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31) 아브람의 연약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05

5. 아브람의 연약(창 16:1-16)

아브람의 생애에도 강약과 고저, 명암이 있다. 그렇게도 찬란했던 믿음(창 15:6)에 횃불언약의 보증이 따랐던 창세기 15장의 장면에 비해, 16장에서 보는 아브람은 깊은 어둠에 빠져버린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시험에 빠져 연약해져 버렸고, 그 결과 가정에 분란이 오고, 이스라엘 선민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람의 가정이 만난 비극을 정돈하고, 하갈에게 이스마엘의 출생을 예고하고, 하갈로 하여금 ‘감찰하시는 하나님’ 곧 ‘브엘라해로이’라고 하는 새로운 은혜 체험을 하게 하였다.

1) 아브람의 연약(창 16:1-6)
(1)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
① 하나님 언약에 대한 불신앙이다.
그 불신앙은 사래에게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6장 2절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사래의 불신앙이다.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했다. 그럼에도 사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도 ‘씨’는 아브람의 씨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를 대신하여 하갈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애굽에서 데려온 여종 하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를 받을 것을 제안하였다(창 16:2).
여기에 나오는 하갈은 애굽사람이라고 하였다(창 16:1). 아마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 왕 바로로부터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선물로 받을 때 데려온 사람 같다(창 12:16). 그 이름 ‘하갈’의 뜻은 ‘도망간다’라는 의미였다. 그는 사래의 몸종이 되었다(창 24:59, 29:24, 29).
이때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연약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앞에 반복된 하나님의 언약(창 12:2-3, 13:15-16, 15:4)에 대한 결정적인 불신앙이었다.
② 인내가 수반되지 못한 불신앙이었다.
창세기 16장 3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이었더라」고 하였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아브람과 사래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언약 신앙의 소망이 약해져 버린 것이다. 창세기 16장 1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라는 말도 저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이다. 저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여호와 언약신앙에 대해 이렇게 약해져버린 것은 유감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흐름을 타고 사는 인생은 이렇게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10년을 기다렸다. 그래도 자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 저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10년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었다. 자식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아브람에게 약속된 씨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아 있었다.
(2) 불신앙의 결과
① 하갈의 교만이다.
창세기 16장 4절에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고 하였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자식을 생산치 못했을 때 브닌나로부터 멸시를 받았다(삼상 1:6).
② 사래의 분노이다.
창세기 16장 5절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그 책임을 넘기고 있다. 아브람이 하갈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갈을 남편에게 맡긴 것은 사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책임을 남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다고 하였다(창 16:6).
③ 아브람의 방임이다.
창세기 16장 6절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라고 하였다.
이러한 아브람의 소행은 가장으로서의 책임 회피이고, 무책임한 방임이다.
④ 하갈의 도망이다.
창세기 16장 6절 하반절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고 하였다.
바로 아브람 가정에 일어난 비극의 불씨들이다. 그것은 사래와 아브람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앙한 결과이다. 죄에 죄를 더하고, 불신앙에 불신앙을 더하고,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아브람가의 비극이다. 불신앙의 죄는 그 결과가 언제나 비극이다.

