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 (골 3: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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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 (골 3:1-4)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추방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무능력이요, 무관심이요, 무감동입니다. 무감각이요, 무책임'입니다.
  무능력이란,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아가는데 힘이 없습니다. 하겠다는 입은 있으나 할 만한 손발이 없습니다. '구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무관심합니다. 사랑을 관심이라고 한다면 사랑이 없다는 그런 말입니다. 모임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관심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합니다.
  그리고 무감동입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웃음이 없습니다. 웃을 줄 모릅니다.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무감동이 제일 불쌍한 인생입니다.
  문제는 책임감입니다. 가정의 주부가 주부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있으면 가족이 건강할 것입니다. 남편 되는 분들이 가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할 것인데 무책임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낄 때 그 집단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을 맡겠다는 분은 있는데 책임질 사람이 없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니까 남는 것은 탓 밖에 없습니다. '이건 누구 탓이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생깁니다. 아무리 정다운 신혼부부라 하더라도 서로가 탓만 하면 얼마 못 가서 살 수 없다는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할/
  우리는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우리는 이웃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에 감격을 누려야 하며, 말세에 사는 영적 시대적 감각이 있어야 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믿/ 그 은혜를 받기 위에 '위를 보아야 하고 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목 소개!▶

  본문을 함께 상고하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할/ 

 

  1. 위엣 것을 찾으라!(1)
   
