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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힘으로 틔워올린 새싹, 그 생명력의 사치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4. 25. 21:46

씨앗의 힘으로 틔워올린 새싹, 그 생명력의 사치

등록 :2021-04-24 09:44수정 :2021-04-24 09:48

 

[토요판] 이런 홀로
씨앗 출석부와 베란다 농부

봄바람 불자 사온 꽃과 허브 씨앗들
키친타월 깐 쟁반에 밤낮으로 물주며
말랐나, 자랐나 턱 받치고 관찰한 몇주

힘차게 고개 내민 나팔꽃부터
마지막까지 애태운 로즈메리까지
저마다의 속도로 차례차례 핀 새싹들

베란다 화분에 옮겨심으니 ‘쑥쑥’
여름이면 피어날 꽃을 만나겠지
생각만 해도 만족감이 차오른다

 

허브 중 가장 먼저 터진 것은 바질. 바질의 떡잎은 성장한 바질 잎처럼 동글동글하고 귀여웠다. 게티이미지뱅크

 

봄이 오면 늘 박완서 작가가 말했던 ‘꽃 출석부’가 생각난다. 자신은 늘 마당에 100가지도 넘는 꽃이 있다고 으스대지만 기화요초가 핀 화려한 꽃밭을 기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당을 보고 실망한다고. 그러니까 100가지 꽃은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꽃들은 한꺼번에 피지 않는다. 복수초, 상사초, 수선화, 매화, 살구꽃 등이 차례차례 피고 지고, 그 그늘에 제비꽃이나 민들레와 같은 작고 낮은 꽃들을 거느린다. 박완서는 홀로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차례차례 오는 그것을 기다리고 마중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례대로 번호와 이름이 쓰인 출석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뭉클해지곤 한다.처음 그의 ‘꽃 출석부’를 본 이후로 내 머릿속에도 봄꽃의 출석부가 생겼다. 출석부는 매년 새로운 꽃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것이 피는 시기를 알게 될 때마다 조금씩 추가되고 수정되었다. 나의 봄꽃 출석부는 100번까지는 안되고 고작 20번 정도까지다. 그래도 나 나름대로는 나의 내면에 나만 아는 꽃 출석부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꽃의 출석부를 매긴다는 것은 봄이 오고 꽃이 핀다는 평범한 일에 새롭게 감각을 여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홀로 하는 일이다. ‘매화가 피었구나, 산수유가 필 때가 되었네.’ ‘자목련은 백목련보다 출석이 늦구나.’ ‘겹벚꽃과 라일락이 피었으니 올해 봄꽃도 거의 출석부 끝이구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혼자 나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올해 나의 봄꽃 출석부에 추가된 것은 황매화와 설유화이다. 노랗고 우아한 황매화는 작은 방 창문 너머 뒤뜰에 피어 있고, 눈송이 같은 설유화는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곁에 피었다.

 

수경 발아해 옮겨심기까지

 

