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1219 사랑은 여기 있으니(요한1서 3:16-24)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29. 06: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20101219

성경본문(개역개정)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1 3:16-24)                                                         

 

   서울 온누리교회에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1999년에 창단되어 이제 10주년을 넘겼죠. 그 일화를 담은 책이 나와서 읽어보았습니다. 지휘자가 손인경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 북카페에서 늘 틀어주는 음악 가운데 소마트리오라는 앨범이 있는데 바로 그의 연주 앨범입니다. 그는 3살 때부터 홍콩에서 자라 미국 예일대에서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이지요. 한국에는 전혀 뿌리가 없고 기반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한국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위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데서도 교수로 불러주지 않는 거예요. 내심 실력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느 연주회에 갔다가 장애인 청소년들이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 누가 저렇게 지도하고 가르쳤을까 문득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도 장애인들이 참 많은데 그 아이들을 모아서 레슨을 해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교회에다가 그런 뜻을 전했습니다. 본래 지체장애인들을 모아서 하려고 했는데 교회에서는 정신장애자까지 다 환영합니다라고 광고하는 바람에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5명으로 시작해서, 10년이 지난 오늘에는 유치부에서부터 나이 30까지 65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10년 자폐아도 있고 학습장애아도 있고 뇌성마비, 다운증후군 등 온갖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죠. 그들과 함께 10년 동안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정상적인 교육방법으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요. 잠시도 집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 친구들에게 개인레슨을 해주는 교사들, 또 그들의 어머니들과 더불어 10년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랑입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젊음의 열정도 가지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것도 장애예요. 꼭 몸만 장애가 아니에요. 꼭 기능의 장애가 아니에요. 내가 지금 뭘 해야 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모두 다 장애인이에요. 그런 점에서 보면 장애가 없는 사람은 없는 거지요. 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10년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볼 때는 참 세상 살아가기 어렵겠다, 참 딱하다라고 얘기하지만, 그 사람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를 더 딱하게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멀쩡한 몸을 가지고도 온갖 세상의 고민을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장애자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10년 동안 사랑 챔버를 통해서 지휘자의 생각을 만지시고 고쳐가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그 어려운 학위도 따게 하셔서 남다르게 열심히 했건만 왜 한국에서 교수로 자리잡지 못하게 하셨는가. 장애인 챔버를 10년 동안 이끌면서 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체험과 은혜 가운데 깨달은 것은, 이 장애인 오케스트라야말로 내가 할머니가 되도록 평생을 쏟아 부을 만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 안에서 길을 찾았어요.

   장애를 끌어안고 사는 부모들의 소망은 내 자식보다 단 하루만 더 살았으면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저 아이를 두고 눈을 감는다면 저 아이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될까라는 것이 그들의 멍에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10년 동안 불가능할 줄 알았던 일, 자녀들이 연주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장애아 부모들 마음속에서 놀랍게도 하나님과 막혔던 벽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하고 불렀을 때 그래하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게 마음이 열려 있는 것, 그거 쉽지 않아요. 그것도 은총이에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이 자리에 나와 함께하시고 내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엎어졌어요. 죽은 자같이 엎어졌어요.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 못했어요.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그는 선지자였지만 자기의 죄가 다 드러나 엎드러졌어요. 나는 이제 죽는구나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총을 체험하게 돼요. 부활을 체험하게 돼요. 새사람이 돼요.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말씀은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과연 누가 갈까라고 물으실 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랑의 명제를 아시지요.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요. 그래서 유행가는 다 사랑이잖아요. 그렇게 질리도록 사랑을 불러도 목마르게 아쉬운 것이 사랑이기에 또 노래를 만들어내잖아요. 사랑의 명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아름답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이야기예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종교와 도덕가들의 이야기예요.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이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 사랑하게 돼요.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을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모르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굴레가 되고 멍에가 되고 무거운 짐이 돼요. 성경은 말합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 아름답고 좋은 것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행할 능력이 없어요. 그러기에 우리 삶을 짓누르는 고통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감격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을 사랑하게 돼요. 복음을 알고 나서야 율법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걸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날마다 체험하게 하셔요. 사랑은 아름답다라는 것이 시인들의 시구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신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그저 하나의 추상적인 명제로 말하지 않았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를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화목제물로 내어놓으셨다. 바로 그렇게 오신 예수를 우리가 보았고 이제 증거한다, 이렇게 말해요. 요한1서가 쓰여질 당시 교회는 어지러웠어요. 교회에 들어온 잘못된 철학이 있었어요.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말해요. 영적 지식을 강조한다는 말이에요. 영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 기초한 이원론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 있는 것뿐이다. 실체가 아니다. 허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완전한 상태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눈으로 보이는 것은 그림자이고 거짓이고 헛된 것이고 악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은 완전하다고 생각했어요.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종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완전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에요. 소중한 거예요.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모두 중요한 거예요. 먹고 마시고 입고 웃고 떠들고 함께 어우러지는 그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요.

