번 들춰보지 않고 법정 한번 들어와본 적 없는 제3자가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재판에 간섭한 결과물을 판결이라 할 수 있을까? 재판부는 강하게 단언한다. “그건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그렇다고 재판 독립이 신성불가침한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칙은 아니다. 누구나 재판받을 권리(국민의 재판청구권)가 있고, 그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헌법과 법률의 기속성). 재판 독립은 그 자체로 완성된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법 책임을 실현하는 원칙이자 방법이다. 재판부는 이렇게 첨언했다. “헌법과 법률은 무엇보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재판의 헌법과 법률의 기속성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재판 독립은 그에 버금가게 중요하게 여겼다고 본다.” 재판은 재판 독립과 사법 책임이 조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직권남용 무죄를 선고한 임성근 1심 판결과 그 취지가 다르지 않다.이규진 1심 판결은 한걸음 더 나아가 판사가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되는지를 살폈다. 판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단련되고 숙련돼야 하는 존재다. 사법시험을 거쳤다 뿐이지, 이제 막 임관한 판사가 법복을 입는 바로 그 순간부터 직업적으로 숙련되거나 윤리적으로 성숙한 완성된 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지방법원 배석판사→단독판사→고등법원 배석판사→지방법원 부장판사→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치며 경험을 쌓는다. 또한 근무성적과 자질평정권, 연임심사권, 인사권을 수단으로 판사 스스로 정진하도록 했다.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경력 법조인이 판사로 선발·임명되는 등 변화를 겪긴 했지만 판사 인사제도의 뼈대는 아직 유지되고 있다.재판부는 나태하고 미숙한 판사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쟁점이 복잡하지 않은 쉬운 사건만 골라서 처리하다가 오랫동안 결론 내리지 못한 사건이 산더미처럼 쌓이거나, 행정·특허 같은 전문 분야 지식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국민의 재판청구권과 판사의 독립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상급심에 다시 재판을 구하는 심급제도만으로는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 한계가 있다. 재판부는 “국민의 재판청구권이 재판 독립의 가치와 충돌할 때, 게으르고 미숙한 판사가 명백하게 잘못했을 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판사를 상대로 어떤 지적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고 봤다. 사법행정권자가 재판 사무의 핵심 영역(사실인정, 인정사실에 대한 헌법·법령의 해석과 적용, 이를 위한 실체적·절차적 판단)을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본 것이다.그러나 재판부는 그 한계를 명확히 했다. 나태한 태도나 재판 과정에서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그 판단 방법과 방향을 설정하는 ‘권고’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선을 넘은 권고는 사법행정권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나 직무상 권한과 밀접하거나 상당한 정도로 관련성이 인정되는 월권적 직권남용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018년 9월12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사법행정 인사권과 부당한 권고

독립적인 재판을 수행해야 하는 판사가 ‘윗선’의 부당한 권고에 흔들리는 이유는 사법행정권자가 가진 연임심사권, 근무성적·자질평정권을 포함하는 인사권 때문이다. 직권남용의 상대방인 판사가 의무 없는 일을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이규진 1심 판결은 이런 인사권을 가진 사법행정권자의 직권남용과 권리행사 방해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드러냈다.#1. 2016년 1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광주지법 1심 재판이 열렸을 때다.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판단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요구를 이규진 전 위원을 거쳐 전달받은 재판장은 “재판 결론과 이유가 (법원행정처 기준으로) 올바르지 못할 경우 고등법원 부장판사 보임에서 누락될 수 있다는 불안감 등으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결론을 재검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배석판사들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판결 선고를 후임 재판부에 미루기로 협의해 변론을 재개하고 선고기일을 미뤘다.#2. 2015년 4월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법원행정처 지시로 이규진 전 위원은 재판부에 한정위헌 취지로 한 위헌제청 결정 결론을 바꾸라고 말했다. 재판장은 대법원의 정책적 판단을 거스르는 데 부담을 느끼고 배석판사에게 “법원행정처에서 저렇게 난리를 피우니 어떻게 하겠느냐”며 단순위헌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으로 재판 결론을 바꿨다.물론 부당한 권고를 전달받았어도 “그런 말은 잊어버리기로 마음먹고” 배석판사들과 합의해 법원행정처 기조와 다르게 결론 낸 재판부도 있었다. 인사상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법원행정처의 권고를 무시함으로써 재판부는 결국 재판 독립을 지켜냈다.

 

재판 개입권 만들어낸 모욕적 판결?

재판 개입을 단죄한 이규진 1심 판결을 두고 법원 안팎에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일부 판사의 비판적 의견이 두드러진다.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법률 해석은 엄격해야 하는데, 재판 개입 권한을 만들어내 사법행정권자의 재판 개입 통로를 열어줬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지역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없는 권한을 만들어내고 다수의 판사를 모욕했다.”그러나 판결 요지와 직권남용 법리 해석을 긍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판사의 말이다. “판결문을 읽어보면 재판의 내용과 절차 진행에 관여해 특정 방향의 결론을 권고하는 행위는 지적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이 판결은 그렇게 하면 처벌된다고 천명한 것이다. 법원에서 나오는 내부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다.”조기영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직권남용죄는 ‘직권’과 ‘남용’을 따로, 또 함께 읽어야 한다. 주어진 직권 범위 안에서의 남용은 남용이라 보기 어렵고,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남용이라 봐야 한다. 직권남용 상대방의 입장에서 봤을 때 법령상 정당한 권한의 한계 영역, 밀접하게 관련성 있는 부분을 포함해서 직무상 권한을 해석한 (이규진 1심 판결은) 직권남용 입법 취지에 맞다.”직권남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하급심에서 나온 만큼 대법원 판단까지 거쳐야 할 것이다. 이규진 전 위원과 이민걸 전 기조실장, 검찰 모두 항소했다.“선배 법관으로서 조언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직무상 권한을 행사한 게 아닙니다. 법관 독립에 위배되지 않았습니다.”재판 개입이 1심에서 최초 유죄 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3월24일) 헌법재판소에서는 헌정사상 첫 법관 탄핵재판이 열렸다. 임 전 판사 쪽은 형사재판을 받을 때 했던 주장을 되풀이했다. 탄핵안을 소추한 국회 쪽 대리인은 “헌법재판에서 심리하는 것이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아주 귀중한 가치, 즉 사법권 독립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사법부 구성원이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 어떤 행위는 해야 하고 어떤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 경계선을 긋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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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9466.html?_fr=mt2#csidxa8092b01fedef719fbf9574a556941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