  오늘 본문을 보면 '저 위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안드로포스'라는 말로 '위를 보고 사는 자'란 말로, 원래 인간이란 위를 보고 사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누구를 바라보라고 하십니까?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할/
  바울은 '위를 보고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목적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은 모두 저 위로부터 옵니다. 만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로부터 주어졌습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위로부터 밤사이에 내립니다. 주님도 저 위로부터 오셨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저 위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존슨 오토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시121장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저 높은 곳, 인생의 모든 근본적인 도움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옵니다. /믿/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은 저 위로부터 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아멘!/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저 위를 보고 살고 짐승은 아래를 보고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사람은 두발로 걸어 다니게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짐승은 네 발로 기어다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땅을 보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이고 삶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인간의 값이 인정됩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 위를 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상주의자이고 또 하나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이상주의자는 저 위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중시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 수고하고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물질보다 정신에 더 비중을 두고 저 높은 곳에 뜻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내일 천국을 위해서 오늘의 즐김과 놀이와 환락과 재미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 수난도 수고도 희생도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신앙 인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인간이 값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저 천국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뜻을 두고 목적하고 흔들림 없이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현실주의자는 먼 장래보다는 당장 현실의 일에 열중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생일날 먹자고 오늘 굶지 않습니다. 정신적 기반 보다 물질적 기반을 중시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뜻도 생각도 관심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속물이 될 수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귀한 것은 한결같이 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할/
  생명이 위로부터 왔고, 구원이 위로부터 왔습니다. 기도의 응답도 위로부터 오고, 성령의 능력도 위로부터 옵니다. 위를 보고 사는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이 거기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길이 거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길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땅히 저 위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위를 보려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 위를 보게 되느냐 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올려다봅니다. 앞이 콱 막혔을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미래가 막막할 때 위를 올려다봅니다. 장래가 불안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 위를 올려다봅니다. 무신론자도 그 상황에 빠지게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할/
  ▶어떤 청년이 어머니의 고지식한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배우지 못하고 너무 무지해서 저렇게 고지식하게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주일마다 꼬박 교회에 나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는 어머니의 저속한 믿음생활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젊은이가 군에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한마디를 했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거든 너는 위를 보라'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고 전선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잘난 아들이 전선에서 작전 중에 적진에서 퇴각하다가 홀로 낙오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별 수단이 없었습니다. 지금 자기가 위치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방향조차 모를 만큼 혼돈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 젊은이 마음속에 그 무지하고 고지식하기만 했던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탈 때 마지막으로 전해주시던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전선에서 암담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거든 저 위를 보라'
  그때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가장 진솔하고 가장 솔직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저 위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고, 이 젊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절박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나를 살려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를 기억해 주세요'
  이 젊은이는 일생 처음으로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동안 유치한 어머니 신앙을 비웃었는데 오늘 처해 보니 오직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이 젊은이는 비로소 뼈저리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고 기도한 후 극적으로 구조대에 의해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할/
  인간의 존재는 이 정도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능력을 가지고 지금 그렇게 큰소리치고 폼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좀 여유 있다고, 건강하다고, 능력이 좀 있다고, 기술이 있다고 자만 떨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다윗은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참 가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하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길은 저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미국인들의 영적 상태를 조사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59%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믿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65%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공공건물 앞에 머릿돌처럼 십계명 현판을 붙여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판을 그냥 놔두자는 응답이 79%이었고, 그것을 제거하자 하는 응답은 18%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동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라는 문구를 그냥 두자는 응답은 84%, 제거하자는 응답은 1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의 조상의 청교도의 신앙의 절개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국민 7-80%가 '저 위를 보고, 생각하고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국민은 국가에 재난이 오고 위기가 올 때는 백악관에서 국회의사당에서 나라의 지도자들이 모여 구국 기도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기 때 미국이 나아갈 길과 방법은 오직 저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강한 민족입니다. 위기 때 저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민족, 국가가 강한 나라이고 지혜 있는 민족이고 구심점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나라들은 위기가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기가 올수록 더 강해지고 뭉치고 단결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길이 저 위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③저 위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세속화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온통 오염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가 하면 성한 곳이 한곳도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골3:5-8절을 보면 오늘 이 세상의 오염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이 저속해지고 병들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한결같이 가슴 아픈 부정적인 뉴스가 판을 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소식, 딸이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소식, 어린 아이를 유괴해서 죽여 산에 묻었다는 소식, 알고 보니 그 유괴범은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동업했던 사람이었다는 소식, 아파트 값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 우리들이 매일같이 똑같이 일어나는 이런 소리들만 듣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환경이나 주위 여건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삶의 주변이, 환경이, 여건이 경건하고 엄숙하고 숙연하면 그 인생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분위기가 고상한 분위기이고 경건한 친구들이 있는 환경에 살아가게 되면 내 인생도 나의 삶도 그렇게 경건하게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산에라도 가 보십시오. 우선 들려오는 소리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느낌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순간 마음이 맑아지고 조용해지고 침착해지고 잃어버렸던 생각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최소한 도심을 떠나 산에 가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저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저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은 물론이고 우리의 영까지도 맑아지고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저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소리가 거기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귀한 것은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④그런데 그 길은 헌신과 수고가 없이는 못가는 그런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위를 올려다보는 생활에는 반드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 위에 있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 위를 보며 살아가려면 위를 올려다보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도중에 하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도중에 하차하는가 하면 올라가는 수고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 수고가 필요하고 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묵상생활도 하고 산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매일 피곤한 육체를 끌고 저녁이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려면 때로 금식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식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험은 사고가 발생하고 난 후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가 발생할 것을 미리 대비해서 가입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식은 사고가 난 후에 하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 금식하게 되면 그 금식이 더 힘들어집니다. 살을 빼기 위해서 금식해 보십시오. 더 먹고 싶고 더 힘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을 빼면 헛수고입니다. 금식 후 더 먹게 되어 살이 더 찝니다.
  금식은 연단을 위해서,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평소에, 여유 있을 때, 기회 있을 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그 수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만들고 영적 깊이를 깊이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멘!/ 
  세상에서 내려가는 것은 모두가 쉽습니다. 산을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내려갈 때는 쉽습니다.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습니다. 깨끗해지기는 어려워도 더럽혀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수양하기는 힘들어도 타락하고 방탕하고 추해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오토만은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옛날 중국의 산동성에 어느 신념이 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에 큰산이 가려서 살아가기가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노인이 어느 날 '이 산을 옮겨보자' 하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삽으로 산을 옮기기 위해서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그 큰산을 옮기겠느냐고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노인이 '내가 죽는 날까지 파 낼 것이고, 파다가 죽으면 내 아들들이 파낼 것이고, 손자들이 파내다 보면 언젠가 이 산은 옮겨질 걸세'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꾀도 있어야 하고 요령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 것은 믿음이고 행동입니다. 저 높은 곳을 동경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이루는 데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까지 한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그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너무 급한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서두는 것이 병입니다. 그러니까 포기도 빠르고 체념도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전4:15절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 인들에게 강하게 당부하기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할/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본문에 보면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이미 과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고,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이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우지도 방문하지도 않은 교회이었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레몬과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졌습니다(골1:6-7).
  빌레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골로새 교회가 이단 사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서신이 옥중에서 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 '신천지'라는 이단이 극성을 부려 기성교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기성 교회를 차지하려고 신천지에 속한 신자들을 기성교회에 파견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신천지 이단은 열심을 다하여 기도와 헌금 그리고 봉사에 힘을 써 교인들의 인정을 받은 다음에는 기성 교회와 담임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해서 반감을 갖게 만들어 성도들을 신천지 교회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처음에는 기성교회와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나 6개월 기초과정이 끝나면 신천지 교회에 들어가 본격적인 그들의 교리를 가르치는데 교주 이만희를 메시아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만희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다 기독교를 가장한 이단들입니다. /할/
  골로새 교회에 유포된 이단 사상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오신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에는 최고의 신과 천사들이 있는데 그리스도는 천사 같은 존재 중 하나이기에 천사 숭배나 그리스도 숭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천사도 함께 섬겨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직 믿음, 오직 예수'만을 역설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같이 죽었습니다.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갈2:20절에서 고백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죄와 허물과 실수를 해결하기 위한 죽음임을 믿는 순간 우리의 옛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할/