2) 하갈과 여호와의 사자(창 16:7-12)
창세기 16장 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다. 여기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 ‘말라크 야웨’(hyhy %a'l.m;)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천사가 아니고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구속사의 과정에 종종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현을 가리킨다(창 48:16, 출 14:19, 수 5:13-15).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자이면서도 또 어떤 형상을 취하고 나타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다른 면이 있다.
어떤 사자일까?
(1)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
① 그는 도망하고 있던 하갈에게 나타났다(창 16:7).
②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나타나 하갈을 만나 주었다(창 16:7).
분명히 하갈은 그의 고향인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애굽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블레셋인의 길(출 13:17)로서 해안선을 따라 가는 대상들의 길이었고, 또 하나의 길은 ‘술 길’로서 브엘세바에서 대상의 길과 나누어지고, 술 광야를 통해서 가는 길이었다(창 20:1, 25:18, 출 15:22, 삼상 15:7, 27:8).
말하자면 생존 위험으로 가득 차 버린 광야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물과 양식과 약대와 안내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광야길 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을 갖추지 아니하고 아브람 가정을 떠나 도망하는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다.
(2) 메시지를 주신 여호와의 사자
① 첫 번째 메시지는 돌아가서 사래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였다.
창세기 16장 8-9절에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녀가 겪고 있는 여정의 원인(어디서 왔으며)과 결과(어디로 가느냐)를 물었다. 그리고 사래에게로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종으로서 주인에게 복종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것이다(딤전 6:1-2).
② 두 번째 메시지는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예고해 주었다.
창세기 16장 1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하였다.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하갈이 학대받음을 보시고 자비를 베푸셨다는 뜻이 된다.
③ 세 번째 메시지는 이스마엘 자손의 번성에 대한 예고였다.
우선 수가 많겠다고 하였다. 창세기 16장 10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하였다.
비록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자손은 아니었지만 역시 아브람의 후손의 번성에 따른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후에 이삭에게 약속된 축복과는 달랐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이스마엘은 12족속의 조상이 되고 오늘날 아랍 족속들의 조상이 된다(창 25:12-16).
그리고 이스마엘 자손들의 성품과 기질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창세기 16장 12절에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하였다.
여기 나오는 ‘들나귀’는 이스마엘 자손들의 생태학적 기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욥 29:5, 사 32:14). 그 손이 사람을 치고, 또 모든 사람들의 손이 그를 친다고 함으로, 저들의 호전적이고 적대적인 삶을 예고하고 있다. 또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산다는 말은 지리적인 표현이 아니고, 모든 형제의 면전에서 대항하여 거주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삭과 그 후손의 면전에서 산다는 말이다. 바로 오늘날의 중동은 전 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살고 있다.
거칠고 난폭한 저들의 생태는 오늘날 중동 각지에 흩어져 사는 베드윈족(The Bedouin)을 위시한 여러 아랍 계열의 사람들에게 잘 나타나고 있다. 베드윈들이 한 손에 창을 들고 낙타나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며 달리는 사나운 모습 속에는 소박한 면이나 여유있는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언제나 도전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성경역사에서부터 근세,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방법으로 이웃족속들과 국가들을 유린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나 외에는 모두가 적이라는 아랍인들의 공통된 인식에서도 이들의 침략근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저들은 지금 세계의 면전에서 살고 있다.

3) 하갈이 체험한 ‘브엘라해로이’(창 16:13-14)
여호와의 사자의 방문을 받은 하갈은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창 16:13)라는 의미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샘을 이름하여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보고, 새 생명을 얻는 우물이란 뜻이다.

4) 이스마엘의 출생(창 16:15-16)
그 후 하갈은 다시 아브람에게로 되돌아갔고, 약속대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의 예고대로 ‘이스마엘’이라고 불렀다(창 16:15).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라고 하였다(창 16:16). 그가 가나안 땅에 거한지 11년만이다.
5) 아브람의 언약에서 받는 현대적 교훈
(1) 일부다처주의가 가져오는 가정의 비극을 직시해야 한다.
아브람과 사래는 이 점에 있어서 한 남자가 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질서의 진리를 어긴 것이다(창 2:24, 말 2:15, 마 19:4-5).
(2) 목적과 수단은 언제나 일치해야 된다는 교훈이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도 선해야 된다. 그러나 사래와 아브람은 후사를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함에 있어서 하갈을 취하는 잘못된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것이 아브람가의 비극이 된 것이다. 저들은 ‘아브람의 씨’를 목적하였다. 그런데 그 씨를 얻는 방법이 선하지 아니하였다.
(3) 이스마엘 자손 중에도 메시야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언약의 성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실 예수는 천하만민의 구세주이다(창 12:3). 하갈의 자손 곧 아랍인 중에도 구원받을 백성이 있음을 여호와의 사자는 예고해주고 있다(창 16:10).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난 사실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창 16:7). 예수는 이삭 자손의 구세주인 동시에 이스마엘 자손의 구세주도 된다는 사실이다.
(4) 아브람이 남긴 중동의 불씨이다.
구약시대부터 지금 그리고 종말에 이르도록 이스마엘 자손과 이삭의 자손은 영원한 숙적이다. 이삭의 후손은 여호와 신앙으로, 이스마엘 후손은 알라신앙으로 대결하고 있다.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대결하고 있다. 4000년에 이르는 중동 전쟁의 불씨는 바로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의 열매였다.
(5) 하나님 언약의 신실성을 본다.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사래도 아브람도 약해졌다. 그러나 아브람과 사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불변이고 부동이다. 확고하다. 그것은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받은 지 13년 후, 곧 아브람이 99세, 사래가 89세 되던 해에 하나님 자신 편에서 또 다시 재확인해주는 사실에서 입증되었다(17장).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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