올해 또 하나 추가된 것은 우리 집의 씨앗 출석부다. 내게는 마당은 없지만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가 있는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봄이 오면 베란다 농부가 되어야지, 하고 겨우내 별렀다.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다이소에서 씨앗들 몇 개를 사왔다. 나팔꽃, 봉선화, 채송화.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 목록에서 자주 보았던 정겨운 꽃들이었다. 그리고 꽃상추, 바질, 라벤더, 로즈메리까지.흙에 직접 심는 것보다 수경 발아가 더 쉽다고 해서, 나는 수경 발아를 하기로 했다. 쟁반에 키친타월을 깔고 씨앗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뒤 물을 뿌려 흠뻑 적셔주고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랩을 씌우고 숨구멍을 뚫어주었다. 수분이 절대로 마르면 안 된다고 해서, 아침저녁으로 랩을 열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어야 했다. 그때마다 턱을 받치고 그것들을 관찰하는 시간은 지난 몇주간 나의 큰 기쁨이었다.씨앗들은 저마다 크기도 색깔도 달랐는데, 싹을 틔우는 시기도 서로 많이 달랐다. 첫날 외출하고 돌아오니 불과 몇시간 만에 하얀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씨앗이 가장 굵고 큰 나팔꽃이었다. 그 다음날 출석한 것이 봉선화와 꽃상추다. 이 세 가지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자라났다. 그다음으로 싹을 틔운 것은 채송화다. 채송화의 씨앗은 어렸을 때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주 아주 작다. 새싹도 너무 작고 여려 큰 씨앗들과 섞여 있으면 잘 보이지조차 않는다. 미세한 채송화 새싹도 무럭무럭 자라났다.가장 늦은 것이 허브 종류였다. 처음 며칠간 이것들은 물을 머금고 마치 개구리알처럼 씨앗 주변으로 투명한 막을 생성했다. 곧 그 투명 막이 터져 싹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 뒤로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허브 중 가장 먼저 터진 것은 바질. 바질의 떡잎은 성장한 바질 잎처럼 동글동글하고 귀여웠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라벤더 몇개가 싹을 틔웠고, 가장 마지막까지 애를 태운 것이 로즈메리였다. 나팔꽃은 쟁반 위에서 이미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자라나 있었다. 상추도 바로 새싹 비빔밥을 해 먹을 만큼 무성하게 자라났다. 로즈메리까지 모두 충분히 싹을 틔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썩기 전에 흙으로 자리를 옮겨 햇빛을 보여줘야 했다.나는 집에 있던 플라스틱 일회용 반찬 용기에 구멍을 뚫어 작은 모종 화분을 만들고 흙을 채웠다. 그리고 쟁반 위에서 오직 씨앗에 담고 있던 힘으로 성실히 잎을 피워낸 이것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옮겨 심었다. 얼마 뒤엔 조금 더 자라게 둔 로즈메리를 빼고 모든 새싹들을 흙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하루하루 다른 푸르름

 

‘만물이 생동하는 4월’ 같은 말이 식상한가? 4월은 정말 만물이 무섭게 살아 움직인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 풍경이 하루 사이로 눈에 띄게 푸르러진다. 집 안과 베란다의 식물들이 무섭게 새 잎을 피워 올리고 자라난다. 최근 며칠 사이 이 작은 식물들의 생장 속도 역시 무서울 지경이다. 흙에 뿌리를 박고 머리를 들어올리는 힘이 대단하고 어떤 것들은 벌써 두번째 잎을 틔운다. 희멀건했던 잎의 빛깔도 햇빛을 받아 점점 진한 초록으로 변해간다.갓 발아한 여린 새싹을 키우는 일은 이미 성장한 화분의 식물을 키우는 일과는 또 다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은 새싹에 물을 주는 일이 얼마나 세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발아한 새싹은 아직 힘이 없어 물을 주면 쉽게 흙에 덮여버린다. 그때 흙에서 조심스럽게 잎을 찾아내 바깥으로 꺼내놓지 않으면 새싹은 종적을 감춘다. 처음에는 알아서 머리를 내밀겠지 하고 그냥 두었는데, 그렇게 땅에 묻혀버린 새싹은 일주일 남짓 지난 지금까지도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반면 머리를 찾아 땅 위에 꼿꼿이 세워준 새싹들은 벌써 두번째, 세번째 잎을 틔우고 있다.1번 나팔꽃, 2번 봉선화, 3번 꽃상추, 4번 채송화, 5번 바질, 6번 라벤더, 7번 로즈메리. 씨앗들은 저마다의 힘을 품고 차례차례 피어난다. 일찍 퇴근하고 돌아와 해질녘 베란다에 앉아 하루하루 조금씩 자라난 식물들을 들여다보며, 초여름쯤에 피어날 보랏빛 나팔꽃을 상상한다. 나팔꽃은 아침에만 피고, 한번 진 꽃은 다시 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저 새싹이 꽃을 틔울 때쯤엔 잠시 피고 지는 꽃을 보기 위해 아침 기상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황매화와 설유화가 추가된 봄꽃 출석부를 들고, 이제 여름꽃의 출석부를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완서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그것들을 부양할 베란다가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만족감이 차오른다. 그런 것이 요즘 나의 사치다.                 다이나믹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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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토요판] 이런, 홀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2416.html?_fr=mt0#csidxd83b9880c48375da4b26b9846cfb6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