   오늘 남선교회가 부부 골프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녁에는 송년 모임을 한다고 하는데 이거 아주 중요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쾌락으로 빠지는 거예요. 똑같은 골프를 해도 마음이 무거워요. 이거 하나님께서 과연 원하시는 건가 이렇게 돼요. 의심하면 죄라고 했어요. 여러분, 원래 안식일에는 이렇게 오전에 예배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가족과 함께 모처럼 쉼을 나누는 거예요. 교회는 큰 가족 공동체잖아요. 같이 푸른 들판에 나가서 운동하는 것, 잘하는 거예요. 내기하면서 욕심을 부려서 문제지 서로 기쁨으로 운동하고 같이 식사를 나누는 것, 즐거운 일이에요. 우리 삶에 얼마나 위로가 필요합니까. 서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는 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영지주의 신앙은 이원론이에요. 교회 안에서 예배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고 집에서 지지고 볶고 살림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짓이다, 이건 잘못된 신앙이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은 거룩한 것이고 밖에 나가서 비즈니스하는 것은 속된 것이다, 아니에요. 비즈니스도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어디에 있든지 무얼 하든지 항상 내 안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 그게 신앙이에요. 항상 그것을 의식해야 돼요. 누구를 만나서 거래를 하고 무엇을 하던 간에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세요. 다 아뢰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세요. 우리의 수준과 형편을 낱낱이 아세요. 하나님은 우리와 열린 교제를 원하시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이에요. 아들을 내어놓으신 사랑이에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역동적인 사랑이에요. 십자가의 구원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끌고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고치시는 사랑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두 번째 명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것은 하나의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체화된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믿는다는 말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안 믿는다가 아니라 불순종한다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2 19절에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네가 믿느냐? 참 잘하는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알고 있어요. 믿고 있어요. 문제는 지적으로 동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 할 때 그 사랑이 쉽습니까? 쉽지가 않죠. 솔직히 말하면 불가능하죠. 남편, 아내, 이웃 누구와도 쉽지 않아요.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줄 스스로 알지요. 하나님께서 내리사랑의 본능을 주셔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다 불가능해요.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해요. 십자가의 원초적 사랑, 완전한 사랑 아니고는 불가능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상처 받았다는 말, 상처 받았어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고통이 되고 심리적 장애가 되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펼칠 수 없게 만들어요. 날개가 부러진 새 같아요. 삶의 의욕이 꺾여요. 그런 상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 크게 받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나를 열어 보였기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아요. 남편과 아내 간의 상처가 가장 큰 것이죠.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실족했다. 발을 헛디뎠다. 헬라어로 스캔달리조마이 영어로스캔들이에요.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예요. 실족했어요. 실족했을 때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의 진정한 상태를 올바로 분별할 능력을 잃어버려요. 상처를 받았다는 억울함 때문에 자기를 희생양으로 여겨요.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네가 나를 무시했어, 상처를 줬어.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실상을 모르게 돼요. 사탄이 우리 삶 속에 던져놓은 덫이에요. 덫에 걸려든 거예요. 그 덫에서 몸을 뒤틀면서 상처는 더 깊어지는 거죠.

   존 비비어John Bevere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그분의 <관계>라는 책을 읽어보면 실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도 목회를 하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어요.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가까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분노를 쏟게 돼요. 너무 억울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어요. 네가 왜 그렇게 분노하고 몸부림을 치느냐 하나님 보십시오, 내가 이런 상처를 받았는데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너는 금 덩어리를 풀무 속에 넣어서 녹이는 것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그 금은 깨끗한 순금도 아니고 정금도 아니고 합금이기 때문에 거기엔 불순물이 섞여있단다. 불 속에 들어가기 전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 속에 과연 불순물이 눈에 보이더냐? 아니요,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금 안에는 불순물이 있지만 맨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그것을 풀무 속에 던져 넣으면 불순물은 떠오르고 금은 가라앉아 그래서 부드럽고 깨끗한 순금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그 고난을 통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허물이 다 드러나게 되면 그것을 내가 거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상처받았다고 몸부림치지만 말고 죄와 허물과 분노와 어그러진 모든 불순물들을 오늘 내가 거두어줄 테니 이제는 네 미래를 선택하라.

   여러분, 우리가 상처를 받아 마음 속에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 같이 보여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고난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분리시키는 하나님의 작업이에요. 그게 뼈아픈 작업이 되도록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대시는 것뿐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잘못하고 실수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안에 깊은 죄와 허물이 있어요. 그것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일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괴롭게 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그 고난을 통해서 나의 불순물을 거둬주시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네 미래를 네가 선택하라.

   우리가 부부 싸움을 하다가 흔히 그러잖아요. 너무 화가 나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만 잘하면 돼 저도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세상에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신만 잘하면 되다니! 저도 말하려면 얼마든지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때가 중요해요. 고린도전서 8 1절에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 그는 큰 은혜를 받을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제가 그렇게 들었다니까요. 당신만 잘하면 돼, 세상에 그렇게 억울한 말이 어디 있겠어요. 그 순간 이 구절이 떠오르더라고요. 이걸 논리로 풀어가겠다고 시비를 따지기 시작하면 사단 마귀의 시험에 걸려 함께 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이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죄 많고 허물 많은 나를 위하여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알기도 전에 십자가에 몸을 내어놓으셨구나.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논리와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므로 나는 하나님 안에서 한 번 더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논리로 받는 사람은 똑똑한 바보예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해요. 아내와 남편이 시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어요. 그건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해결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날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믿음으로 붙드는 순간 코페르니쿠스적 변환이 일어났어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 맞다.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일이로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사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고민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자 하나님, 알겠습니다. 저나 잘하겠습니다. 했어요. 저나 잘하기 위해서 전 이제 다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니 하긴 그렇습니다. 제가 죄 속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먹고 마시고 오늘까지 살았는데 이제 목숨을 거둬가신들 제가 뭐라고 원망하고 불평하겠습니까? 아니요, 이날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만도 주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도록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만 잘하면 된다. 너만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지면 나머지는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말씀하시니, 그렇습니다, 저 지금 당장 죽겠습니다. 당장 죽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 순간에 평화가 오더라고요. 아 맞다. 이걸 왜 부질없이 사람하고 시비하려고 했던가, 어리석은 일이지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져 죽는 것 외에 방법이 없구나.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 이게 온전한 사랑이에요. 우리가 이 사랑을 믿기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요. 내 상대가 행실을 바르게 해서가 아니에요. 무조건적인 순종이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나만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면 돼요. 나머지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이루어 가실 것이에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