 

  ①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 우리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죽었다는 데서부터 기독교는 출발합니다. /할/
  여러분, 우리에게 걱정근심이 많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죽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아직도 덜 죽어서, 아직도 설죽어서 그렇게 버둥거리고, 생각도 많고 복잡한 것입니다. 이미 죽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온전히 죽었습니다. 그만이 아닙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은혜 앞에서 죽었습니다. 큰 은혜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너무 크고,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감격하는 순간 내 모든 것, 내 욕심, 내 자기중심적인 교만, 내 세속적인 욕망과 고집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봄날에 눈 녹듯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할/
  ▶스펄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나서 물이 많이 불었는데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 하나가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수영을 잘하는 구조대원 두 사람이 그쪽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런데 건질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간 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그 사람은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진맥진해서 더 버둥거리지를 않습니다. 두 구조대원은 그제야 손을 써서 그 사람을 건져냅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왜 빨리 건지지 않고 기다렸느냐고 물으니까 그들은 대답합니다.
  '저 사람이 힘이 남아 있어서 버둥거릴 때에 손을 잡았다가는 내 목까지 끌어안아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살겠다는 생각을 아주 버리고 손을 들어야 안심을 하고 건져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은혜 앞에 죽고, 율법 앞에 죽고, 그 넓은 사랑 안에 완전히 죽어져야만 합니다. 성 마카리우스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 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성자는 아주 실질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너, 오늘밤에 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보고 '이 나쁜 놈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부자 놈들아, 이 천하에 고약한 놈들아'하고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다하고 돌아오너라' 제자는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를 보고 성자가 묻습니다. '어떻더냐?' 제자가 보고합니다. '아무 반응도 없던데요' '그렇더냐?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다시 가서 이번에는 칭찬을 해보아라. '아, 훌륭하고 위대한 분들이여' 제자는 아침이 되자 다시 묘지로 가서 성자가 시키는 대로 무덤들을 향하여 잔뜩 칭찬의 소리를 늘어놓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더냐?' '역시 아무 반응이 없습디다.' 비로소 성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죽은 사람, 반응이 없습니다. 칭찬해도 교만할 것 없고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이 없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갖은 모략 중상을 당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깨끗이 죽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②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율법 앞에 죽고 다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된 의미, 나의 나된 목적 전부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삽니다.
  고5: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바로 그분을 위하여 시는 것이 내 생애의 목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빌3:12절에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것이 내 이상입니다. 내 기쁨도 그리스도요, 내 영광도 그리스도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내가 죽어도 주의 것이요 살아도 주의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절정은 갈2:20절에서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③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타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듯이 그리고 분명히 오십니다. 살전1:16-17절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할/

 

  3. 위에 높이 올라 멀리 보아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이 베스트 셀러로 각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조나단 리빙스턴 시갈'이라는 이름을 가진 갈매기입니다. 조나단 갈매기는 다른 갈매기와 전혀 다른 갈매기였습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햇변가에서 하루 종일 먹이만 찾아 헤매며 살았습니다. 배부르면 놀고 자고, 배고프면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갈매기는 더 높이 잘 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조나단 갈매기는 '허무 맹랑한 갈매기'라는 죄목을 쓰고 갈매기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쫓겨난 조나단 갈매기는 쫓겨난 외로움 때문에 울지 않았습니다. 동료 갈매기들이 능력이 있으면서도 날지 않고 가능성이 있는 데도 하늘로 오르지 않고 땅만 보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쫓겨난 조나단 갈매기는 갈매기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멋지게 나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불철주야 멋지게 하늘을 치솟으며 나르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야 말로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조나단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은빛 날개를 가진 두 마리 갈매기를 정신 없이 따라 갔습니다. 그 곳에 가보니까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갈매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조나단 갈매기는 노숙한 늙은 갈매기로부터 하늘을 치솟아 나르는 기술을 더욱 더 확실히 배웠습니다. 이제 조나단 갈매기는 능숙하고 멋진 비행술을 터득하였습니다. 이제는 완벽하였습니다. 더 높이 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빨리 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멋지게 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쉽게 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철학이 더해졌습니다. 노숙한 늙은 갈매기는 조나단 갈매기에게 비행술을 가르쳐 주면서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라'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조나단 갈매기는 자기를 내 좇은 갈매기들에게 돌아가던 중에 그 때 자기처럼 쫓겨나는 '플레쳐'라는 갈매기를 만났습니다. 조나단 갈매기는 플레쳐 갈매기에게 높게 날라 멀리 보는 시각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것이 '갈매기의 꿈'의 내용입니다. 조나단 갈매기의 말 중에 가장 핵심적인 말은 이것입니다. '가장 높이 나는 자가 가장 멀리 본다' '높이 올라 멀리 보라' /할/


  ①생각을 높여야 합니다.
  높이 올라가 멀리 보는 고상한 삶을 살려면 위엣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그 것처럼 높이 생각을 올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생각이 어디 있겠습니다.
높은 산만큼 생각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 뜨는 10km 정도로 생각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처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공위성만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앉아 계신 하늘 보좌만큼 생각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생각의 날개를 조나단처럼 높이 올리십시오. 신나게 올리십시오. 땅을 보지 마십시오. /할/


  ②말을 높여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할/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며 살려고 하면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예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이 아닙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할/
  벳세다에 5천명이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냥 보냈다가는 허기져서 쓰러질 것같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때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때가 저물었습니다, 빈들입니다, 200 데나리온도 부족할 것입니다' 모두 부정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말했습니다. '5병2어를 가진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안드레 말속에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기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기적이 들어 있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능력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믿음을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모험이 없이는 큰 일이 없습니다' '내밀면 갈라지리라' '네가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 /할/ 계산은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상식이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습니까?/


  ③왜 우리가 위를 보아야 하는가? 우리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6: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는 한 아버지만이 계시는 곳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고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아버지며 영원히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위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④하늘은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히11: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찾는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라 하고 세상을 여관이라 하며 인생을 과객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늘을 본향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데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 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미국의 시민권을 가져도 기뻐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세상 어디에 살아도 반드시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이라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할/


  ⑤우리가 위를 보고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통제하심, 다스리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⑴성령 충만하면 인격이 달라집니다.

  ⑵성령 충만하면 능력이 달라집니다.

  ⑶성령 충만하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⑷성령 충만하면 사역이 달라집니다. /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 5장에서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에 켜졌을 때 그 불을 소중하게 여기고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좋은 생각 선한 마음이 생기면 성령이 나에게 주시는 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고 성령이 감동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찾아오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착한 마음이 생기게 되면 가슴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평상시 보통 때 하지 않았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징조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얼른 알아차리고 소중하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시는 그대로 우리 삶에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좋은 생각, 선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 들어도 하루저녁 자고 나면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분 모두 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설교시간에 좋은 생각이 났다가 끝나면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 중에 사람들이 체크카드를 꺼내서 적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그 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람은 잠시 왔다가 지나갑니다. 바람을 머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도 붙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갑니다. 성령은 좋은 감정을 주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붙잡지 않으면 금방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바람이 불 때 그것을 꼭 붙잡고 얼른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여러분, 때때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으로 성령으로 밝히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해보겠다고 하지말고 좋은 생각 선한 생각이 나거든 일을 저지르십시오. 무작정 일을 저지르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집 짓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감동적인 인생을 살았는가 무슨 선한 일을 살았는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 속에 살기 위하여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2011년 10월 1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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